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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신다 (창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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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신다 (창 1:1-5)

오늘은 금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 동안을 돌이켜 보면서 옆에 있는 분들에게 '한 해 동안 평안하셨습니까?'라고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12월의 마지막 주일,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유찬이라는 시인의 시 가운데 '12월의 끝에서'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를 들으면서 한 해를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한 날이 미워한 날보다 많았는지?
슬프고 힘들었던 날보다 행복했던 날들이 많았는지?
12월의 끝에서 지난날들을 떠올려 보고 있어.
보석 같은 날들을 가슴으로 살았니, 머리로 살았니?
얼마나 웃고 살았어 아니면 찡그렸어?
맑은 하늘 아래 투명한 날들을 뿌연 눈으로 보낸 건 아닐까?
별이 찬란하던 밤 내가 깨어 있었는지 잠들어 있었는지.
난 거울을 봐.  거울 속의 나를 봐.
아름다워진 거야, 추해진 거야?
무엇이 변한 것일까?
밤이 깊어만 가네.
한해가 또 저무네"

저는 이 분의 시를 읽으면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해를 마무리하기에 합당한 단어 하나를 떠올린다면 어떤 단어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쉽게 결론이 났습니다.  그것은 '감사'라는 단어였습니다.  감사야말로 시간의 한 페이지를 닫고 또 다시 새로운 시간의 페이지를 여는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역사의 종말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곡해하여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도피하고 있었던 당시의 데살로니가 성도들, 하늘만을 바라보며 일상적인 삶을 게을리했던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 재림을 기다리는 깨어있는 삶을 나누기로 결심을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깨어있는 삶의 마지막 삶의 중요한 결론으로 바울이 던졌던 화두도 역시 감사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 데살로니가전서의 마지막 결론과도 같은 말씀을 전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오늘 금년의 마지막 주일에 적용할 때 우리는 한 해에 대한 말씀을 이렇게 결론으로 지어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나온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여러분 가운데는 이렇게 반문하는 분들이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지나온 한 해  동안 살아왔던 내 인생에서 내가 원하지 않았던, 그리고 내가 결코 환영할 수 없었던 질병과 사고, 실패와 수치, 그 치열한 싸움, 그리고 그 뼈아픈 고통이 있었는데도 내가 어떻게 감사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바로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우리가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지나온 한 해 동안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삶이 혼돈과 깊은 흑암 속을 거닐 때에도 하나님의 영은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하심과 방법으로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종지부를 너무 빨리 찍지 마십시오.  저는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저는 하나님의 신이 우리 속에 운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인생의 종지부든, 내 사랑하는 사람의 종지부든, 아니면 내 자식의 종지부든, 누구든지 인생의 종지부를 너무 빨리 찍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은 삶의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나온 한 해를 돌아보면 우리들 주위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어려운 상황을 극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 것도 못하고 역사에 무너진 사람들도 수두룩합니다.  오늘은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모든 삶의 상황을 극복하리라!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모든 상황을 극복하게 되는 축복의 역사가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불길처럼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람과 싸우지 말고 세상과 싸우십시오.  사람과 싸우지 말고 환경과 싸우십시오.  사람과 싸우지 말고 상황과 싸우십시오.  역사 속에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던 사람들은 절대로 사람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다 상황과 싸웠습니다.  사건과 싸웠습니다.  시대와 싸웠고, 세상과 싸웠습니다.  금년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바라보는 이 시점에 서서 여호와의 신으로 능력을 덧입고 이 강퍅한 삶의 상황과 맞서 싸워 승리의 개가를 드높이 부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의 비상을 본 적이 있습니까?  '나이아가라 폭포'와 같은 천야만야한 거기에도 물고기가 튀어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 비상하는 물고기들이 생명의 젖줄을 찾아서, 생명의 더 큰 길을 찾아서, 더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을 찾아서 올라가는 물고기의 비상처럼, 오늘 내 영혼이 내가 살 수 있는 마지막 생명의 샘을 향해서 예배를 드리며, 축복된 생명의 젖줄을 찾아서 힘차게 올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생명의 영을 믿으셔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사건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운행을 믿으셔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영은 역사하시며, 우리 가운데 운행하고 계십니다.  역사는 새로운 시각에 의해서 발전하는 것이지 경험자의 낡은 시각에 의해서 새로워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경험자'를 너무 의지하지 마십시오.  내가 경험이 없다고 기죽지도 마십시오.

