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탄절]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 (눅 1:26-38)

  • 잡초 잡초
  • 474
  • 0

첨부 1


예수를 잉태한 마리 (눅 1:26-38)

임신을 하지 못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신을 하는 경우가 성경에 자주 나옵니다. 사라는 90세에 이삭을 낳게 되었고, 결혼 한지 20년 동안 자식이 없던 리브가는 이삭의 기도로 에서와 야곱을 낳았고, 한나도 결혼 한지 17년 만에 기도의 응답으로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자식을 낳지 못하던 사람들이 기도의 응답으로 자식을 낳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식을 낳지 못하던 사람이 자식을 갖는 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적보다 더 큰 기적, 더 위대한 기적이 본문에 나옵니다. 우리가 기적이라고 말했던 앞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모두가 남자와 여자의 만남을 통해서 자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는 사내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성령으로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성자 예수께서 마리아의 몸에 찾아오시고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그 이유는 마리아가 잉태한 예수님이 굉장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31절에 보면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마리아가 낳을 아기의 이름이 예수입니다. 마 1:21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의 뜻을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합니다. 즉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가 마리아의 몸에 잉태 되신 것입니다. 32절에 보면 그분은 큰 자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는 다윗 왕의 위를 받은 자 즉 왕권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33절에 보면 그 왕권은 영원하며 그 나라는 무궁합니다. 이런 위대하신 분이 마리의 몸에 잉태 되신 것은 마리아에게는 영광이며 축복이며 행복입니다.

사실 마리아에게 주어진 영광과 축복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요 1:12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마리아의 몸에 예수님께서 잉태하신 것처럼 믿는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오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신 것처럼 믿는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고, 그리스도의 편지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를 통해서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편지인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뜻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인 우리들을 통해서 주님의 향기를 맡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가브리엘 천사와 마리아의 만남인데 이 내용을 통해서 마리아가 어떤 사람이었기에 예수님을 잉태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고, 성탄절을 앞둔 이 시점에서 성도인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자로서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마리아처럼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28절에 보면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30절에서는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고 말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녀가 은혜를 입지 못했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탄생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은혜라고 하는 이유는 비천한 인간인 마리아에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잉태 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인간적인 조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마리아가 선하기 때문이거나 능력이 남 다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리아의 조건 때문에 주님이 그녀에게 잉태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느끼든지 느끼지 못하든지 상관없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우리에게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진 것입니다. 극적인 체험을 통해서건 극적인 체험이 없든지 상관없이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다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모태신앙인으로 태어나서 어릴 적부터 교회 안에 있어서 특별한 체험이 없어도 그가 예수를 믿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간혹 희한한 방법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재미있는 하나님의 역사로 예수를 믿은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농촌 마을에 무식하고 난폭한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의 신앙생활이 아주 못마땅했습니다. 농부는 부흥회에 참석하느라 밤늦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찾아 교회에 들어섰습니다. 마침 아내는 예배당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분노가 머리 끝 까지 치민 농부는 여인의 뒷 머리채를 감아쥐고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무지막지하게 여인을 두들겨 팼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여인은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면장의 부인이었습니다. 농부는 면장의 부인에게 크게 사죄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때 면장 부인이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예수를 믿겠다고 약속하면 용서할 것입니다.” 농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열심히 교회에 출석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핍박자가 교회를 나오게 되었고 결국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교회에 오셔서 주님을 섬기는 것도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예수님을 잉태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부모님이 믿는 분들이었기에 믿음을 갖게 되었든, 부인이 믿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믿게 되었든 이 자리에 나와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은혜 받았다고 합니까? 영적 체험을 했을 때, 예배를 드리거나 찬송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말씀을 들을 때 큰 감동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깨달음이 있을 때 혹은 기도가 응답 되었을 때 등의 특별한 사건이 있을 때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은혜를 받는 것도 꼭 필요합니다. 이는 마치 기계에 기름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자동차에 기름을 공급하는 것과 같습니다. 펌프질을 하는데 한 바가지의 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2. 마리아처럼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35절에 보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리니”라고 말합니다. 마리아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도 예수님을  잉태한 것은 성령의 역사로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능력이 임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은 성령의 역사로 된 것입니다. 고전 12:3에 보면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전적인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이 평범한 여인인 마리아에게 임하시니 그에게 예수님이 잉태되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사용된 것처럼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은 우리에게도 자신의 생명과 능력을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시면 크게 네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첫째는 거듭나는 역사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부어지고 그 생명으로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고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믿어지는 것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격의 변화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오셔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그분의 통제를 받게 되며 주님이 그를 통해서 나타나시게 되므로 그의 인격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자동차는 누가 운전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난폭한 운전자가 운전하면 그 자동차는 난폭한 자동차가 되는 것입니다. 침착하고 안정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 운전을 하게 되면 그 자동차는 안전한 자동차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사람은 좋은 인격으로 변화됩니다.

