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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오늘 용서하라 (마 18: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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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용서하라 (마 18:15-20)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두세 증인의 입을 빌어서 확정지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형제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 다른 힘의 원천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우리 마음이 스산해집니다. 한 일도 없이 세월만 허송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돈벌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통장에 남은 잔고를 보고 자기의 한 해를 가늠할 것이고, 대중적인 인기를 추구하는 연예인들이라면 방송 출연 횟수를 가지고 한 해를 결산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길로 삼아 걷고 있는 우리는 조금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난 한 해 얼마나 맑아졌고, 얼마나 깊어졌습니까? 얼마나 예수를 닮으셨습니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지난 한 해 누군가에게 받은 것이 많습니까, 준 것이 많습니까? 받은 것보다 준 것이 많다면 우리는 꽤 잘 산 겁니다. ‘부단히 버리고 든든히 붙잡는 것의 통일’이 참 삶의 길이라지요? 많이 주고 버릴수록 영혼은 더욱 가뿐해집니다. 겨울이 되었는데도 누렇게 변한 잎들을 떨구지 못한 나무들처럼 우리 영혼은 추레하고 무겁기 이를 데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6세기의 성자인 베네딕도는 서양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로 알려진 분입니다. 그와 관련된 전설이 많은 데 그중의 하나가 떠오릅니다. 수도승들이 새 수도원을 한 채 짓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큰 바위 덩어리 하나를 끌어올려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위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수도승들은 사람들을 더 불러와 돕게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바위 덩어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악마가 이 바위 덩어리 위에 앉아 있나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베네딕도는 자초지종을 다 듣고는 아무 말 없이 그 바위 덩어리와 수도승들 위에 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러자 마치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바위 덩어리에서 빠져 나가기라도 한 듯 수도승들은 그 바위 덩어리를 가볍게 옮길 수 있었습니다. 타고난 의심쟁이인 우리들은 즉시 “이 거짓말이 정말이야?” 하고 속으로 묻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살다보면 여러분도 이 수도승들과 같은 경험을 하게 마련입니다. 일이 잘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커다란 난관에 부딪힐 때가 있지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보아도 일이 풀리지 않을 때면 우리는 뭔가 시커먼 것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속상한 것은 다른 사람들은 어렵잖게 그런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더욱 초조해집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네딕도가 바위와 수도승들에게 성호를 그었다는 사실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안 되면 되게 하라’고 외치며 애 쓸 것이 아니라 한번 다른 힘의 근원에서 출발하여 일을 해결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받쳐주는 원초적인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있다면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어떤 힘이 우리에게 유입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 우리에게 주어진 열쇠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빠져 나가지 않는 한 우리 삶의 무게는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빠져 나가야 할 어두운 그림자는 무엇일까요?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우리가 결별해야 할 어두운 그림자는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원망과 미움, 이런 것이 우리 영혼을 질식시킵니다. 우리 얼굴을 어둡게 하고, 천진하게 웃지 못하게 하고, 다른 이와 더불어 마음을 열고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미움과 원망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아름다웠던 관계는 깨지고, 거리감이 생깁니다. 어쩌다 만나도 뜨악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 다가서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죄는 ‘소외시키는 힘’이라는 말은 얼마나 적확한 표현입니까? 죄는 멀어지게 하는 힘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로 상처를 주고받는 게 사람입니다.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후입니다. 그 일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 삶에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신앙 공동체로 기억되는 초대교회도 역시 사람들이 모인 곳인지라 갈등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갈등이 생겼을 때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입니다. 덮어두어야 할 때도 있지만 덮어두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새벽거리에서 우리는 전날 밤 취객들이 남겨놓은 숙취의 흔적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불쾌합니다. 그래서 종이로 덮어놓고 지나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해결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악취를 풍기고 행인들의 욕지기를 일으킵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필요합니다. 갈등도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지만, 속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경우에는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무안하지 않도록 홀로 조용히 충고해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그가 듣지 않을 때는 두세 사람이 함께 가서 충고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가 공식적으로 그에게 충고를 해야 합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태는 다소 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공동체를 지키려는 복음사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충고하는 이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얻으려는 마음입니다. 그가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는 마음 말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충고는 오히려 더 큰 거리감을 만들기 일쑤입니다. 어떤 사람을 꾸짖거나 충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를 감정적으로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바른 말은 때로 칼이 되어 상대방의 마음을 찌릅니다. 하지만 사랑이 실린 바른 말은 오해와 미움의 종기를 도려내는 수술 칼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