세상에 문제는 없습니다.  언제나 문제를 보는 방식이 문제입니다.  경험자의 눈으로 보지 마시고 새로운 시각으로 보십시오.  자신의 문제를, 자기 사업의 문제를 다르게 보십시오.  그래서 오늘 믿음으로 시각을 바꾸어서 이 자리에 올 때의 내 인생의 설계와 갈 때의 설계가 달라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내 인생의 설계를 바꾸는 일입니다.  설계를 바꾸고 그것대로 해보면 됩니다.  설계가 워낙 조잡하면 무슨 방법이 없습니다.  변화는 일종의 상실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변화하려면 과거에 잘못된 인생의 설계도를 잊어버려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경험도 잊어버리십시오.  지식도 잊어버리십시오.  내가 알고 있는 것, 다 잊어버리십시오.  새로운 것이라고 하는 변화는 일종의 상실이 있어야 됩니다.  따라서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지려고 하면 과거의 행동 패턴에 대한 슬픔의 과정이 있어야만 합니다.

"내 힘으로는 잊어버릴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가나안이 있기에 애굽을 잊어버리겠나이다.  애굽의 부귀와 아름다운 일을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을 정복시키기 위하여, 가나안의 새 땅을 보기 위하여 내 과거의 정든 것을 다 잊어버리겠나이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성령님의 거룩한 충동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는 아무리 세찬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모진 날씨 속에서도 더 높은 곳에는 청명한 하늘의 햇살이 눈부시게 이 땅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간사도 매한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곤고한 일이 있더라도 높은 곳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더 신비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 귀한 것들은 다 높은 곳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높은 곳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큰 것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앞에는 모든 혼돈과 흑암과 공허가 다 물러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돈의 자원도 중요하고, 천연자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자기 내면의 자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말 인생의 핵심가치, 핵심되는 자원은 내면에 있습니다.  슬기로운 힘, 사물을 헤아리는 능력, 누구 앞에든, 어떤 시대나 통할 수 있는 내면의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런 것들은 지금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자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충성과 신뢰와 정직의 자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외부적인 것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뢰나 충성, 정직, 사랑이니 하는 내면의 자원을 다 잃어버린 사람은 아무리 두드려도 단 한푼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뢰의 자본이라고 하는 것은 그 생명의 마지막 자원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예배를 드리다가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나를 믿으시듯 내가 사람 앞에 믿어질 수 있는, 자신이 자신을 믿을 수 있는 그런 신뢰의 자본들이 내 속에서 회복되어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한 시대가 가면서 새 시대를 향한 시각전환, 정보와 지식에 대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한 해를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먼저 설계자가 되십시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은 것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붙잡고 설계를 해 가십시오.  내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설계를 하십시오.  인생의 설계도를 그리십시오.  그린 것이 있어야 지울 수도 있습니다.  아무쪼록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예배를 드리면서 나에게 영감이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의 설계가 떠오르지 않거든 이 자리를 뜨지 마십시오.  우리는 매달려야 합니다.  부르짖어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복 주셔서 내 인생의 설계도가 나오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지식이다, 말씀이다….' 라고 합니다.  이것도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핵심은 자유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자유 하려고 믿습니다.  내 인생에서 내 형제들이, 내가 아는 사람들이, 내 자식들이 나에게 자유 함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믿고 의지하는 사람 속에, 내 인생에 자유 함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큰 믿음을 가지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내 믿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는 자유 합니다.  내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유해 집니다.  내 믿음이 분명하면 분명할수록 내가 누리는 자유함은 더욱 분명해 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게 믿음이 없을 때, 내 앞에 펼쳐지는 어려운 삶의 환경 앞에서 나는 얼마나 근심했습니까?  얼마나 걱정하며 염려했습니까?  믿음 없음이 나를 올무에 얽매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핵심은 다름 아닌 자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자유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것에 대한 눈을 뜨셔야 합니다.  조직에 순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개방성을 가지십시오.  이를테면 기업이 안 된다거나 가정이 잘 안되거나 조직사회에 잘 순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개방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질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질서는 습관을 만들지만 혼돈은 생명을 만듭니다.  언제나 새로운 것, 새로운 생명은 혼돈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질서적으로 되어 있으면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때로는 그 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창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조직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순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개방성을 가질 수 있는 눈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기업이 더 커집니다.  그래야 국가가 더 일어납니다.  그래야 교회도 더 커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질서만을 너무 강조하게 되면 그 교회는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태초에 깊은 혼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혼돈은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혼돈이 없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영이 운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크게 가지십시오.

