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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의로운 사람, 요셉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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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사람, 요셉 (마 1:18~25)

  전에 우리 예배당에서 ‘웰컴 투 동막골’이라는 영화를 함께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바로 조연들의 활약이었습니다. 개그맨 출신 임하룡 같은 조연들의 개성있는 연기가 흥행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 같았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주연 같은 조연이 있지 않았습니까?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를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남자들, 특히 이명박 후보와 이회창 후보 두 사람을 무던히도 애태우지 않았습니까? 때문에 어떤 이는 “박 전 대표가 이번 대선에서 직접 뛰지 않았지만 주연 같은 조연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즘은 조연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성탄의 주인공은 물론 아기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조연은 마리아, 요셉, 동방 박사들, 들녁의 목자들 등일 것입니다. 바로 그 조연들 가운데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서 그 역할을 잘 수행했습니다. 과연 요셉은 그 역할에 꼭 맞는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요셉을 선택하셨을까요? 요셉의 어떤 점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을까요? 봉독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 그 해답을 발견하고 우리도 또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주연 같은 조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요셉이 마리아와 약혼했습니다. 그는 장차 마리아와 함께 이룰 행복한 가정을 꿈꾸면서 열심히 목수의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녀가 임신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마리아를 그런 부정한 여자로 보지 않았는데...

  그 당시 율법에 따르면 처녀가 임신하면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요셉이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19절 말씀입니다.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남의 허물을 알게 되면 그 허물을 떠벌이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입이 간지러워서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남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결혼할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의 배필이 될 여자가 정작 아들은 알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만 배가 불렀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도 데려와야지. 요즈음 세상이 다 그런데 어쩔 수 있나...” 그냥 데리고 오겠습니까? 아마 이럴 것입니다.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아무리 세상이 썩었다 한들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런 아이는 결코 데려올 수 없어.”

  요셉도 속으로는 많이 갈등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나와 결혼하기로 해 놓고 임신을 했단 말인가? 그런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뿐만 아니라 매우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도 부족했는가? 이제 창피해서 어찌 다닐까...’

  또한 증오심도 생겼을 것입니다. 사람이 배신을 당하면 쉽게 증오심으로 발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그 일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그 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참으로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덮어 주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다음으로 요셉은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의 다음 행동이 20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 문제를 놓고 깊이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각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생각에는 두 가지 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는 생각의 방향입니다. 생각을 하되 어느 방향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감사할 수도 있고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해할 수도 있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좋은 방향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는 생각의 정도입니다. 얼마나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식음을 전폐하고 또 밤잠도 못 자면서 걱정합니다. 물론 걱정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껏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생각은 하되 자기 입장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요셉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임신 때문에 처하게 된 자기의 입장부터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 생각만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입장도 생각했습니다. 마리아가 당하게 될 일들을 생각하자 그녀가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철저히 배신을 당하신 하나님, 때문에 엄하게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사자가 언제 요셉에게 나타났습니까? 바로 그 일을 생각할 때, 즉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할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는 사람을 또한 기뻐하십니다.

  끝으로 요셉은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요셉의 행동이 말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24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요셉은 순종했습니다. 이해하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는 하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순종과 이해는 다릅니다. 이해와 순종의 공통점은 어떤 일에 대하여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와 순종의 차이점은 대가에 있습니다. 이해는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지만 순종은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요셉은 부정한 여인을 데려옴으로 자신이 지불해야 할 고통을 감수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데려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결심한 것을 가족들에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부모, 형제, 친척들이“그러면 그렇게 해라.”했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위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형편도 다르고 삶의 내용도, 사명도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순종입니다. 그들은“가라!”하시면 갔습니다. “왜?”가 없었습니다. “하라!”하시면 했습니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즐겨 쓰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교육과 양육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맡아 키울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남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 사려 깊은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면“아니오!”가 없고“예!”만 있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내일 모레면 성탄절입니다. 성탄의 주인공이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서 맡겨진 역할을 잘 감당한 요셉과 같이 다시 오실 그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맡겨진 역할을 충성스럽게 잘 감당하는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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