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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영광과 평화 (눅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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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과 평화 (눅 2:8~14)

그런 노래가 있습니다.
“있을 때 잘 해”

그렇습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잘 해야지 때를 다 놓치고 난 다음 아무리 후회를 해 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때가 있습니다. 공부해야 할 때가 있고 효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학생 때 공부가 하기 싫어서 몸살을 앓아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공부할 때가 다 지나고 난 다음에 보면 아 그때 왜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공부는 나중에라도 다시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효도는 어떻습니까? 아직 부모가 살아계실 때 효도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 아무리 무덤을 잘 쓰면 무엇 하겠으며 시묘살이라고 해서 무덤 곁을 지키고 있어본들 무엇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그래도 건강할 때 아직 그래도 정신이 멀쩡할 때 헌신도 하고 충성도 해야 하는 것이지 그런 기회를 다 지나보내고 난 다음 나이 들어서 그때 내가 무얼 하고 지냈던가 하며 후회해 봐야 이미 때는 늦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은 여전히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아직 정신만 멀쩡하다면 다른 것은 못 해도 그래도 기도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만큼 귀한 사역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생명은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얻어야 하는 것이지 기회가 지나가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아무런 변명도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야말로 정말 하나님 앞에서 주어진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기에 귀한 분들입니다. 하지만 생명을 얻은 것으로만 만족한다면 하나님 앞에 설 때 고개를 들 수 없을 것입니다.

