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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함께 하시는 주 (마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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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시는 주 (마 1:23)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빅토리아 여왕이 세운 양로원에 나이 많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여왕이 당신을 종종 방문을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 나는 몇 번 여왕의 심방을 받았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왕중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심방한 일이 있습니까?"하고 또 한 번 물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난 심방을 받지 않습니다. 그분과 항상 같이 삽니다. 그분이 여기서 나와 같이 삽니다."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의(사 7:14)의 70인역(LXX)에 따른 인용입니다.
이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아랍의 동맹군이 침략해 올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때 여호와를 떠나 이방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하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선지자 이사야가 책망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징조'를 주실 것이라 예언하는 장면입니다. 임마누엘의 탄생은 '미래에의 확증'이라 합니다(Motyer). 예언된 임마누엘(7:14)은 결국 유다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8:8), 그의 모든 원수들의 계획을 좌절시키며(8:10),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빛이 되시기 위해(9:2) 이방의 갈릴리(9:1)에 나타나십니다.

이 임마누엘은 한 아기요 한 아들이며, 그 이름은"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事)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9:6)으로서 다윗의 위(位)에 앉아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륵 공평(impartiality)과 정의(justice)로 왕국을 보존하십니다(9:7).

임마누엘은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보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분의 위격(位格)과그분의 사역의 한 단면을 암시한 말입니다(사 7:14).

'임마누엘'(laeWnM;[i !Emmanouhvl Emmanuel)은 '함께'(with)라는 뜻의 히브리어 '임'(M;[)과, '우리와'(us)라는 뜻의 '마누'(eWnM;), '하나님'(God)이란 뜻의 '엘'(la)이 결합된 형태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메시야와 예수가 되실 뿐 아니라 그분이 곧 죄악으로 인해 절망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God with us) 분이심을 강조한 이름입니다.

실로 죄로 인해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인간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실(요일 4:10) 중보자이신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다가(요1:14)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마28:20) 영원한 하나님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이

  양에게는 이리가 함께 있는 것이 유익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선한 무리 속에 사악한 자들이 자리를 같이함이 오히려 해가 됨은 자명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미혹하는 자요, 우리를 넘어뜨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철없는 어린아이에게 부모가 함께 있는 것은 행복입니다. 유약한 자에게 그를 보살피고 사랑으로 돌보는 이가 같이 있다는 것보다 행복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입니다.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4: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사 44:24)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조성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어떤 물건이든 모든 면에서 그것을 만든 사람보다 더 잘 이해하거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그 누가 하나님보다 우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가 왜 거기에 매달려야 합니까? 소리 없는 그 아픔의 외침은 천둥소리 보다 더 크게 우리에게 들려지지 않습니까? '내가 너를 사랑했노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십니다.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그는 우리가 고아와 같이 외롭고 고통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하시 때문에 성령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우리를 돌보기 위함이요, 모든 원수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함이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다.

(사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 사탄과 죄의 종으로 전락한 우리를 그분이 찾으시고 화목의 길을 주셨습니다.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우리와 하나님 사이는 단절되었습니다. 죄로 멍든 가슴, 피 묻은 손으로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겠습니까? 때문에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친히 작정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근본적으로 치료하고 사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모든 삶에 그의 도우심이 보장되었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능히 사탄과 싸울 만한 능력이나 지혜가 없습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슬픔이나 환난을 대적할 인내나 용기도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죄악에 넘어지고 실패로 좌절하고 있지 않습니까? 갖가지 슬픔과 고통으로 인해 삶을 포기한 이들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넘어뜨리고 삼키려는 원수가 세상의 임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탄의 궤계를 부수고 그의 머리를 발로 밟으신 이가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같은 성정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고난을 궤휼하신 이가 친히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과 질고, 모든 슬픔과 근심을 그가 친히 담당하시고 그의 평안과 그의 기쁨, 그의 승리로 우리의 삶을 대신케 하시려고 그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함께 하심은 결코 부담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기쁨을 아십니까? 또는 같이 있기가 거북하고 민망한 사람과 함께 있는 부담을 이해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일평생 가까이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세리도, 문둥병자도, 아니 모든 죄인이 부담 없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예수입니다. 흠 있고, 불완전한 인간! 심히 부패하여 치료가 불가능한 우리 인간의 다정한 친구,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는 분, 그분이 예수입니다.

