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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전문가인가? (행 27: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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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전문가인가? (행 27:01~44)

순풍에 돛을 단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지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자 애쓰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지는 길이기를 우리는 소망합니다.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할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십자가의 길이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길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한데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십자가라고 하는 말로 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 그런 고난의 여정이 펼쳐지곤 하기에 때때로 낙심되어 주저앉고 마는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탄식합니다.

“주님, 내가 편하게 살고자 해서만도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결코 쉬운 길만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제가 감당하기에는 이 길이 너무 힘이 듭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참으로 쉽게 사는 것 같은데 주님을 따르는 이 길이 왜 이다지도 험하기만 합니까?”

그래요 아마도 이런 탄식을 한번쯤 해보지 않은 분들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저앉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까지 이어지는 길이 결코 쉽게만 갈 수 있는 길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땀 흘리며 수고하지 않고는 열매를 얻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주어지는 그 영광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리고 상급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잘 알기에 더 그렇습니다. 이미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길을 갑니다. 하지만 정말 주님을 따르는 그 길이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기만 한 길이던가요?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의 여정을 통해 그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을 따르는 길은 험난한 가시밭길이라는 사실입니다.
드디어 바울은 로마 군대에 의해 배로 로마까지 호송됩니다. 바울을 로마까지 호송하게 된 백부장 율리오는 그래도 매우 친절한 사람이어서 마케도니아 사람인 아리스다고가 함께 갈 수 있도록 허락하였고 시돈에 도착했을 때는 자유롭게 친구에게 갈 수도 있고 그들로부터 쓸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배려도 해 줍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역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길에 하나님께서 이모조모로 베푸시는 은혜가 정말 놀랍고 고맙다는 마음이 듭니다. 시돈을 떠나 항해를 계속하는 동안 맞바람이 불어 긴장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루기아 지방에 무사히 도착했고 거기서 이탈리아로 가는 배를 발견하여 옮겨 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맞바람이 불어와 라새아라는 도시에서 가까운 미항까지 도착하기가 여간 어렵지가 않았습니다. 맞바람으로 인해 시간을 많이 빼앗긴데다가 이미 금식 기간도 지나 더 이상 항해하는 것이 위험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충고합니다.

“여러분, 계속해서 항해를 하다가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와 짐만 손실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을 듣기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그 항구는 겨울을 보내기에는 적당하지 못한 항구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그 곳을 떠나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보내고 싶어 했습니다. 뵈닉스는 크레타 섬에 있는 항구 도시인데 남서쪽과 북서쪽을 향해 위치한 곳이었습니다. 마침 남쪽에서 순풍이 불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자기들의 계획대로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닻을 올리고 크레타 섬 해안을 따라 항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유라굴로라고 부르는 폭풍이 섬 쪽에서 불어 왔습니다. 배는 폭풍에 휘말려 바람을 거슬러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가려는 노력은 포기하고 바람이 부는 대로 배를 내맡기고 표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의 남쪽 방향으로 떠밀려갈 때에 간신히 거룻배를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선원들은 거룻배를 끌어올린 다음에 밧줄로 동여맸습니다. 그들은 배가 스르디스의 모래톱에 걸릴까 염려하여 돛을 내리고 배를 바람 부는 대로 떠밀려가게 했습니다. 폭풍에 너무도 시달리자 이튿날에는 선원들이 짐을 바다에 내던졌습니다. 삼 일째 되는 날에는 배의 장비마저 내어 던졌습니다. 하지만 며칠째 해도 보지 못했고 별도 보지 못했습니다. 바람은 계속해서 거세게 불어 왔습니다. 결국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모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바울이 가는 이 길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따라 로마까지 가기위해 택한 길입니다. 비록 힘들 것은 각오를 했지만 그래도 주님을 위해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죄수로서의 신분도 마다하지 않았던 바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처음 시작할 때처럼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려지게 만들 수는 없었을까요? 물론 주님을 따르는 그 길이 가시밭길이 될 것을 각오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까지 간다고 하는 그 자체가 벌써 가시밭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단순히 가시밭길이 아닌 목숨까지도 왔다 갔다 하는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의 방해를 피해 죄수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무사히 로마까지 갈 수만 있다면 죄수면 어떻고 묶여서 끌려가는 길이면 어떨까 그 길이 힘들다고 해도 어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겠는가 싶었습니다.