이 말씀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후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면서 하신 말씀인데(마16:19) 여기서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마태의 실수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같은 구절의 반복을 통해 용서의 문제가 초대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문제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또 우리에게 주신 열쇠는 잠그라고 준 것이 아니라 풀라고 준 것입니다. 왜 풀어야 합니까? 풀지 못하는 마음이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 목에 걸린 독 사과

독일의 그림형제가 들려주는 <<백설공주>> 이야기를 잘 아시지요? 백설공주는 계모가 건네준 독 사과를 먹고 죽습니다. 그런데 숲을 지나던 왕자가 유리관 속에 든 백설공주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집니다. 왕자는 하인에게 백설공주의 관을 옮기도록 지시했는데, 하인의 실수로 관이 바닥에 떨어집니다. 그 순간 공주의 목에 걸렸던 사과가 빠져나옵니다. 그때 공주는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되살아나게 됩니다. 이 작품에 대한 패러디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것은 ‘목에 걸린 사과’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 목에도 그런 사과가 걸려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이름이 욕심이든 미움이든 원망이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든, 저마다 목에 걸린 사과로 인해 영혼이 질식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토해내야 우리 영혼이 삽니다.

어느 날 랍비 해롤드 쿠시너(Harold Kushner, 1933~)에게 회당에 속한 한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남편과 이혼하고 직장에 다니며 세 딸을 키우고 있던 여인입니다. 여인은 랍비에게 탄식을 늘어놓습니다. “남편이 저희를 버린 후, 매달 돈 문제로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남편은 재혼하고 다른 주에 가서 잘 사는데, 저는 아이들에게 영화 보러 갈 돈조차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남편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쿠시너는 여인에게 전 남편을 용서하라고 하는 까닭은 그가 한 일을 두둔해서가 아니라 그는 “계속 당신의 머릿속에 남아 있으면서 당신을 더 괴롭히고 분노하는 사람으로 만들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여인은 더 이상 관계를 회복할 수 없는 전 남편을 붙잡고 놓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에게 해를 끼치고 있었습니다. 쿠시너를 통해 저는 용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었습니다 용서란 “슬픔을 벗어던지는 것인 동시에, 더 중요하게는 희생자로서의 역할을 벗어던지는 것”입니다.(시몬 비젠탈의 <<해바라기>> 제2부 심포지엄 중에서)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왜 독 사과인지 아시겠지요? 그 마음은 남이 아닌 나를 괴롭힙니다. 결과적으로 용서란 나를 희생자로 만드는 역할을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이제 하루 밖에 남지 않은 이 한 해를 잘 갈무리하는 길은 다른 것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의 죄와 잘못을 용서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물론 잘못을 저지른 자의 참회가 전제되지 않은 용서는 진정한 화해에 이르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참회하지 않는 뻔뻔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 왔습니다. 역사 앞에, 자연 앞에 큰 죄를 저질러놓고도 자신들의 무죄함을 강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분노할 줄 모른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살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조차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거룩한 분노를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좀처럼 돌이킬 줄 모르는 사람은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설명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를 속상하게 하고, 지치게 하는 것은 그런 큰 문제들이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주고받는 작은 상처들이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우리 영혼을 짓누릅니다. 마치 발바닥의 굳은살이 보행을 어렵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마음에 드리운 어둠은 하나님의 은총의 빛 안에 있을 때 사라집니다. 우리의 미움과 원망까지도 빛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 굳게 서십시오.

새해가 다가옵니다. 새해가 된다 하여 삶이 새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은 유월절이 다가오면 집안에 있는 묵은 누룩을 찾아내 다 태워버렸습니다. 우리도 묵은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미움과 원망과 질시의 감정을 청산하지 않고는 우리는 새해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지난 일 년을 돌아보니 제가 여러분에게 잘못한 것이 참 많습니다. 따뜻하게 보듬어 안지 못하고, 다가서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우리가 한 마음이 되어 모일 때 주님도 그곳에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용서와 화해의 영이 우리 가운데 오시기를 바랍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내게 크건 작건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을 용서할 힘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합시다. 그리고 용서하고 용서받음으로 말끔히 비워진 우리 영혼에 하늘의 빛을 채워달라고 기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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