셋째는 능력의 변화입니다.
성령님은 창조의 영입니다. 창조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시면 그분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을 할 때 어떤 연장을 갖느냐에 따라서 일하는 능력이 달라집니다. 땅을 파도 호미로 파는 사람과 삽으로 파는 사람 그리고 포클레인으로 파는 사람의 능력은 다른 것입니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일하신다면 놀라운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는 가치의 변화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즉 하나님의 집이 된다는 말입니다. 인터넷에서 박정희 대통령 생가를 보니 그 집이 특별하거나 굉장히 화려한 집이 아니더군요. 보통 집입니다. 우물이 있고, 방 몇 개 정도가 다입니다. 그런데 그 집이 유명한 이유는 그곳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집의 가치는 집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곳에 살았던 박정희 대통령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이미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므로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가치를 상실한 사람 속에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거처를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 사람이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3. 마리아처럼 말씀에 바른 반응을 해야 합니다(37,38절).

천사가 수태고지를 하고 난 후에 37절에서 마리아에게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마리아가 그 말을 듣고 38절에서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말씀에 대해서 올바른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살아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는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말씀은 복이 될 수도 있고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대한 바른 반응이 중요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았으며 그 결과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반대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말씀에 귀를 막았고 돌을 들어 스데반을 쳤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영생과 상관없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 마리아는 말씀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살펴봅시다.

첫째, 아멘으로 반응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가브리엘의 수태고지는 이해가 안 되는 내용입니다. 자신은 남자를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잉태된다는 말입니까?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마리아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아멘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해 차원을 넘어선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머리로 어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어린아이가 이해를 하든 못하든 어른들의 뜻은 어린아이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옳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이 이해를 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마치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말씀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아멘으로 받아야 합니다.

둘째, 자신에게 적용했습니다.
내가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말씀하십니다. 내게 적용하라고 주시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전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통의 경우는 내게 적용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내게’라고 했습니다. ‘엘리사벳’에게 라고 말하거나 다른 누구에게라고 말하지 않고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들도 마리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적용해야 합니다. ‘회개하라’고 하면 ‘내가 회개해야지!, 기도하라고 하면 ‘내가 기도해야지!, 충성하라고 하면 ‘내가 충성해야지!’라고 자신에게 적용하십시오.

셋째, 순종했습니다.
처녀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약혼자 요셉이 안다면 파혼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약혼한 여인이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서 임신을 하면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신 22:23-4). 아무리 메시아라지만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게 된다는 것은 마리아에게는 생명을 내건 모험이자 위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정한 여인이라고 멸시를 받고 돌팔매질을 당해 죽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 맡긴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그분 앞에 나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자신의 목숨까지 드려가며 그분을 섬겼던 것입니다.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올리버 크롬웰이 나라개혁을 위해 힘쓰다가 국왕의 미움을 받아 사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사형집행은 저녁때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집행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났는데도 종이 울리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는 종을 쳐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종탑에 올라가 보니 한 여인이 종추에 매달려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크롬웰의 약혼녀였습니다. 크롬웰의 약혼녀는 자기를 사랑해준 크롬웰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다가 “네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마음의 음성을 듣고 그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기로 한 것입니다. 한 여인의 뜨거운 사랑과 희생이 국왕에게 알려져 국왕이 감동되어 크롬웰은 생명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기에 자신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그분의 말씀에 목숨까지 걸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주님을 사랑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4. 마리아처럼 겸손해야 합니다(38절).