문제는 변장하고 나타나는 해답입니다.  그러니까 마구 혼돈이 일어나거든 여기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겠구나! 하는 믿음을 불러일으키셔야 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가복음7:7-11)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품에서 뛰놀며 상상력의 날개를 펴는 것처럼 상상력의 세계에 뛰어 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한 사람들은 대단히 장난기가 있었습니다.  장난기가 너무 없는 사람은 문제입니다.  골리앗은 그 장난기 심한 다윗이 던진 물 맷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통통하고 짤막한 키의 삭개오가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까?  장난기가 있어서 뽕나무 위에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수제자가 되고 어떻게 능력을 얻었을 수 있었습니까?  남들은 그대로 있는데 혼자 바다에 뛰어내리면서 "주님이시어든 나로 물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에 놀이 공간을 만드십시오.  우리 기독교인들의 약점 중의 하나가 거룩과 경건만 강조하다가 마음에 놀이 공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 거룩 거룩 거룩을 외치다 보니까 모든 상황을 창조적으로 만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끼를 발휘하십시오.  마음껏 장난기를 발휘하십시오.  놀이문화를 만드십시오.  놀이문화에 뒤지고 나면 역사에 퇴보되고 맙니다.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이 더 좋고, 좋아하는 것보다는 즐기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인생을 감사하며 즐겁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을 안내자로 모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은 자신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게 만들고, 그 일을 좋아하도록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 보면 다른 사람들이 재미가 있어야 됩니다.  좋은 세상을 만듦에 있어서 가장 궁극적인 자원은 인간의 즐거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돈을 법니까?  기쁘게 살기 위해서 입니다.  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사람을 만납니까?  기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신앙의 핵심은 다름 아닌 자유입니다.

창의력을 사모하십시오.  창조라고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영감의 지시를 받아 그것을 재배치할 뿐입니다.  창의력의 방해물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내가 어떻게 되고 세상이 어떻게 되었다고 했을 때, 어느 조직이든 어느 단체든 제일 먼저 구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창조성이 나오는 사람입니다.
창조성을 방해하는 첫 방해물은 논리에 대한 과신입니다.  '아! 나는 분석력이 강하다!  나는 논리력이 강하다!'  이러한 논리나 분석에 대한 과신, 이것은 창의력을 배신합니다.

자기의 지적 재산을 모두 논리적으로 분석적으로 이용하고 사용하려고 들다보면 상상력이니 직관력이니 감성이니 유추능력이니 유머니 하는 것들은 도외시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주 대단히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사람들의 특징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은 절대로 마음놓고 웃지 않습니다.

두 번째, 체제 순응자입니다.
체제를 지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어떤 조직의 생리를 지켜나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할 말은 안하고 눈치만 보는 맹종자들, 자기 신념이나 편협된 사고, 선입관에 곧이곧대로 몇 십년 이상 맹종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의적 영감의 족쇄를 채워서 절대로 창의력이 안 나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갖고 있는 이 무거운 족쇄를 벗어 던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이 강같이 흐르기를 축복합니다.

세 번째, 실패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웃음거리가 되면 어떻게 할까?'  '부끄러움을 당하면 어떻게 될까?'  '망하면 어떻게 될까?'  '체면이 있지!' 하는 체면 유지형은 절대로 창의력이 안 나옵니다.  실패의 숫자가 많을수록 성공이 큽니다.  수많은 실패... 가족이 다 흩어지고 그렇다고 해도 끝까지 나가는 것입니다.

성공을 앞당기는 방법은 실패율을 배로 늘이는 것입니다.  절대로 실패를 두려워해서 안됩니다.  혼돈과 실패 속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실패 속에서 종지부를 찍지 마시고 지금도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신다!  아직도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신다! 는 믿음을 갖기를 축복합니다.

네 번째, 부정적인 정신 태도입니다.
모든 에너지를 항상 부정적인 곳에 쏟아 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부정적인 생각에서 시작을 합니다.  그런 사람은 모든 삶의 에너지를, 어떤 상황에 담겨진 기회를 하나님의 복된 것으로 보지 않고, 자기 경험이나, 자기 견해나, 자기 판단에 비추어 언제나 부정적으로 자르고 마름질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는 것에 대한 여유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이나 비판과 판단은 나무의 해충뿐만 아니라 꽃도 시들게 하고 맙니다.  그런 사람은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어나야 합니다.  내게 있는 모든 부정적인 사고의 틀을 깨뜨려야만 합니다.

다섯 번째, 믿음이란 미완성을 수용할 수 있는 역량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호기심이 강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나타날까?"하는 호기심이 없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야, 이 예배를 드리고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빨리 나가서 무언가 해 보고 싶다!"  이런 호기심이 일어나야 예배를 바로 드린 것입니다.  이 마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이 호기심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직관력은 논리도 아니고 분석도 아닙니다.  가장 훌륭한 대답은 직관에서 나옵니다.  논리적으로 하는 것, 이것은 다 지나간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분석적으로 하는 것, 이것은 과거의 것입니다.  미래적인 것은 언제나 직관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호합니다.  다 불확실성에서 이것이 될까? 안될까? 정말 도와줄까? 정말 기적이 일어날까?  정말 성공할까? 이 대단한 모호함 속에서 인간은 이리 저리 헤매입니다.