  결코 다시는 헤어짐이 없습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에덴동산의 헤어짐은 그분의 마음을 심히도 아프게 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롬 8:31-39)이 점에 대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주신 분께서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은혜로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 의롭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죄가 있다고 판단하겠습니까?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아니면 어려움입니까? 핍박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아니면 칼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우리는 하루 종일 주님을 위해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하늘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어떤 힘이나, 가장 높은 것이나 깊은 것이나, 그 밖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쉬운성경)

  아들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평범한 인간으로서 커다란 울음과 함께 탄생하셨으며, 보통 어린아이들과 같이 엄마의 젖과 따스한 보살핌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경탄하고 찬미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으로 오셨기에 우리 인류의 죄를 대표하여 속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사람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타락하였고 그 결과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죽을 죄인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이 있는 피흘림이 필요하였습니다.

(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첫 언약에서는 희생 제물의 피를 통해서 죄 사함을 얻고 생명을 소유할 수 있었으며, 새 언약에서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온전한 사함과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피흘림은 죄사함을 얻기 위한 절대적(絶對的)인 조건입니다.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갈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에서 온 것으로 '여호수아'라는 말은 '하나님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뜻에 어울리게 구약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했던 영도자 모세조차도 이룩하지 못했던 가나안 입성을 이룩하였으며 가나안을 점령하였던 인물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능력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지니시되 여호수아와 같은 무력의 능력을 지니신 분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생 동안 여호수아와 같은 세상적인 무력을 매우 싫어하셨으며, 철저히 배격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 그런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원하기만 하면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해하셨던 힘에 대한 바른 개념과 사용하셨던 힘은 악을 선으로 이기는 힘이요 악에 대하여 참고 인내하는 힘이었습니다. 역사의 종국에는 반드시 이 힘이 승리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가장 근본적이고도 큰 목적은 바로 인류의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도 인류의 죄를 먼저 해결하셔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아담의 범죄 이후 영원한 생명과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버리고 떠났던 인류들이 이제는 사망의 통치를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권 안으로 돌아오도록 길을 만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우리가 감격하고 기뻐하고 찬미할 수 있는 것은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이 십자가의 때에 우리 죄를 지시고 희생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 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의 기업을 누리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별도 천군 천사와 함께 기뻐하였고, 들에서 양 치던 목자와 동방박사도 주를 찬양하고 즐겨 예물을 드렸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사실보다 더 중대하고 귀한 일은 없습니다.

2차 대전 때에는 많은 전쟁의 신화들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어느 항구에  영국군 수십만명이 후퇴를 할때  그 부근의 독일군들이 집결해 있는 항구에는 대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거기서 얼마 안되는 부근 이었습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잔잔해서 수십만 명의 영국군이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답니다. 훗날 기록을 보면  영국군들은 주일에 모여서  하나님이여 독일군에게서 우리들을 지켜 본국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전도자 요한 웨슬레의  가장 최선의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 이 시간이 최선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어떤 상황이든 우리에게는 최선의 시간이고 최대의 행복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했던 것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이상으로  더 확실하게 우리의 식탁에 같이 앉아 주시고 우리의 침상에 같이 누워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보다 큰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죄에 머물기를 원하고 세상 것에 분주하여 그리스도의 청을 받아들일 준비가 없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심이 오히려 심판의 소리가 됩니다.

이리에게 목자가 반가울 리 없고, 어둠을 사랑하는 이에게 빛이 어찌 기쁨이 되겠습니까?
임마누엘의 소식이 기쁨이 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나팔 소리가 더디 울리기를 바라고 있다면 지금 잘못된 자리에 있음을 깨닫고 회개하여 돌이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 찬양이 되고 기쁨이 되며 감사하는 심령이 되어 영광 돌리는 자리에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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