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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이 시대의 동방 박사들 (마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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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동방 박사들 (마 2:1-12)

데이비라고 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12월에는 두 개의 크리스마스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X-Mass와 Christmas라는 것입니다.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고 지키는 크리스마스는 X-Mass입니다. 이때 X는 부정적인 표시이며, 또 미지수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와의 만남이 아닌, 그 무엇 X와 만나기 위해 모두 흥청거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12월24일)에는 직장 동료들과 술 마시고 신나게 밤새워 놀다가 집에 와서 잠잤다.” “성탄절(12월25일)아침에는 교회에 갔다 와서 친구 만난서 술 마시고 돌아와 잤다”

오늘날의 크리스마스는 사람들에게 점점 그 근본 의미가 퇴색되어가고, 예수님의 오심은 잊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들도 역시 세속화되어 가고 있으며 성탄의 가치에 무뎌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과거에 경건주의자들인 퀘이커 교도들은 1640년부터 크리스마스에는 어떤 행사도 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성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님의 탄생만을 기념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을 때 동방 박사들이 별의 인도함을 받아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동방 박사’는 바벨론 출신의 천문학과 점성학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존귀한 자들로 볼 수 있습니다. 6세기 말경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이름이 각각 멜콘(Melkon), 발사살(Balthasar), 그리고 가스퍼(Gasper)로 밝혀진 바 있습니다. ‘동방’이 바벨론이었다고 성경학자들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에는 예루살렘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던 유대인 포로들이 정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메시야의 관한 구약 예언을 사전에 깊이 알고 있었다는 것은 적어도 그들이 유대인과 긴밀한 유대관계에 있었던 자들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부터 와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은 놀라운 은혜이고 역사상 일회적인 축복입니다. 첫 번째 성탄은 한 번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축복을 받은 동방 박사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는지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며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본받는 성탄주일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경배의 사람입니다

  본문 11절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시기적으로 요셉이 거처를 마련한 다음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아기가 나신 곳이 ‘마굿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아기가 있는 곳이 ‘집’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상대방에게 무릎을 꿇고 ‘엎드려 경배’하는 것은 헬라나 로마의 예법이 아니라 동방의 예법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경배했던 대상은 마리아와 함께가 아니고 오직 아기 예수뿐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헤롯에게나 아기의 부친과 모친에게도 경배하지 아니했습니다. 경배의 대상은 오로지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한 분밖에 없는 것입니다. 타협이나 양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라는 박해와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이 진리만큼은 결코 물러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 누구에게도 경배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경배하는 범신론도 아니고 혼합신들도 아닙니다. 우리의 경배는 분명하고 단순합니다. 어렵거나 복잡하거나 모호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경배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C. S. 루이스의 글에 <영광의 무게>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영광스러움을 점점 잃어가는 성도의 모습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요즘 신자들은 돈과 야망과 명예에 너무나 쉽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돈과 야망과 명예라는 세상의 가치에 만족할 수 있는지 의아했다. 이 사람들은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진짜 영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정신이 확 들게 만드는 지적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는 터무니없이 쉽게 만족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만족하고 너무 쉽게 타협하고 너무 쉽게 안주하고 너무 쉽게 물러섭니다. 복음의 영광을 아는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영광을 아는 사람은 세상의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만족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 이상을 꿈꾸어야 합니다. 좋은 성도를 넘어 영광스러운 성도가 우리의 꿈이 되어야 합니다. 있다가 없어지는 영원하지 않는 것에 목 메달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삶, 영원한 것에 가치와 소망을 두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영광스러운 삶을 위해 마음 비워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그 영광스러운 삶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어떤 우상이나 명예, 권력, 물질, 세상적인 것에 굴복하거나 경배하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다니엘처럼 하나님 때문에 사자 굴에 들어가도 결코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어떤 우상에게도 절하지 않음으로 풀무불 속이라도 기쁨으로 들어가는 불굴의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합니다. 변명하거나 자신과 상황을 합리화합니다. 동방 박사들처럼 오직 예수님께만 엎드려 경배합시다. 예수님을 구경하거나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엎드려 겸손한 마음으로 경배해야 합니다. 아기 예수님만 경배하는 이 시대의 동방 박사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섬김의 사람입니다

  본문 11절 "집에 들어가 아기의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이방의 왕들이 메시야 앞에 예물을 드리고 복종하게 될 것이라는 구약 예언(시72:10, 사60:6)의 분명한 성취입니다. 한편 고대 동양 풍습에서는 왕을 알현할 때 예물을 가지고 가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헌상한 세 가지 예물 중 황금은 동서고금을 통해 매우 값지고 불변하는 성질의 귀중품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이 예물입니다. 아무것이나 쓸 수 없는 것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행위입니다.

유향은 값비싼 향료로서 반질반질하고 향내 나는 흰색의 액체이며 아라비아 지방의 관목 껍질에서 자국을 내어 얻습니다. 몰약은 주로 아라비아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추출되는 것으로서 상당히 고가의 향기를 지닌 액체입니다. 이는 시체를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 내지는 마취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고금의 많은 주석가들에 의하면 이 예물 가운데 황금은 메시야 왕권을, 유향은 예수의 신성을, 그리고 몰약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이에 대하여 칼빈(Calvin)은 왕과 제사장과 그분의 장사되심을 각각 상징한다고 봅니다.