요즘 연말이 되면서 방송사마다 한 해 동안 앞서서 수고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것을 봅니다. 이런 저런 명목을 만들어서 상들을 줍니다. 누구는 돌아가면서 주는 거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상을 받는 사람은 기분이 좋고 그 자리에 빠진 사람은 왠지 섭섭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서게 될 때 남들 다 받는 상을 나 혼자서만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그처럼 서글픈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직 우리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도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죄 가운데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위해 주님이 사람의 몸으로 오신 날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로 모두가 다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습니다. 물론 기득권층만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놓칠까봐 전전긍긍했지만 일반 서민들은 어서 빨리 메시야가 오셔서 이 나라를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고 하며 간절히 주님의 오심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막상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렇게 기다렸던 사람들 중에 과연 몇이나 주님을 영접할 수 있었던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먼저 주님을 맞이했던 사람들은 과연 누군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성탄절 하면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되는 사람들이 동방에서 온 박사들입니다. 그들은 새롭게 나타난 큰 별을 보고 이 세상의 왕이 되실 분이 오셨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먼 길을 찾고 또 찾아 베들레헴까지 이르렀던 것을 봅니다. 물론 그 과정에 잘못 생각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실수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목적하였던 대로 메시야를 만났고 준비한 예물을 드리며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지만 때를 가늠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 때를 놓치지 않는 열심도 있었습니다.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들은 때를 알게 되었을 때 그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빈손으로가 아닌 귀한 예물까지 준비하였다고 했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라고 하는 당시로서는 가장 귀한 예물을 준비하였습니다. 그 값도 대단하지만 그 예물을 준비한 마음이 더 아름답습니다. 아니 먼 길을 찾아온 그 정성이 더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별을 통해 그들의 길을 인도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누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이렇게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아니 깨어 있을 뿐 아니라 깨닫게 되었을 때 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만 간절하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정말 간절하다면 주저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동방박사들처럼 값진 것이라야만 주님이 받으시던가요? 아니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기쁘게 받으셨던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셨던 주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이 담긴 예물을 드리고 우리의 마음을 다 담아 헌신하게 될 때 그 예물을 그리고 그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아울러 그 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동방의 박사들은 그렇다고 치고 그럼 들판의 목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시로서는 가장 비천한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다 편안하게 쉬는 그런 시간까지도 쉬지 못하고 양떼를 지켜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따뜻한 방에서 자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땅이 우리네보다는 따뜻하다고 해도 그래도 밤에는 무척 춥습니다. 더군다나 들판은 더 춥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 이렇듯 밖에서 밤을 새웁니다. 그 마음이 오죽 하겠습니까? 한데 바로 그런 목자들을 주님의 천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메시야의 탄생을 알려줍니다. 그때 목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그들 자신의 일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양떼를 떠날 수 없습니다. 아니 떠나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서둘러 탄생하신 메시야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에게 그 귀한 소식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그들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양떼를 다 잃게 될 지도 모르고 그로 인해서 그나마 직장도 잃게 될 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천사가 그들에게 “두려워 마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다.”라고 했을 때 그리고 그 천사와 함께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말씀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를 만나 경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 앞에는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남녀노소가 없습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일에 누구 하나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경배 드리는 그 자리에 빠져도 좋은 사람 또한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결정적일 때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드릴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군가 하면 바로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선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부는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학생은 공부하는 일에 직장인이라면 직장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함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업에 온 힘을 다 쏟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정말 부끄러움이 없도록 충성을 다하고 있는가 하번 반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저 내 기분에 따라 모든 상황에 따라 왔다 갔다 하지는 않는지요? 하지만 이제는 주님의 말씀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한 영혼을 위해 깨어 있어야 하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단지 교회에 와서 열심인 그것만이 주님을 위해 깨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의 모습과 집에서의 모습 그리고 직장에서의 모습이 똑같아야 합니다.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어떻게 날마다 똑같을 수야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로 내가 있는 자리가 동방의 박사들과 같은 자리이던 아니면 목자들처럼 들판에 내던져져 있는 것과 같은 자리이든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자기 자리를 지킬 때 나 자신도 그리고 사회도 나라도 함께 발전하는 것이요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기회를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충성된 사람들에게 열어주시는 기회가 무엇입니까?
천사들은 노래합니다.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사람들 사이에는 평화가 넘치는 삶, 어떻게 생각해 보면 막연한 것처럼도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들 가운데는 언제나 평안함이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평안함이 무엇입니까?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뱃가죽이 등에 가서 붙었는데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근심 걱정으로 날을 지새우는 자리에 평안이 있겠습니까? 밤새 아구구 아구구 하는데 평안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네가 정말 좋다 네가 정말 최고다 하실 정도로 신나는 삶, 풍족한 삶, 아무런 염려할 것도 근심될 것도 없는 삶을 주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주님은 오셨고 그러한 삶을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허락하셨던 주님이십니다. 배고픈 자들을 위해서 비록 보잘 것 없는 보리떡과 물고기지만 그것으로라도 배부르게 먹고 남을 정도로 먹여주셨고 잔치 자리에서는 흥이 깨지지 않도록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고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과부에게는 그 아들을 다시 살리심으로 춤이 덩실덩실 나오도록 만들어 주셨으며 너무도 아파서 심지어는 가족들에게조차 버림받았던 그런 병자들을 다 고쳐주셨고 귀신들려 사람답게 살지 못하던 사람들에게는 귀신을 몰아내주심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던 주님이십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바로 그곳에 참된 평안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던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이것보다 더 큰 평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며 섬길 수 있는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으며 거기에 더해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도록 허락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평안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것을 다 가졌다고 해도 영원한 생명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영원한 생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삶이 한없이 불행하다면 그 영원한 생명의 의미조차도 탄식으로밖에는 더 무엇을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또한 소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지 주님만의 바람이겠습니까? 아니 우리 모두의 바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도 원하시고 우리도 원하시는 이것을 우리가 누려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바로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가운데 평안이 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도 다투고 마음 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투고 난 다음에 우리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영 불편합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고집부리고 못 본척 외면하기도 해 보지만 그럴 때 그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결국 견딜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하면서 다시 화해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데 그것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용기가 어디서 나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참된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 다시 힘을 낼 수 있는 용기 다시 잘해 보자고 서로 격려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바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결코 그 어떤 일에도 비관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평안을 주시고자 하시는데 그래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리고 들판에서 추위에 떨면서도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목자들에게까지 그 기쁨을 알려주시는데 하물며 우리들에게 어떤 사랑으로 함께 하실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흠을 보고 문제를 보고 속상해 하기 시작한다면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너희 가운데 아무 죄도 없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 돌을 들어 던질 수 있었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 가운데도 나는 아무 죄도 없다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런 부족함도 없이 모든 면에서 완전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습니까? 하지만 주님이 있기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평안한 수 있고 연약함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없는 가운데서도 찬양이 마음에 흘러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이제 이 사랑을 우리들의 이웃들에게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목자를 찾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버려진 사람 외면된 사람 소외 계층들 누구 하나 관심을 갖지 않는 그런 사람까지도 기쁨으로 찾아나서고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 이미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서로를 지켜줄 수 있을 때 그 때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우리들의 마음도 기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온 다음 목자들의 모습이 바로 그랬습니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날마다 신이 넘치는 그런 삶이 되도록 만들어 주시려고 주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주님을 우리가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삶이 이제는 모든 찌든 때를 벗고 신나게 사랑하고 그 자리가 어디든 신나게 일하고 학생들은 신나게 공부하고 또 놀 때는 신나게 놀고 교회 와서는 또 신나게 찬양하고 예배하고 이런 날들이 날마다 이어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날마다 오늘만 같아라. 그래요 날마다 크리스마스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말에 외상이면 소도 잡아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요 삼수갑산을 갈망정 오늘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기는 자가 있으면 지는 자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함께 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승패를 가려야 할 그런 경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기는 자가 있고 지는 자가 있습니다. 마라톤 경기가 종종 열립니다. 각 신문사들이 주체하는 각종 마라톤 경기들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 화성시에도 효 마라톤 대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1등을 할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1등만 목표를 하고 뛴다면 1명 외에는 다 실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뛰는 것 자체로 아니 뛰지도 못하고 비록 걸을망정 그래도 참가하는 그것으로 즐기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기록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몇 등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기뻐합니다.

