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탄절] 권능의 주 예수 그리스도 (요 4:46-54)

  • 잡초 잡초
  • 437
  • 0

첨부 1


권능의 주 예수 그리스도 (요 4:46-54)

  오늘 본문 46절 상반절에서는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 보면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두 번째 이적기사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서 또 무슨 일을 행하신 것입니까?

  가나에서 80리쯤 떨어진 가버나움으로부터 왕의 신하 한 사람이 가나에 계시는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왕의 신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왕은 세례 요한을 참수시켜 죽게 한 자로서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를 가리킵니다. 분봉왕이란 엄격하게 말하면 왕이 아니고 왕 밑에 있는 권력자로서 일정한 지역의 통치를 위임받은 자이지만 마치 소왕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그 헤롯 안디바의 신하 중 하나인 사람이 가나에 예수님이 와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온 것입니다.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는 걸어서 하룻길 거리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온 것은 그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아들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청하기를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본문 47절) 했습니다.

그런데 그 청에 대한 예수님의 첫 대답은 다소 쌀쌀맞고 엉뚱하게 들립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본문 48절). 죽어가는 아이를 살려달라는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훗날 부활하신 주님을 아직 뵙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던 제자 도마에게 나타나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하셨던 것처럼 표적 보기를 좋아하고 표적을 보지 않고는 잘 믿지를 않는 백성에게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더 복된 것임을 가르치시고 또 그렇게 만드시기 위한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아들을 살려달라는 청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이 기회에 다시 놀라운 권능을 행하심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에 대한 더 확실한 믿음을 갖게 하시겠다는 의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좋은 것이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니 이번에도 내가 이적기사를 행하여 너희로 하여금 나를 확실하게 믿게 해주고 그래서 앞으로는 보지 않고도 내 말을 믿는 자들이 되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아들을 낫게 해주시겠다는 즉답을 받지 못한 그 신하는 다시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본문 49절).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본문 50절).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자 두 말 하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버나움을 향해 내려가는 길에서 그와 반대쪽으로 오고 있던 그의 종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아이가 병이 낫고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주인에게 빨리 알리고자 가나를 향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그의 아들이 낫기 시작한 때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본문 52절) 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그때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로 인해서 그뿐 아니라 그의 온 집안이 다 믿게 되었습니다(본문 54절).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들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우선 병이 나아 살게 된 아이의 아버지에게서 바른 믿음의 발전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병을 고치는 권능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에게 아들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하려고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는 말씀을 듣고 가버나움으로 돌아가다가 그의 종들을 만났으며 그들로부터 “어제” 오후 한 시에 아들의 열기가 떨어졌다는 말을 들은 것 보면 그가 가버나움까지 가는 데 하루 이상 걸렸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가나로 올 때도 하루 종일 걸어서 왔음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로 가면 아들을 살릴 수 있다는 그의 믿음과 간절함을 엿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먼저 들어야 했던 말씀이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인 것을 보면 그가 아직은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두 번째 들은 예수님의 말씀 즉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신 말씀에 아무런 의문이나 이의를 달지 않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했을 때 그는 그 즉시 다 죽게 되었던 그의 아들의 병이 낫는 큰 은혜를 받았고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만 아니라 그의 온 집안이 다 믿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이며 그가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을 통해 의도하신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행하신 첫 번째 표적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두 번째 표적은 병을 고치시고 다 죽게 된 사람을 살리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람들을 단지 물질적 곤경으로부터 헤어나게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병과 죽음으로부터 살려주시는 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모든 생명의 주인이심을 밝히신 일입니다. 단지 혼인잔치의 흥을 살려주시는 이가 아니라 하늘나라잔치에서의 영원한 기쁨을 살게 하시는 권능의 주이심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하는 왕의 신하의 간구를 따라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말씀으로만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며 그를 아들에게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내려가는 길이 멀고 귀찮아서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내려가다 보면 하루가 늦어질 것이고 그러다가는 아이가 죽을지 모르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도 병을 고치시고 생명을 살리시는 이심을 믿게 하시기 위한 뜻이었을 것입니다. 보지 않아도 오직 당신의 말씀만 듣고도 믿고 무조건 순종함으로써 놀라운 은혜를 누릴 수 있음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한 뜻이었을 것입니다. 참 믿음이 무엇인지를 바로 가르치시기 위한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은 이루어졌습니다. 병으로 다 죽게 되었던 아이는 그의 아비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곧 열기가 떨어져 낫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셔서 앓는 아이를 붙드시고 안수하시며 귀신에게 호통을 쳐 쫓아내시는 등의 행동 없이도 생명을 살리시는 주님이심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권능의 주이심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오직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여실히 증명하신 것입니다.

  이 치유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권능이 공간을 초월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가나에서였고 병이 낫고 죽어가던 아이가 살아나는 일이 일어난 것은 80리 떨어진 가버나움에서였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권능은 공간만 초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도 초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000년 전에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미치는 영원하고 우주적인 구원의 사건인 것입니다. 그는 영원히 온 인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온 세상에 유일하신 권능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이 권능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모든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 때문에 이 성탄절이 기쁘고 감격스럽고 감사가 넘치는 계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기자가 굳이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라”고 힘주어 쓰며 예수님의 사역의 한 단계를 전하는 기록을 마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거의 모든 사람이 “가나”라는 마을 이름을 들을 때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 되게 하신 사건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가나는 결코 그 사건만으로 기억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강조하려는 것이 저자의 의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권능과 사역을 생각하는 우리의 신앙적 안목이 단지 물이 포도주 되는 사건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단지 우리에게 물질적 곤경의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에서의 기쁨을 되찾게 해주시는 데 있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하늘나라에서의 잔치의 영원한 기쁨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생명과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기쁨을 얻게 하는 참 믿음을 갖게 하시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찾고 교회에 나아오는 사람들 가운데 포도주가 떨어져서 나아오고 병 낫기 위해서 나아오는 사람이 적지 않음을 압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닙니다. 그런 곤경과 고통 가운데서 주님을 찾고 교회를 찾는 것은 잘 하는 일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그를 찾아 나아온 모든 이에게 포도주의 문제도 해결해주실 것이고 잔치하는 삶의 기쁨도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할 것은, 우리가 교회에서 찾아야 할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은 그것 이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을 찾고 생명의 참 주인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에 대한 참 믿음을 갖게 되고 그 믿음과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더 큰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아 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성탄절이 찾아왔습니다. 성탄절의 즐거움의 하나가 선물을 주고받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탄절의 기쁨이 그저 포도주를 확보하고 잔치의 즐거움을 연장하는 일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 안에서 우리가 죽음에서 해방되어 살게 되었다는 복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새롭게 다짐하는 성탄절이 되고 이를 실천하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으로 우리의 온 가족과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이 주께로 나아오고 모두가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의 뜻이며 주님께서 언제나 가장 기뻐하실 일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만 기뻐하는 성탄절이 아니라 먼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성탄절이 되게 합시다. (이수영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