동방 박사들의 종교적 동기를 이해한다면 예물들에 상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예물이 세 가지라는 사실에서 동방 박사들은 세 사람이라는 교회 전승이 형성되게 되었습니다. 세 가지 예물은 모두가 값비싼 것들로서 예수님의 가족들이 헤롯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신하였을 때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무엇을 얻거나 구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최고의 예물을 준비하여 아무런 조건이나 사심 없이 아기 예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이들은 섬김의 사람들입니다. 나의 것으로 예수님을 기쁘게 섬기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보좌를 떠나 낮고 낮은 말구유에 오신 목적은 인간을 섬기고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세상과 교회는 말없이 자신의 것으로 남과 세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강탈과 강요의 사람이 아닌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조건 없이 섬기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날마다 증가하게 됩니다. 섬김의 사람은 이미 큰 복을 받은 사람들이고 더 큰 복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하늘에서 가장 크고 높은 사람들입니다.

  교통 경찰관이 신호 위반한 차를 세웠습니다.
  “신호 위반 하셨습니다. 면허증을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급히 서두르다가 깜빡 잊고 면허증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이름과 주소, 직업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름은 막사이사이, 직업은 대통령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 유명한 필리핀의 막사이사이 대통령의 이야기입니다.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교통 경찰관에게 겸손히 잘못을 시인했으며, 벌금도 물었다고 합니다. 신학자 풀리쳐에게 한 신학생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유능한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까?”
  풀리쳐 박사는 조용히 그 학생에게 대답했습니다.
  “자네가 유능한 전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이 한 가지를 잊지 말게나! 그것은 영국에서 내가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자세를 갖추는 것일세.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자네를 통해 일하실 것이네”

겸손한 사람은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럴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고 그를 하나님의 귀한 축복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겸손해야 섬길 수 있습니다. 교만하면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욕심을 부리고 남의 것을 빼앗게 됩니다. 헤롯처럼 남을 죽이고 살해하게 됩니다. 마귀가 교만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섬기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어디서나 섬기는 사람이 됩시다. 섬길 일을 찾읍시다. 섬기는 정신으로 삽시다. 이 시대의 동방 박사들이 되어 가장 좋은 것으로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순종의 사람입니다

  본문 12절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꿈’은 아기 예수님을 지키시기 위하여 헤롯의 악한 계획을 무산시키시는 하나님의 직접 계시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박사들에게 헤롯의 눈길을 벗어나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확히 어느 길로 갔는지는 분명하지 않고 다만 예루살렘을 피하여 사해의 남단으로 돌아갔든지 요단강을 건너 돌아갔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들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하나님의 길, 생명과 진리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헤롯의 협박과 유혹의 모든 것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지시에 목숨과 모든 것을 걸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하나님의 길을 걷다가 헤롯에게 붙들리면 생명과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죽음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라고 한 것은 그리 간단하거나 쉬운 것이 아닙니다. 목숨과 생명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 다른 길은 순교의 길이며 죽음의 길입니다. 동방 박사들의 믿음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 줍니다. 믿음만큼 순종하는 것입니다. 거역하고 반항하고 불순종하는 것은 믿음이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믿음만큼 기도, 봉사, 충성, 헌금,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충만은 순종충만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것 부족하여도 절대 순종의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결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불순종은 불행이고 반드시 버림받고 멸망합니다. 불순종은 지옥 직행입니다. 순종은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순종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욱 더 순종합시다. 순종에 비례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어느 교회에서 넒은 예배당이 필요해 땅을 구입했는데, 그 땅에 허름한 건물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 건물을 고쳐서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허물어 버리고 새로 지를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건물을 고치는 비용에 예산을 조금만 더 들이면 새로 지을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결국 새로 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공사를 시작하고 보니, 비용이 예상보다 자꾸만 불어났습니다. 이렇게 되자 성도들 사이에 큰 분란이 일었습니다. 신축 계획에 반대한 사람들이 신축을 강력히 추진한 사람들과 의견 충돌을 빚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당을 새로 짓기 전에는 예의 바르고 인격적이던 성도들이 서로 대적하며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정확한 판단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들은 자신이 정해 놓은 한계 안에서만 순종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한계를 정해 놓고 그 안에서만 순종한다면, 그 사람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의 한계를 정해 놓은 사람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할 때 기꺼이 드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순종을 통해 이뤄질 하나님 일들의 가치가 자신과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가치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 생각, 고집, 가치관, 욕심, 물질, 소유가 더 크고 귀할 때 순종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음성, 약속, 사명을 먼저 생각하고 크게 존중하는 사람은 어떠한 순간에라도 절대 순종하게 됩니다. 불순종하면 잘 될 것 같지만 반드시 망합니다. 순종하면 망할 것 같아도 하나님이 놀랍게 복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순종의 사람들이 영육과 자손들이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그 길로 순종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길은 형통하고 행복하고 풍성합니다. 순종의 동방 박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성탄주일입니다. 동방 박사들처럼 경배와 섬김과 순종의 사람들이 됩시다. 성탄의 복이 여러분과 가정과 가족들과 생애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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