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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구유를 준비하셨습니까?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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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를 준비하셨습니까? (눅 2:1-7)

성탄주일 아침에 주 앞에 나와 경배하는 여러분과 가정 위에 성탄의 축복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영어로는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인사하면 되고, 중국어로는 "셩딴콰이러(聖誕快樂)" 라고 한답니다. 일본에서는 "메리 구리수마수"라고 인사한다고 합니다. 필리핀의 따갈어로는 "말리가양 빠스코"이고 요즘 시골에 베트남 분들이 많이 사시는데 그들은 "청 멍 지앙 신"이라 인사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이렇게 하면 되나요? 아무튼 여러분의 성탄의 기쁜 마음을 담아서 서로 인사하십시오.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시조 왕이나 종교의 창시자 등 지체가 높은 인물의 탄생 이야기는 신비롭고 화려합니다. 사실보다 부풀려 포장하고 신격화 한 모두가 허구가 아닙니까? 지난번에 방영한 고구려 건국을 이끈 광개토대왕의 일대기를 그린 '태왕사신기'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에 비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초라할 정도로 단순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남들이 볼때는 화려한 것도, 신비한 것도 없지만, 그 탄생에는 하나님의 오묘한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뇌성마비 시인 송명희가 쓴 "그 이름"이라는 시를 아십니까?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그 이름 속에 있는 사랑을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 내게 있는 귀한 비밀이라 내 마음에 숨겨진 기쁨 예수 오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뇌성마비에 걸려 몸을 쓰지 못하는 한 소녀에게도 예수님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노래한 그 노래들은 지난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수없이 많은 노래들의 사연들을 보면 꼭 예수 이름 때문에 복 받고 장수하고 잘되고 돈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오히려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역경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름과 고통의 한 복판에서 이 이름하나 때문에 위로 받고 용기를 얻었고 힘을 얻었던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떤 분은 병상에서 그 예수를 그 이름을 부르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형수로 죽어가면서 뒤늦게나마 그 이름 예수를 믿은 것에 너무 감격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사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 이름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은 건축자가 내버린 돌맹이처럼 하찮게 내버렸지만 어떤 사람의 가슴속에는 그 것이 어느 보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고 귀한 보석으로 품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도대체 그 이름이 무엇이 길래 역사 속에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불렀겠습니까? 도대체 그 이름, 하나를 위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명예와 재산은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다 내던져 버릴 수 있습니까? 그 이름 속에 도대체 무슨 비밀이 있는 것입니까?

오늘 함께 읽은 본문 6절, 7절을 보면 '거기 있을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였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호적 하러 베들레헴 고향으로 돌아온 요셉과 마리아는 '빈 방 있습니까? 빈 방 있습니까?' 하고 이곳 저곳 찾아다니면서 빈방을 애타게 찾았지만,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아내의 배가 불렀고 언제 해산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던 요셉은 얼마나 빈방이 있기를 원했겠습니까? 그러나 누구하나 그들을 위해 방하나를 마련해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찬이슬을 맞지 않기 위해서 찾아간 곳이 마구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산기가 느껴지면서 애를 낳아야 되는 긴박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짐승의 먹이를 담아주던 구유를 털어 가지고 적당히 깨끗이 한 다음, 거기에다가 몸에 걸치고 온 헌 천을 깔고 그 다음에 그 구유에다가 아기를 낳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부랴부랴 옆에 있는 집으로 달려가 물을 끓여 양동이에 담아 와서 아내를 수발하고 그 아이를 씻겼을 것입니다. 자,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태어나는 장면이었고, 장소였습니다.

