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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예수님의 세 번째 이름 : 하나님의 아들 (요일 5: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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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세 번째 이름 : 하나님의 아들 (요일 5:5~13)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저는 어렸을 때 가끔 이런 의심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진짜 친부모일까? 우리 집에 아들이 넷이나 되는데 혹시 위의 형 셋은 진짜 자식이지만 나는 어디서 주워온 자식이 아닐까?"하는 생각 말입니다. 어른들이 가끔 아이들을 놀릴 때 "너 주워온 자식이다"며 어디에서 주워왔다고 합니까?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놀립니다. 그런데 평상시에는 이런 말이 심각하게 안 들리는데 가끔 부모가 너무 나를 섭섭하게 대하거나 너무 모질게 야단치면 꼭 이런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다리 밑에서 주워온 자식 아닐까? 정말 친자식이 아니라 어디서 입양해 온 자식 아닐까?" 하지만 이건 다 어릴 때 얘기고 제가 어른이 된 후에 이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보았습니다. 왜요? 야단을 치더라도 그것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부모가 조금 섭섭하게 하더라도 다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럴 때 "정말 내 친부모 맞아? 난 주워온 자식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적어도 철이 든 후에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내 부모는 내 부모요 틀림없는 진짜 내 아버지 내 어머니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예수님의 세 번째 이름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성경은 수없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며, 그것도 여러 아들 중 하나가 아닌 독생자(獨生子), 즉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한 것처럼 오늘도 수많은 성도들이 입으로 마음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예수님을 너무나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다보니 이 사실을 너무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고 또 중요한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쉽고 당연해 보이는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과 이 고백이 안 되는 사람은 그 결과가 너무나 달라집니다. 어떻게 달라지는가? 오늘 본문 요한1서 5장은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만 세상을 이길 수 있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길 힘은 오직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뿐입니다. 세상이 나를 핍박하고 배반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오직 한분뿐인 믿을 이가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믿는 사람에게 배신 당해본 분이 있을 것입니다. 가장 가깝고 친한 사람에게 아픔을 당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배반합니다. 인간은 반드시 마음이 바뀌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영원히 믿고 의지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간 중에도 영원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분, 결코 바뀌지 않는 분, 한 번도 우리를 배반하거나 버리지 않는 분,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세상을 이길 힘을 얻는 것입니다. 세상 그 어떤 고통과 실패가 닥쳐와도 영원히 변치 않는 분, 전지전능하신 그 분을 의지해 이겨낼 수 있게 됩니다.

둘째, 9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 대해 증거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어떤 사람이 주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증거하신 사실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와 변화산에서 변모되실 때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6~17와 17:5) 이렇게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님이 그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는데 만약 이 사실을 못 믿는다면 어떻게 되느냐?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분명히 예수님이 그 아들이시라고 증거하셨는데도 이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셋째, 12절과 13절을 읽습니다.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가장 중요한 구절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 믿어야 영생 얻고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 영생 얻는 것은 우리의 힘이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선행으로도 안 됩니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혹은 정말 좋은 일 많이 한 사람이라도 이 한 가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지 않으면 영생도 없고 구원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에게 묻습니다. 분명히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쉽고 명백한 사실을 왜 사람들이 못 믿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쉬워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너무 어려우니까 문제란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이 사실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절대 믿지 못하는 분들이 의외로 꽤 많습니다. 아니, 꽤 많은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2천 년이 넘도록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끝까지 거부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예수님 당시부터 유대인 중에 예수님을 성인이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보거나 위대한 인물이라고 인정할지언정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절대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14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이런 대답이 나온 것입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이미 예수님 당시부터 예수님이 절대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들을 한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올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이후에 기독교가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정하는 이단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요즈음 한국교회를 가장 시끄럽게 하고 교회를 흔들어 놓는 이단이 신천지 이단과 안상홍 증인회(하나님의 교회) 두 이단집단인 것처럼 초대교회를 가장 흔들어놓았던 두 이단이 바로 '가현설'과 '양자설' 이단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이라도 여러분이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꼭 알아두어야 하겠기에 설명합니다.