어쨌든 목숨을 잃을 염려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것은 몰라도 바닷길만은 그래도 수월하게 열려지도록 만들어주셔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찌 그 가는 길에 태풍까지 일어나 목숨까지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만드신단 말입니까? 단지 여기까지만 보면 이건 정말 아니다 싶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럴 수는 없다는 마음도 듭니다. 아니 누구를 위한 길입니까? 바울 자신이 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고생을 자처하고 동행하는 동료들을 생각해서도 아닙니다. 물론 동료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각오한 길입니다. 하지만 생명까지 위험할 정도로 몰고 가실 이유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럴 때 우리는 좌절합니다. “정말 이건 아닙니다. 하나님 정말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래도 도움이 되어 주시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더욱 상황이 어렵게 만드실 이유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면서 우리가 하소연도 하고 탄식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답은 없습니다. 이젠 정말 더 이상 살 희망조차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그 큰 배들도 태풍 아래서는 힘을 못 쓰는데 하물며 지금 바울이 타고 있는 배가 크다고 한들 태풍 앞에 무슨 힘을 쓸 수가 있겠습니까? 오죽하면 배 안에 실었던 짐들까지도 다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마지막 장비들마저도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럼에도 살 희망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주님을 따르는 길이 너무도 힘들어서 다 포기하고 주님을 떠나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보려고 해도 여전히 힘들기만 합니다. 어떤 희망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계산을 따져보아도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도무지 계산이 되지를 않습니다. 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그것도 어느 정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라도 있을 때 얘기지 아무런 틈도 보이지를 않는 그런 절망적인 입장에 빠져있다면 그래서 심지어 죽음까지도 생각하게 되는 그런 처지에 있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내 스스로 죽자고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누구는 또 말합니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를 가지고 정말 죽을 힘을 다 해 살아보라고요. 죽을 생각까지도 한다면 더 이상 우리가 내려놓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치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준비하신 것처럼 죽음 밖에는 더 이상 길이 없을 것 같은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를 위해 피할 길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여호와 이레 즉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이레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항상 귀한 길을 예비하고 계심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절망 중에 다시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피할 길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죽음을 기다리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소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배 안의 사람들에 그대로 전합니다.

“여러분, 내가 크레타 섬을 떠나지 말자고 한 말을 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이런 손해를 입지 않았을 것이고 물건을 잃어버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제 제가 권합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이 배만 잃을 뿐 여러분 중에는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밤에 나의 주님이요,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천사가 내 곁에 나타나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반드시 황제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모든 사람들의 목숨을 너에게 맡겨 주셨다.’ 그러니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천사가 내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어떤 섬에 밀려가 닿게 될 것입니다.”