보세요. 세상이 버린 곳,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한 마구간에 아기로 오신 예수, 바로 그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입니다. 천사는 이렇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마구간에 태어나신 것을 일컬어서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소식'이라고 말씀했습니다. 10절을 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온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다 기뻐할 너무나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들이 기다리던 구원자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만삭의 몸으로 빈방 하나를 구하기 위해 외치며 다니는 그 처절한 외침을 외면한 우리 인간이 도대체 누구길래 저 구유에까지 당신의 자리를 펴서 이 땅에 오셔야만 했습니까? 여기 시골에서 자란 분들은 마구간이 어떤 곳인지 잘 알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 한국의 소를 키우는 마구간과 유대 나라의 양들을 키우는 마구간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정말 냄새는 고약합니다. 양들이 오락가락 하면서 배설한 그 오물들이 풍기는 악취가 가득하고 천장에는 거미줄이 여기 저기 매달려 있으며 쥐들이 들락거리는, 고약하고 어두 침침한 그 마구간을 하나님께서 자기가 출생할 장소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거기에 엎드려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고, 거기에 눕는다는 것은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정도의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더럽고 추악한 곳입니다. 오만 가지 기생충들이 기어다니는 곳입니다. 그곳에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하면 안되었다고 생각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우리가 읽을 수 있을까요? 내가 무엇이길래 저 거룩한 영광의 보좌를 포기하시고 하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야 합니까? 오늘 이 성탄 주일 아침! 우리는 주님의 그 마음에 담긴 사랑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우리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번 성탄을 준비하면서 마음의 구유를 준비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기 예수로 오신 이 성탄을 축하하기 위해 오늘의 성탄절 자세는 어떠합니까? 여러분, 성탄절은 아기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고 체험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이 기쁨을 담을 만한 구유가 준비되어야합니다. 이 기쁨은 세속적인 환락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경건하고 고상한 기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신 성탄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영접한 사람의 숫자는 그 당시 불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소수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행한 성탄의 자세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기뻐하고 영접했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천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시당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 짓밟힌 자, 실패한 자, 병든 자, 죄인으로 몰린 자,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가 오심을 기뻐했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6개월 먼저 왔던 세례 요한의 아버지 어머니,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어떤 사람입니까? 물론 제사장이기는 했지만 아주 평범한, 무명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들은 평생 자식이 없어서 외롭게 살다가 이제는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구를 이끌고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 옆으로 밀쳐 놓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하는데 쓰임 받은 요셉이라는 사람과 마리아라고 하는 처녀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10대 후반이거나 아니면 20대 초반의 아주 젊은 나이의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평생 목공소를 경영하면서 살아야지.' 하는 평범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시골뜨기 청년들이었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의 여러 마을 가운데서도 그 이름이 끼이지 못하는 아주 후진 곳입니다. 따라서 별 볼일 없는 데서 태어나 그저 한 생 살다가 가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 소리를 듣고 찾아온 목자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 당시에 목자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가장 천민 중에 하나였습니다. 남의 양떼들을 밤새 지켜 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제 이름 석자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무식자들이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도 바깥 마당에서 서성거리다 돌아와야 하는 천민들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탄생을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좋아하던 시므온이라고 하던 선지자와 안나라고 하는 선지자를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다 초라한 사람들이요, 평생 외롭게 산 사람들입니다. 안나 같은 사람은 결혼하고 7년 만에 과부 된 후고 84년 동안 아무 혈육 없이 그저 성전에서 날마다 심부름이나 해 주고 기도나 하고 먹을 것 없으면 금식이나 하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자, 이런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환영하고 기뻐했다 그 말입니다. 모두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세상적으로 말하면 천대받는 사람이요, 무시당하기 쉬운 사람들이요, 세상에 무슨 소망이나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뻐했습니다. 특히 별을 보고 먼길을 왔던 동방 박사들이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를 보고 마2:10절에 보면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했습니다. 왜 이렇게 흥분하면서 기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동방박사들은 하늘의 별자리를 연구하지만 세상과 인생의 이치를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고대 과학자요 철학자로 흔히 왕이나 귀족의 자문관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난세에는 왕을 간택하는 일까지 감당할 정도로 대단한 권력을 갖고 있던 엘리트가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겉모습뿐이지 이들 역시 별을 연구하다 보니 인생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고, 인간은 그 가운데 고달프게 살아갑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러한 세상 만사 인생 만사를 보면서 동방박사들은 세상에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절감했을 겁니다. 그런 가운데 메시아의 탄생에 관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소망을 갖고 물 건너 산 너머 먼 길을 찾아왔고, 마침내 아기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은 그분이 바로 모든 인생을 죄와 사망, 그리고 모든 인생고로부터 구원해 주실 메시아요 구세주이심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마치 캄캄한 방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환한 불빛이 비춰오는 것과 같은 환희를 느꼈을 겁니다. 그러므로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한 것입니다. 비록 자기들 앞에 누인 아기 예수지만, 그들은 거기서 예수를 만난 구원의 기쁨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구원의 기쁨을 맛보고 예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절기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구원의 기쁨을 맛보셨나요? 날마다 맛보고 계신가요? 세상 즐거움과 비교되지 않는 ‘그 기쁨’말입니다. 옛날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느꼈던 그 기쁨이 이와 똑같은 기쁨입니다. 시4: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다윗은 세상에서 많은 경험을 해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즐거움 중에 아무리 크고 큰 것이라 해도 주님 주시는 신령한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노래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돈 벌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유명해지고 재미있는 것 경험해보고 그래도 일시적입니다. 표면적입니다. 비유하자면, 아이들이 먹을 것 먹고 장난감 갖고 노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이들이 맛있는 것 주면 좋아라고 먹습니다. 신기한 장난감 주면 좋아라고 갖고 놉니다. 그러나 그때만 잠시 후에는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를 찾습니다. 우리 인간의 육신은 세상 것으로 잠시 즐거워할 수 있지만 깊은 영혼은 결코 그런 것들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만나야 만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구원이요 영생입니다. 영생은 장차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사는 것도 되지만, 지금 내 영혼 가운데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도 영생입니다. 영생이 예수님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영생의 기쁨은 천국에서 누릴 기쁨의 예고편입니다. 천국의 기쁨을 시식하는 겁니다.