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이란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으로 올 수 있느냐? 불가능하다고 해서 인간의 모양을 하고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한 이단입니다. 마치 탈을 쓴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껍데기를 쓰고 나타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이단은 '양자설'(養子說, Adoptionism)인데 쉽게 말하면 예수가 본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이었는데 워낙 탁월하고 뛰어난 인간이라서 하나님이 그를 양자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 순간 성령이 강림해서 그를 하나님의 양자로 삼았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들이 듣기에는 '가현설'이나 '양자설' 모두 황당하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이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이 두 이단 때문에 교회가 정말 시끄러웠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까지 펴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더욱이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이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올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서 그렇게 궁색한 설명까지 하려고 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절에 가면 성경이 꽂혀 있고 "우리도 예수를 훌륭한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성탄절에 절에서 교회에 축하화환을 보내기도 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멋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예수님은 성인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저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세계사나 도덕 교과서에서 가장 마음에 안 드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세계 4대성인(四大聖人)이라는 말입니다. 지금도 교과서에 이 말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학교 다닐 때는 분명히 이 말이 나왔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요? 세계 4대성인이 누구지요? 바로 세계 4대 종교인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유교를 창시한 예수, 석가, 마호메트, 공자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호메트를 빼고 대신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넣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대로라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석가모니나 마호메트나 공자, 소크라테스와 동급이라는 말입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석가모니는 '싯다르타'라는 이름을 가진 인도의 한 나라의 왕자였는데 열심히 참선하다가 깨달음을 얻어 석가모니가 되었다고 하니 그도 인간은 인간입니다. 마호메트는 메카의 상인이었습니다. 공자나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요 인간임은 당연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들과 함께 예수님을 4대성인에 넣는다는 말은 예수님도 이들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뜻밖에 안 됩니다. 얼핏 보기에는 괜찮은 말처럼 들리지만 이 '세계 4대성인'이라는 말 속에는 우리의 신앙을 부정하는 중대한 함정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이 공부하고 우리 자녀들이 보는 교과서에 이렇게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교회뿐 아니라 우리 가정에서 신앙교육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일개 인간으로, 기껏 해봐야 성인이나 위대한 사람으로 보려는 시도는 그 역사가 아주 오래 되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예수님은 성인도, 뛰어난 사람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 누구도 영생을 얻을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낮아지심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인간으로 낮아질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사실 가현설이니 양자설이니 하는 이단이 나온 이유가 바로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성이나 상식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높아지기 바라고 남들이 인정해주기 바라며 삽니다. 그래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높아지려고 좀 더 출세하고 인정받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런데 세상에 어떤 바보가 스스로 낮아집니까? 누가 스스로 높은 자리를 마다하고 가장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옵니까? 더욱이 신과 같은 위치에 계시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인간으로, 그것도 가장 낮고 천한 인간으로 스스로 내려온다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적어도 인간적인 상식으로나 이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빌립보서 2:5~8에 나옵니다. 다함께 찾아 읽읍시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의 낮아짐의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절) 어떤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6절) 예수님은 본디 하나님과 같은 존재,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 어떻게 되셨다는 것입니까? 스스로 그 높고 귀한 자리를 버리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7절) 1차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번 낮아지신 것만도 이해가 안 가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낮아지셨는지도 이해 못 하겠는데 그 분은 여기서 한 번 더 낮아지십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절) 사람으로 낮아지신 것만으로 모자라서 아예 사람 중에도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낮아지시고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처참한 죽음인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낮아지셨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진 분이기에 예수님은 하늘의 저 높고 귀한 보좌를 버리시고 2천 년 전 성탄절에 베들레헴에서 싸구려 방도 하나 구하지 못하고 소나 말 같은 짐승이나 자는 더러운 마구간 구유에 나신 것입니다. 성탄절 때 이 마구간 장면을 재현하는 장식이 가끔 눈에 띕니다. 