카톨릭 교회에서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43절에 보면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자신을 찾아온 마리아 앞에서 몇 마디 예언의 말씀을 합니다. 그 내용에 보면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위대한 신앙인으로서 존경을 받을 수는 있어도 숭배를 받는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참된 겸손은 자신을 알고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알고 자신을 알았던 겸손한 여인입니다. 38절에 보면 마리아가 ‘주의 여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주님은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종은 마리아 자신을 말합니다. 비록 마리아가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이지만 그녀는 ‘주의 여종’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우리도 겸손의 자리로 내려가야 할 것입니다.

한국기독교 역사에 보면 정말 겸손했던 분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일화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에 가면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ㄱ자 교회로 1997년 7월 18일에 전라북도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번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왔던 조세형씨가 이 교회 장로입니다. 이 교회는 조세형 장로의 할아버지 조덕삼씨의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집에는 이자익이라는 머슴이 있었습니다. 이자익은 경남 남해에서 어렵게 살았는데 부모를 여의고 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 곡창지대 김제까지 가서 조덕삼씨의 머슴이 된 것입니다. 그의 성실함이 주인의 눈에 들어 특별한 사랑을 받게 되었고 그 집 아들 조영호가 천자문과 한글을 배울 때 어깨너머로 혹은 창 밖에서 보고 들어서 한문과 한글을 터득했습니다. 주인 조덕삼과 머슴 이자익이 1902년 가을에 함께 세례를 받고 얼마 후에 함께 집사직도 받았습니다. 1909년에는 그 교회 최초의 장로 1인을 투표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틀림없이 교회 설립자인 조덕삼 부자가 장로에 당선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집사의 집에서 머슴 일을 하는 이자익 집사가 장로로 뽑힌 것입니다. 이 일은 천민과 양민 구별이 극심했던 때에 교회에서는 그러한 구별이 없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조덕삼도 비록 자기 집 머슴이지만 이자익 집사가 장로로 피택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고 자신의 집사의 직분으로 머슴 이 장로를 섬겼습니다. 이자익은 장로로 임직 받은 후에도 그 믿음이 신실해서 선교사들과 교인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 조 집사와 최의덕 선교사는 이 장로의 믿음을 귀하게 여겨서 학비를 후원하여 1910년에 평양 신학교에 입학시켰는데 5년 만에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때도 조덕삼씨가 앞장서서 이자익 목사를 모 교회인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했습니다. 이 목사님의 신실한 목회와 덕스러운 생활은 널리 알려져서 1924년, 1947년, 1948년에 세 차례에 걸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에 피선되었습니다. 비천한 신분의 사람이 하나님의 종으로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배후에는 믿음의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훌륭한 후원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사학자 김수진 씨는 "머슴 이자익이 목회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실한 신앙에다 훌륭한 인격자였던 조덕삼씨의 사랑과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조덕삼씨도 그 후에 장로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 조영호씨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의 손자 조세형(국회의원)씨도 금산교회 장로로 세움을 받아 3대를 이어 한 교회를 섬기고 있으니 하나님 앞에 선택받은 가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쓰십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왕으로 선택을 받을 때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 후 그는 조금씩 교만해지기 시작을 했고 결국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울을 버리고 겸손한 다윗을 다시 선택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셨습니다.

로키산맥 해발 3천미터 높이에 수목 한계선인 지대가 있답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비바람으로 인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서 있습니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대청봉에 올라가면 나무들이 곧게 성장하지 못하고 누워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진 비바람 때문입니다. 이 나무들은 열악한 조건들과 싸우며 생존을 위해 무서운 인내를 발휘하며 지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共鳴/맑고 깨끗한 소리)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 꿇고 있는 나무로 만든 것입니다.

마리아는 수태고지를 받은 후에 ‘내가 잘 났으니 특별한 선택을 받은 것이다’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주의 여종’에게 허락하신 일을 겸손히 받아드렸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성탄절을 앞두고 주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초림의 주님을 잉태했던 마리아처럼
1. 은혜 속에서 삽시다.
2. 성령으로 충만합시다.
3. 말씀에 대한 바른 반응을 보입시다. - 아멘으로, 자신에게 적용하시고, 순종
4. 겸손합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