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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이 이기네 (롬 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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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이 이기네(2)
본문 : 로마서 4:9-25


얼마 전에 아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처형이 보험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에 하도 질병도 많고, 일도 많아서 보험을 들었는데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남편도 그리고 지금에 군에 있는 외아들까지 함께 포함해서 세 식구가 전부 들어가는 암을 포함한 모든 질병 예방 보험을 들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야기 끝에 처형이 한 말이 기억에 있습니다.
‘아들 보험은 장가들면 본인하고 며느리가 이어서 보험료를 내게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는 것입니다.

장기 보험이기에 보험료를 장기로 내야하는데 결혼 전까지만 보험료를 내 주고 장가를 들면 이제는 본인이 내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형 참 지독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던 아내가 한술 더 떴습니다.
‘뭐가 지독해요. 나 같은 면 대학 졸업하자마자 아들이 하라고 할 텐데’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종류로 생각이 갈라질 것을 저는 압니다.

① 장가를 가면 당연히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한다.
② 그래도 결혼 전에 부모가 한 것이기 때문에 부모가 능력이 있으면 해야 한다.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이 의견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식을 키움에 있어서 독립적인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해서 그렇게 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보험이 핵심이 아니고 자식을 사랑한다는 개념을 한 번 이해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데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조금 더 리얼하게 질문합니다.
우리들이 자식들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이유가 대가를 바라고 합니까? 무조건 합니까?
무조건 합니다.
세상에 이런 것을 질문이라고 하나? 라고 의아해 하시는 성도들이 전부일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 무엇인가 보상을 바라고 자식을 보호하고 먹여주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굳이 이유를 말하라고 하면 자식이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일전에 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빠는 원로목사가 안 될 거야. 아빠는 상황을 봐서 조기 은퇴할 수도 있어. 그리고 은퇴하면 이제 벌이가 없어져서 아들 덕을 볼 거야. 명심해라 아빠는 니 덕 보며 살 거야. 그러려면 공부 열심히 해서 아빠, 엄마 먹여 살리는데 지장이 없는 직장에 들어가야 될 거야.”

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까?
정말로 말년에 아들 덕 보면서 살기 위하여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까?
내가 평생 너 벌어 먹여 살렸으니까 이제는 네가 나를 벌어 먹여 살려야 되라는 방정식으로 아들에게 이야기했습니까?
네가 너에게 교육시키기 위해서 이 만큼 돈이 들어갔으니까 이제는 네가 커서 그 빚은 갚아야 되 하는 식의 경제논리로 이야기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주어진 공부의 시기를 후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자식을 키우면서 사랑하는 이유는 대가 때문이 아닙니다.
아들이니까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합니까?
무조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들을 사랑하는 이유가 똑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이유는 후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12절은 우리에게 이미 익히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짚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인데 세상의 아버지와는 달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사랑하시는 조건으로 단 한 가지를 내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24-25절을 주목하십시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조건으로 내 거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조건으로 내세우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물론이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이 관건입니까?
믿음입니다.

바울은 오늘 로마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 이 글을 보고 있을 상당수의 로마교회에 등록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 향하여 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할례사수에 대하여 비판하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하기 위하여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을 예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신앙의 모델이었고 범례였습니다.
저는 지난 주에 이 아브라함을 소개했습니다.

이유는 바울이 아브라함을 본문에서 소개한 이유가 아브라함조차도 그가 구원을 받은 조건이 ‘믿음’이었음을 확인해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①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으로 구원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다. (롬 4:2-3)

②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 의롭게 되었던 시기는 할례를 받기 전이었던 무할례자의 시기였다. (롬 4:10-11)

③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처럼 그의 후손들도 할례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롬 4:12-17)

이 세 가지를 종합하여 바울이 말하고자 한 메시지를 핵심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이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관건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이기게 하는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과연 무엇입니까?

저는 지난 주에 우리 교우들에게 그 첫 번째를 소개했습니다.
‘자기부인의 믿음’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 근거로 창세기 12:1절을 제시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것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의롭게 되는 믿음의 요소입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의 믿음의 요소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2. 믿어짐 쪽으로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두 번째의 대지를 설정하는 데 고민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말이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에 고민을 했지만 다른 표현보다 이 표현이 정말로 정확한 표현이기에 이렇게 정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의 자리에 초청받을 수 있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어짐 쪽으로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일반적으로 ‘믿음’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두 가지의 부류가 있습니다.

㉠ 도대체 믿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멘토 목사님의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시무할 때 프랑스 솔몬느 대학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스님을 특강 강사로 모셔서 세미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분이 주님의 교회의 신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정말로 대단한 분들입니다. 나는 아무리 성경을 보고 또 보아도 믿어지지가 않는데 여러분들은 이런 성경을 믿으니 말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믿음 말입니다.

