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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 (요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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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 (요 1:9-14)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기쁜날입니다.
옆 사람, 앞뒤 사람과도 성탄의 인사를 나눕시다.
“성탄을 축하합니다” 영어가 되시는 분들은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의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안에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기쁘고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이 세상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우리에게는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탄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준비를 하고 축하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기업에서도, 동네마다, 성탄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장식을 하지만 어쨌든 그들도 예수님덕분에 돈을 벌게 되었으니 좋은 일이지요.

어제 우리 교회에서는 약 30여명의 성도들이 태안 기름 유출 현장을 찾아가서 하루 봉사를 하고 왔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뉴스를 통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만 현장에 가서 보고 느끼는 감정은 또 달랐습니다.
사고가 난지 20여일이 다 되었습니다.
쏟아진 원유를 걷어내는 작업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히 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지난 2주 동안에 엄청난 작업이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많이 걷어냈지만 아직도 기름은 해수욕장 바닥에 스며들어 있고, 돌과 바위에 기름이 범벅이 되어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기름을 닦아내도 내일이면 또 묻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곳 사람들은 날마다 와서 닦아내야 한다고 그럽니다.

우리 교회에서 그곳을 방문하게 된 이유는 전국적으로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탄생을 어떻게 하면 뜻깊게 축하해 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결정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축하를 화려하고 아름답게 축하해 드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때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과 함께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나누는 것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방문한다고 KBS, MBC, SBS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있는 교회 목사님 한분만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대한 적십십자사에서 나온 봉사자들이 점심 제공을 해 주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가서 봉사하고 온 것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 탄생의 기쁜 소식을 그곳 주민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는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화려한 왕궁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성전도 아니었습니다. 부자집 안방도 아니었습니다.
이름없는 사람의 집, 그것도 말들이 사는 마굿간이었습니다.
춥고, 냄새나고, 더러운 곳, 그리고 시끄러운 곳이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아이들을 출산할 때는 모두 시설좋은 병원에서 출산을 하지요?
물론 시대가 다르기는 합니다만 아이 출산의 경험이 있으신 여성들은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말들이 사는 마굿간에서 아이를 출산한다?
출산할 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이 서투른 손놀림으로 도와준다? 상상하기 어려운 출산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실 예수님은 그렇게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아마 그 보다 더 불쌍한 환경속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보면 자기 환경에 대해 비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모를 원망하고, 태어나고 자라난 환경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뭐라고 하실까요?
‘나보다 더 불쌍한 조건에서 태어난 사람 있으면 나와봐’ 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어떤 사람이 불행한 조건에서 태어났다면 예수님은 그 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의시대고 뽐내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한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은 그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보다 높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로부터 가장 높다고 하는 사람까지 모두를 품에 안으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가장 낮은 형편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하는 사람까지 모두에게 빛을 비추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가장 낮은 자로부터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자까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어두움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모든 사람들,
또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
그들은 본인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죄의 어두움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이유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① 빛은 생명입니다.

빛이 없다면 생명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이 세상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온 우주공간을 덮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제일 먼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 빛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그를 따를 때에 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빛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빛은 생명을 자라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늘의 빛나는 태양은 모든 생명의 에너지원입니다.
햇빛이 비칠때 나무도 동물도 사람도 살게 됩니다.

겨울이 길어서 아침 9시경에 해 뜨고 오후 2~3시 되면 어두워지는 북극에 가까운 나라들이 있습니다. 이쪽 사람들은 해를 오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울증에 많이 걸립니다.
햇빛을 보지 못하면 사람들이 우울해 집니다. 그래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릴것 없이 해가 나기만 하면 필사적으로 옷을 벗습니다. 햇빛을 받아야 생명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예부터 햇빛이 잘 드는 양지녁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습니다.

안방과 대청 마루는 모두 남향입니다. 지금도 집을 지으며 일조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설계를 합니다. 동물도 식물도 마찬가지로 햇빛이 없으면 죽는 것이요 햇빛이 비치면 사는 것입니다. 햇빛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생명체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생명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 안에서 생명이 나오고 그 생명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면 그 손에서 생명이 나오고 그 생명의 기운은 사람을 살리는 기운입니다. 전기선이 연결되면 전기불이 들어오듯이, 전화선이 연결되면 통화가 이루어지듯이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과 연결되면 모든 사람이 살아납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사 9:2)