너무 인자하게 잘 생긴 요셉과 너무 예쁜 마리아가 등장하고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예쁜 구유에 새하얗고 너무 예쁘게 생긴 아기가 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요셉도 마리아도 햇볕에 검게 그을린 투박한 모습에 거친 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방금 전 여물이 담겨있었을 더럽고 딱딱한 나무 말구유에 아기가 뉘어 있어야 맞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예쁘고 멋지게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천하고 더럽게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이렇게 낮고 천한 목수의 아들로 더럽게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아예 십자가를 지고 가장 처절하고 잔인하게 죽는 십자가 죽음의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낮아지고 또 낮아지심으로 우리를 또 높이고 높이셔서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음을 가진 분이었기에, 이런 방법을 택하시고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이 비밀을 깨닫고 믿는 자만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빌립보서 2장 본문은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렇습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의 비밀을 알고 믿는 자들은 누구든지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낮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남들처럼, 세상처럼 내가 높아져서 남들 위에 서고 인정받고 우쭐대며 사는 방법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낮아지고 내가 섬기는 방법을 택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낮아짐과 섬김에 대해서 머리로는 잘 알지만 삶으로 실천하지 못합니다. 아마 '낮아짐' '겸손' 하니까 뭐 대단한 것인 줄 알고 지레 겁을 먹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겸손하라는 것이, 낮아지라는 것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줄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거창한 일인 줄 알고 잘 실행하지 못하는 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낮아짐과 겸손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의외로 가까운 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저를 가르친 신학교 교수님 중에 참 존경하는 분이 한 분 있습니다. 물론 그 분의 학문적 실력이나 인격도 존경하지만 정말 그 분을 존경하게 된 데는 의외로 사소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 교수님과 함께 화장실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남자 분들 아시지요? 남자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있는데 불쑥 들어오는 여자분들 말입니다. 바로 화장실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들입니다. 저도 이분들 때문에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만 그날도 화장실에서 그 아주머니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수님은 그 아주머니에게 아주 상냥하게 "안녕하세요? 수고 많으시지요?" 하고 인사를 하고 그 아주머니도 교수님을 향해 "예, 교수님도 잘 지내시지요?"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날 그 화장실에서 짧은 순간에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도 수없이 이런 분들을 많이 만났지만 늘 무심코 지나쳤을 뿐 한 번도 인사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낮아진다는 것, 겸손해진다는 것은 별 것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거창한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바로 낮아지는 것이요 섬기는 것입니다. 실천해 보십시오.

제임스 레이니(J.T.Laney)라는 분을 아십니까? 이분은 미국의 목사인데 교수와 정치가로도 활동했고 1993~97년까지 주한미국대사까지 지냈습니다. 그가 미국 에모리 대학 교수로 있을 때 건강을 위해 늘 걸어서 출퇴근을 했는데, 학교 가는 길에 자그마한 집 앞에 연세 많은 노인이 쓸쓸하게 앉아 계시더랍니다. 그 순간 레이니는 마음이 끌려서 노인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었고 그 후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서 말동무도 되어주고 노인의 집 마당 잔디도 같이 깎아주고 함께 커피도 마시면서 2년여 동안 교제를 나눴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노인이 보이지 않아 궁금해서 찾아가 물어보았더니 돌아가셨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분의 장례식에 참석한 레이니는 깜짝 놀랍니다. 그가 바로 코카콜라 회사의 전 회장이었던 것입니다. 그 노인은 레이니에게 이런 유서를 남겼답니다. "당신은 2년 동안 내 말벗이 되어 준 고마운 친구였소. 나의 좋은 친구 레이니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25억 달러와 코카콜라 주식 5%를 유산으로 남깁니다." 레이니 교수는 그 유산을 에모리 대학의 발전기금으로 내놓았고 이 기금을 바탕으로 그저 그런 대학이었던 에모리 대학이 일약 명문대학으로 급성장을 하게 되었으며 학교는 레이니를 총장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이 이 에모리 대학을 '코카콜라 대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유산 물려받는 법을 가르쳐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은 우리의 작은 낮아짐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의 작은 섬김이 놀라운 일들을 일으킬 수 있음을 알려드린 것입니다. 엊그제 뉴스에서 연달아 세 장면이 나오는데 제게 겸손과 섬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먼저, 대통령으로 당선된 분이 "겸손하게 국민을 섬기겠다."고 소감을 말하는데 이 '겸손'이야말로 기독교적인 용어 아닙니까? 우리 기독교인 모두 당선자가 진정한 신앙의 정신으로 겸손한 대통령이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

런데 그 다음 장면에서 아들을 때린 사람들을 찾아가 폭력을 휘두른 혐의로 사회봉사명령을 받은 모 대기업 회장님이 노인요양시설에 가서 노인들에게 음식을 떠드리는 봉사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 편견인지 몰라도 봉사하는 그분의 얼굴은 그리 즐거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회봉사'명령'이 아니었다면 어디 그 대단하신 회장님이 평생 그런 일을 해보겠습니까? 그 다음에 바로 대통령선거 때나 국회위원 선거 때마다 후보들이 앞 다투어 시장 상인들을 찾지만 선거 끝나면 단 한 번도 안 찾아온다는 상인의 푸념도 들었습니다. 남이 시켜서 하는 낮아짐 말고, 뭔가 바라는 것이 있어서 하는 그런 겸손 말고 진짜 내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작은 낮아짐, 겸손이라면 거기에는 정말 큰 힘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우리를 위해 낮아지고 또 낮아지신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놀라운 기적을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의 가장 가까운 주변에서, 가장 작은 일부터 이 예수님의 방법을 당장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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