그래서 고전 12:3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당시에 이 글을 쓴 부분에 멘토 목사님이 이렇게 부연 설명을 했습니다.
“종교학 박사도 믿어지지 않은 말씀을 우리들이 믿을 수 있게 된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이 바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그러나 두 번째의 믿음이 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 나는 그대로 믿는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중에 이 믿음에 대한 설명을 아주 잘 표현해 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본문 18-22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창세기 12장에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실 때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뒤에 하나님이 지시한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의 나이가 90세였고 아내인 사라의 나이는 80세였습니다.
이제는 두 사람은 생식 능력을 상실한 나이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후손들을 통한 축복은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다시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의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15:1-5절입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란을 떠난 지 15년이 지난 후에 다시 오셔서 15년 전의 약속을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답답한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무자하고 나의 후사는 몸종 엘리에셀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밖으로 인도하신 후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너의 후손들이 이렇게 많아지게 될 것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생식 능력을 잃은 노쇠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신 하나님의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을 창세기 기자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창 15:6절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의 이 사건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인용하면서 기록한 내용이 본문 19절입니다.
주목합시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롬 4:19)

본문을 UBS4 헬라어 원문에서 살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먼저 아브라함이 자가의 몸이 ‘죽은 것 같음’이라고 번역된 단어 ‘nenekrwmevnon’(네네크로메논) 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 이라고 번역된 ‘nevkrwsin’ (네크로신) 이라는 이 두 단어는 동사형과 명사형으로 쓰였다는 것을 제외하면 동일한 완료 수동태 분사형이라는 문법의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런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가 이미 생식능력이 완전히 없어졌다는 결론이 났다는 것입니다.
사라 역시 마찬가지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임신의 능력을 이제는 완전히 상실한 상태임을 확인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늦둥이를 낳을 가능성이 남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완전히 생식능력이 끝난 상태였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 적용하여 설명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별과 같은 수많은 후손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 상태에서 어떻게 했음을 소개합니까?
다시 본문 19절 후반절부터 22절입니다.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이것을 창세기에서 주지한 것처럼 창 15:6절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믿음이 무엇이었습니까?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은 것입니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것을 됨으로 믿은 믿음이었습니다.
도저히 살릴 수 없는 것 같은 것을 살리는 믿음입니다.
죽음과 사망에서 부활할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본문을 마감하는 바울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롬 4:24-25절입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들이 범죄 함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은 당신이 살아나셨기에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시는 능력의 주님임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두 번째 이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죽을병에 걸려 부모가 매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왕의 신하라는 신분을 볼 때 그는 매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높은 지위와 함께 권력도 있었고 돈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훌륭한 의술을 얼마든지 제공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의 병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왕의 신하도 사랑하는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겠습니까?

그러나 아들의 병은 점점 더 깊어갔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의 아버지의 절망감은 어떠했겠습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절망 가운데 있는 그 때 그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 오셨다는 소식입니다.
갈릴리 가나는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첫 이적을 행하신 곳입니다.
아마도 같은 갈릴리 지방에 있던 그도 이미 예수의 소문을 듣고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분이라면 아들의 병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라는 분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비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요청합니다.
요 4:47절입니다.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그러자 주님은 아비의 이 요청을 듣고 그 아들에게 가서 안수를 한 것도 아니요 기름을 부은 것도 아닙니다.
그냥 다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4:50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예수님을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이어지는 요한복음 4:51-53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어떻게 이런 기적이 임했습니까?
예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은혜가 있습니다.
아비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지는 쪽으로 움직였던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능력을 믿어지는 쪽으로 승부를 걸어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주님이시고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이십니다.

히 12:2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말씀 맺겠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유공자 권사님의 친 오빠 되시는 유인택성도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관예배가 드려지는 청풍에 다녀왔습니다.
이미 시신과 교우들이 서울에서 도착하여 하관이 막 진행이 될 때였습니다.
인부들이 관을 들고 땅에 막 묻고 관을 똑바로 놓기 위해서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하관이 끝나고 담임목사가 하관예배를 집례했습니다.
은혜롭게 하관이 끝나고 취토를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순간 헌화를 하고 취토를 했으면 좋겠다는 유족의 말대로 헌화를 하는데 관위에 십자가를 그으면서 헌화한 꽃을 놓았습니다.
관에 십자가가 그려졌습니다.
그 위에 취토를 하고 흙으로 메웠습니다.
끝까지 다 하관의 일을 보지 않고 왔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관 위에 아로새겨진 십자가 형태의 꽃은 흙으로 덮여지면서 짓눌렸을 것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꽃으로 만들어진 십자가가 무슨 위력이 있을까?
아무런 위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 무덤 속에 잠자고 있는 유인택 성도를 무덤 문이 열리면서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 부활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흘려주신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나의 죄를 씻어주신 보혈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을 때 임하는 능력입니다.
우리 주님의 능력은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입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믿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어짐 쪽으로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이기시는 우리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사도 요한의 말씀을 선언합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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