또 하나의 기쁨은 ‘경배의 기쁨’입니다. 11절 보십시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 ”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자 그 위엄 앞에 넙죽 엎드립니다. 그리고 경배합니다. 그때 그들이 느낀 기쁨은 세상의 그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이었을 겁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 인간은 종교적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경배할 때 감격과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찬양 속에 큰 감동과 기쁨이 있는 게 아닙니까? 감사하고 기뻐서 예배하고 찬양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힘들고 우울해도 예배하고 찬양을 하다보면 어느덧 기쁨이 샘솟듯 흘러넘칩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첫 번째 성탄절에도 세상 사람들은 무관심하고 세상 재미에 젖어 있었지만 하나님의 택한 자들은 주께 경배하고 찬양하며 천국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이번 성탄절에 주님 앞에 많이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분주하고 바쁜 연말 시즌이지만 절제하고 조용히 주님을 만나시고 경배함으로 천국의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구유에 담을 또 하나의 기쁨은 헌신의 기쁨입니다. 인간은 무슨 일을 하는 데서 성취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세상일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그때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하면 그 성취감은 단순한 세상의 즐거움이 아닙니다. 천국의 기쁨입니다. 영혼 깊은 데서 샘솟는 신령한 기쁨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서, 기껏해야 낙타를 타고 여행을 했을 겁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러나 주님을 만나는 일이라 괜찮았습니다. 기쁨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 경배하면서 무엇을 했죠? 11절(하). “ ...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그들은 예수님께 3가지 예물을 드립니다. 황금은 왕에게 드리는 예물이고, 유향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그리고 몰약은 방부제로 죽을 사람에게 드리는 예물입니다. 세 가지 예물은 동방박사들의 신앙 고백입니다. 아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고백한 것입니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다 드린 것입니다.

성탄절은 사랑과 섬김, 그리고 헌신의 절기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돌아보는 기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흥에 젖어 있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우울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크리스마스 시즌이 1년 중에 자살률이 최고로 높은 시즌이라고 합니다. 주위에 소외된 이웃들,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물질, 혹은 하다못해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건네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헌신의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탄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며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고 우리의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며 주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헌신의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번 성탄절이 진정 기쁨의 절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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