이 바울의 말처럼 십사 일 되던 밤에 바울이 탄 배는 아드리아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한밤중에 선원들은 배가 어떤 섬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물 깊이를 재어 보니 약 40미터였고, 조금 더 가서 다시 재어 보니 이번에는 약 30미터였습니다. 혹시 암초에 걸리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어 닻 네 개를 물에 던져 놓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선원 몇 사람이 배에서 빠져 나갈 속셈으로 배 앞쪽에 닻을 더 내린다는 구실로 거룻배를 물에 내렸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 사람들이 배에 남아 있지 않으면 당신들마저 구조되지 못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밧줄을 끊어서 거룻배를 떼어 버렸습니다. 날이 밝을 무렵,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면서 말했습니다. “지난 십사 일 동안, 여러분은 마음을 졸이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음식을 드십시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그 누구도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하고서 모든 사람 앞에서 빵을 들어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빵을 떼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도 용기를 얻어 음식을 먹었습니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백칠십육 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나서 식량을 바다에 던져 배를 가볍게 했습니다. 날이 밝자 사람들은 그 곳이 어느 땅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눈에 모래밭이 있는 항만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배를 모래밭에 대기로 작정하고 닻줄을 끊어서 닻을 바다에 내버리는 동시에 키를 묶은 밧줄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앞 돛을 올려서 바람을 타고 해안 쪽으로 배를 몰았습니다. 그러나 배는 두 물살이 만나는 곳에 들어가 모래톱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뱃머리는 꼼짝도 하지 않고, 배 뒤쪽은 거센 파도에 부딪혀 깨어졌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다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배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목숨을 상하지 않고 무사히 섬에 닿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무사하다는 것입니까? 지금까지는 폭풍 가운데 이리저리 휩쓸렸지만 이제부터는 별 탈 없이 섬에 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잘 풀려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배가 모래톱에 걸려 좌초하고 말았고 배는 파도에 깨져나가기 시작합니다. 또 다시 절망입니다. 희망에 사로잡혔던 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배 안에 있었습니다. 배는 그래도 무사했습니다. 한데 이제는 배마져 깨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주셨던 말씀은 무엇입니까? 모두가 무사히 섬에 닿을 것이라는 그 말씀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핍박과 시련을 당합니다. 주님의 말씀만 아니라면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그런 어려움을 당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고자 다짐할 때 이미 그것은 각오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고생도 어느 정도지 이젠 그만할 때도 됐다 싶은 바로 그때 모든 것이 이제 정상적으로 풀려나가는 것 같았던 바로 그때 또다시 휘몰아치는 시련의 늪은 더 이상 버틸 힘도 없게 만드는 좌절 그 자체입니다. 아니 누구를 위해서 지금까지 이 고생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그리도 이제는 그 모든 고생의 날을 마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신 분이 누군데 이게 무슨 고생이 끝난 것이란 말입니까? 오히려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만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또 다시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뭐라고 말씀 좀 해 보십시오. 정말 하나님 살아계신 것이 맞습니까?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맞는 말입니까?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하신 것이 아닙니까?”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지금 우리 자신을 위해 이런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던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조금은 쉽게 조금은 편하게 만들어 주실 수는 없는 것일까요? 조금 풀려지는 것 같다가 다시금 더 깊은 절망가운데로 이끌어 가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니 나만이 아니라 나를 그렇게도 힘들게 하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그냥 풀려진다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어진다면 우리는 나를 내세울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주님을 따랐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셨다고요.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한데 그 말 가운데 내 의가 드러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나의 의는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 모든 어려움을 감당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는 힘도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 보십시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군인들이 죄수들이 헤엄쳐 도망치지 못하도록 모든 죄수들을 다 죽이려고 계획을 짰을 때 백부장 율리오가 어떻게 합니까? 그 마음에 바울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군인들이 죄수를 죽이지 못하도록 “헤엄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바다로 뛰어들어 육지로 올라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널빤지나 부서진 배 조각을 붙잡고 나가게 명령했습니다. 그래 드디어 그들은 모두 무사히 육지로 올라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백부장 율리오가 그토록 바울을 살리고 싶어 했을까요? 바울이 무어 그에게 그토록 대단한 사림이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가 바울을 살리고 싶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리오의 마음에 바울을 살리고 싶다는 마음을 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로 인해 바울뿐 아니라 다른 모든 죄수들까지도 살아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정말이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말씀대로 모두가 다 무사히 섬에 도착을 하게 됐습니다. 비록 배는 다 깨어져 버렸지만 그래도 목숨은 다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로 인해서 그 섬에서 큰 역사가 일어나게 되지를 않습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어디에 나타납니까? 누구에게 나타납니까?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끝까지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그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역사야 말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이야말로 진정 오늘도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시다”고 고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지 않았다면 이런 고백을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할 때 잠시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려지는 듯 하다가 깊은 좌절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이 벌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부르짖었건만 모든 상황은 오히려 더 절망으로 바뀌어버리는 경험을 하고 계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아직 끝이 아니란 말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다 풀려지고 해결이 된다면 아하 내가 기도해서 내가 이렇게 섬겨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하겠죠? 그러면 내 의는 드러날지 몰라도 하나님의 영광은 그 자리에 없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절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이어지게 될 때 오히려 모든 것이 더 악화되기만 할 때 그래도 더 부르짖어 기도하면서 하나님 나는 죽고 오직 주님만이 드러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는 바울의 고백이 우리 입술을 통해서도 드려지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바로 그곳에 바로 그때에 하나님의 진정한 역사 최후 승리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라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 싶습니까? 더 이상 이젠 방법이 없다 싶습니까? 아닙니다. 거기서 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내가 나를 다 내려놓을 때 바로 그때부터 하나님의 진짜 도우시는 역사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때가 더 뜨겁게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참된 승리와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귀한 최후 승리자로서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우뚝 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바다에 관해서서는 선원들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바다에 관해서는 전문가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천막 기술자입니다. 바다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백부장 율리오가 선원들의 말을 더 믿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습니까? 처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배를 저어가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했을 때 목수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고 했다면 과연 두 배에 채울 정도로 고기를 잡을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바울의 말을 들었다면 저들은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결국은 바울의 말처럼 되었습니다. 겨울 지나기 전에 도착할 수 있다고요? 겨울이 자난 다음에야 도착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 너무도 험한 길을 돌아왔습니다. 가진 것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교훈을 얻었다고 하기에는 그 대가가 너무도 컸습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대로 따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종들을 통해 주시는 말씀이 때로는 무모하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너무 무계획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성급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반대로 너무 신중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뻔한 것을 가지고 너무 그런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따를 때 거기에 참된 길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 길이 돌아가는 길 같으나 가장 빠른 길입니다. 가장 힘든 길 같으나 가장 쉬운 길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길이 더 편한 길입니다. 안전한 길입니다. 잃는 것 같으나 남는 길입니다. 처음 나를 내려놓는다고 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마지못해 따른다고 하면서도 투덜거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마음을 바꾸십시오. 먼저 내려놓으십시오. 먼저 내 생각을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고 주의 종을 통해 보여주시는 그 비전을 따르십시오. 물론 주의 종이라고 하지만 저 역시도 온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여전히 부족함이 있고 여전히 저 역시도 실수가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한 마음으로 주의 뜻을 구하고 한 마음으로 주님이 주신 비전을 따를 때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셔서 큰 역사가 나타나게 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우리를 놀라운 은혜의 자리로 복된 길로 이끄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길을 우리 모두가 함께 주님의 뜻을 구하고 주님이 보여주시는 비전대로 따라가는 귀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내가 전문가라고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보다 더 전문가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보다 더 바른 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또 한 해를 마무리해갑니다. 이는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할 때임을 말해줍니다. 지금까지는 내 뜻대로 계획을 세웠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내 길을 보여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내일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어떤 날보다도 이제부터의 살아가는 삶이 더 복되게 아름다운 날들로 이어질 수 있고 나로 인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우리고 다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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