아니온 가족이 다 함께 참석해서 그 자리를 가족 친목의 자리로 삼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마음 자세로 살아간다면 우리가 살아 있는 그것만으로도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기다가 우리는 예수님을 압니다. 그리스도를 압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좀 여유를 가져도 좋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비록 머리 둘 곳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것 때문에 염려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요. 좀 적게 먹으면 어떻고 부실하게 먹으면 어떻습니까? 누구는 일부러라도 굶지를 않습니까? 아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전신 성형을 한다고도 하지를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조금 더 이쁘게 보인다고 한들 그게 뭐 그리 대단합니까? 누가 그런 얘기를 합디다. 분명 생명책에 그 이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옥으로 떨어졌대나요? 그래서 항의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가지고 있는 자료와 네 모습이 너무도 달라서 알아볼 수 없다고요. 니가 내가 가진 자료의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하는 걸 증명해 보라고 했다나요?

또한 단칸 방이면 어떻고 고대광실이면 어떻습니까? 한 몸 잠자는데 문제없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도 잠을 이루지 못해서 고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아하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기도할 시간이 이렇게 만들어주시는구나 생각하시고 그 시간에 기도하세요. 염려거리가 있어요? 아하 하나님이 내가 기도조차 하지 않고 살아가니까 이렇게 해서라도 기도할 수 있게 만드시는 구나 그렇게 생각하시고 기도하세요. 그리고 마음으로 찬양해 보세요. 아마 그렇게 기도하다 그렇게 찬양하다 잠들게 될 때 그 잠이 꿀과 같이 달 것입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 그리고 저 들 밖의 목자들 그들의 신분은 하늘과 당처럼 차이가 있지만 주님을 만나 뵈었다고 하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없는 가운데 주님을 만났기에 그들의 감격은 더 컸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 은혜가 내게 족하다 그 은혜가 족하다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 귀한 은혜로운 삶으로 가득한 나날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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