② 어두움이 사라짐

빛은 어둠 속에서 길을 인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행할 때 밤에는 하나님이 불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의 상황을 어두운 밤으로 생각하셨습니다. 물론 광야를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현실은 광야를 방황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황가운데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들은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의 앞날은 어둡고 불투명하였습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민족의 장래가 어둡기만 합니다.한때 마카비 형제가 나타나서 이 불투명한 정국으로부터 자신들이 가야할 길을 제시해 주는 것 같았는데 그들에 의해 세워진 왕조도 결국 로마에 의해 멸망함으로 그들은 어디가 그들이 가야할 길인지 그 방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으로라도 그 길을 분명하게 깨달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적으로도 서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를 대표하는 네 개의 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리새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두개파입니다.
그리고 열심당과 엣세네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바리새파는 율법주의자들이고 사두개파는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열심당은 혁명 투사적 성격이 강했고 엣세네파는 현실을 도피해서 은둔 생활하는 자 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은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지금 현실도 그때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혼돈속에서 방황하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때 예수님은 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그 분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따라 가시기를 바랍니다.
어둠속에 빛이 있으면 실족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실족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 길에 밝은 빛이 되어 주십니다.
③질병이 치료됨
빛을 비춘다 함은 구약의 말라기4:2에 이름 같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세계적인 유명한 정신 심리치료의사인 폴 투르니에는 "나는 정신과의사를 찾는 열사람 중 아홉은 꼭 의사를 찾아갈 필요가 없다고 확신한다 고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해 주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들을 믿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고말합니다.
그렇게 될 때 그들은 회복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삶을 변화시키고 상처를 치유하는 놀라운 치료의 광선입니다. 모든 마음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새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을 사랑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어린 소년이 심각한 정서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는 물론 학교친구, 선생님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닫고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나쁜 행동만 일부러 골라 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항상 꾸중을 듣는 골치 덩어리였습니다.
이 소년은 자신이 사랑을 거부당하고 사랑받지 못하며, 이해받지도 못하고 어떤 사람의 기대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느꼈습니다.
부모는 이 아이를 정신과 의사에게 데리고 가서 상담을 받게 했습니다. 이 소년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고 여러 방법으로 몇 주간 헛되이 수고한 정신과 의사는 부모에게 "마지막으로 시도해볼만한 방법이 있는데 당신의 아들에게 강아지 같은 애완동물을 한 마리 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아이가 강아지와 친해질지 모르니까요?" 라고 말했습니다.

부모는 의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강아지를 한 마리 사서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아이는 강아지에 아무관심도 보이지 않는데 그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며 장난스럽게 짖어대며 어린 소년에게 두발을 들고 뛰어 올라왔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잔인하게도 힘껏 개를 발로 찼습니다. 개는 낑 소리를 내며 저 멀리 잔디밭에 넘어졌습니다.
개는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러워 신음하면서도 오히려 사랑의 눈으로 뚫어지게 소년을 쳐다보았습니다. 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꼬리를 흔들며 또 다시 두발을 들고 자기의 새 주인인 어린 소년에게 뛰어 올랐으며 소년의 손을 사랑스럽게 핥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소년은 너무 놀라 현관문을 열고 부모에게 뛰어 갔습니다.
전혀 말도 하지 않던 아이가 엄마, 아빠에게 소리쳤습니다. "엄마! 아빠! 내가 강아지를 발로 찼는데도 강아지는 아직도 나를 미워하지 않고 저를 사랑해요" 소년은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습니다. 그 순간 정서적으로 마음을 닫고 살던 어린 소년의 마음 문이 열리고 그의 응어리진 마음이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강아지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의 사랑의 빛이 그 마음속에 들어갈 때 어떤 환자라도 치료되지 않겠습니까?
빛은 자외선이 있고, 적외선이 있어 치료의 광선을 발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놀랍게도 우리의 질병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④ 소망을 안겨줌

셋째로 빛은 소망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삶에서 새로운 소망을 얻었습니다.
죄의 고통에서 죄 사함의 소망을 얻은 사람, 병의 쇠사슬에서 병 나음의 소망을 얻은 사람, 죽음의 공포에서 부활의 소망을 얻은 사람, 멸시와 천대에서 위로와 인정의 소망을 얻은 사람, 자기 밖에 모르는 욕심의 굴레에서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소망을 얻은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바닷가에 가면 등대가 있습니다.
등대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외로움, 그리움, 기다림, 희망 투표결과, 외로움, 그리움, 기다림은 17-19%이고 희망은 46%나 되었습니다.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는 등대지기를 위한 것도 아니고 육지에 사는 사람을 위한 것도 아니라 어두운 바다에서 배를 몰고 항구로 들어오는 어부나 선장을 위한 것입니다. 등대하면 문학적으로 외로움 그리움 기다림일지 모르지만 거친 바다와 싸우는 어부들에게는 희망이이고 집으로 돌아 갈 수 있도록 길잡이 해 주는 희망의 등대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망의 등대가 되어주십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주 예수를 바라보자” 바다에 떠 있는 배는 결코 비바람에 꺼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등대불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주 예수를 바라봐야 우리의 믿음의 항해가 잘 할 수 있고 소원의 항구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어둔 세상, 어둔 마음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서 더욱 밝아지는 생활이 되고 생명의 기적을 누리는 생활이 되며 희망을 일구어 나가는 생활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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