원래 모호함이라고 하는 것은 '끝없이 방황한다'  '끝없이 헤매 인다' 는 뜻입니다.  여기 저기 헤매이고 의심하고 불확실하고 망설이고, 될까? 안될까?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끈질긴 인내력을 가지고 모호함을 이겨내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도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십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십니다.  이제도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십니다.  우리는 헤매기는 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그 모호함은 이겨야 됩니다.  결국 성급한 종지부를 찍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급한 판단이나 비판을 뒤로 미루십시오.  하나님의 영의 영감이나 지혜는 처음에는 매우 섬세하게 오기 때문에 스스로가 내게 나타난 섬세한 하나님의 반짝하는 영감을 경히 여기면 안됩니다.  또 내게 영감이 반짝 왔을 때,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향해서 빈정대면 창의력은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빈정대는 사람들을 멀리 하십시오.

가만히 보면, 체질적으로 남을 빈정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쏘아붙이기를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의력이나 하나님의 영감은 대단히 섬세하고 연약하게 오기 때문에, 그것을 "아니!  그렇게 생각해요?",  "아니! 너 그렇게 생각했니?",  "그렇게 할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자꾸 흙을 덮어 주고 씨를 키워주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까짓 것!" 이렇게 빈정대며 "야! 집어쳐라!"고 쏘아대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싹도 못 내고 죽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지금도 하나님의 신은 운행하신다고 믿으십시오.  그 하나님의 신은 지금도 나에게서 운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요즘 창의력 교육에 대해서 온 세계가 달라붙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노동력의 시대인 블루 칼라도 지나갔고, 분석력과 과학적 사고와 논리적 사고의 화이트칼라도 지나갔고, 이제는 반짝반짝하는 골드 칼라라고 하는 머리가 반짝반짝 돌아가는 영감이 넘치는 사람들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힘이 없어도 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지식이 없어도 됩니다.  창의력의 머리만 반짝반짝하면 얼마든지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됩니다.  머리 잘 돌아가는 사람이 일어납니다.  머리가 잘 돌아가야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잘 돌아가느냐 하면, 놀이가 장려되는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들이 잘 돌아간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 교육에 전반적으로 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이와 함께 놀이문화를 만들어야만 그 아이의 창의력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렇게 많은 노벨상을 받고 수많은 과학자를 낸 것입니다.

유대의 어머니들은 아이가 7살이 되기 전에는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와 함께 놉니다.  아이의 놀이 파트너가 되어 줍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이를 호기심이 있게 하고 그 아이가 질문을 하게 합니다.  "왜 책상다리가 네 개야?"  "엄마, 왜 눈은 앞에 있는 거야?  뒤에 있지 않고..." 등등의 끝없이 질문을 하게 만들고 또 아이의 호기심이나 궁금증을 칭찬해 줍니다.

"엄마, 왜 책상다리가 네 개야?"  "아니! 네 개인 것을 봤니?  나는 못 봤는데..."가 아니라, "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하지도 마라. 그럼, 책상다리가 네 개지 두개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성급한 종지부를 찍지 말라는 말입니다.  아이의 독립적 성취를 보상하고 결코 아이의 실수를 비웃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이의 역할을 모델로 부드럽게 지원적인 격려를 해야 됩니다.  어머니가 아이의 놀이 파트너가 되어 부드럽게 놀아준 여인의 아이 속에서 창의적인 사람이 나옵니다.

'진작 좀 들었을걸...'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 때가 제일 빠른 때입니다.  이제부터 하면 됩니다.  아직도 깨닫고 나면 하나님은 충분한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복은 기회로 다시 환산되는 것입니다.

혹여, 여러분 가운데 닭을 길러본 경험이 있는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닭은 온 사방을 돌아다니다가도 알은 한 군데에서 낳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간혹 볏단 구석에 낳는 닭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볏단 구석에서 낳은 것은 부화시켜서 병아리를 얻는데는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닭은 알을 낳는 순간부터 품에 품는다고 합니다.  같은 알이지만 생명과 죽음이 구별되는 시간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볏단 구석에 낳은 알은 결정적인 시기에 어머의 품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정적인 시기를 놓치면 큰 일입니다.  같은 알이지만 어미 닭의 품에 계속 있었으면 병아리가 됐을 텐데, 밖에 두었다가 넣은 것은 병아리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하는 얘기는 바로 똑 같은 표현입니다.  모든 생명체가 있지만 어미 닭이 알을 품듯, 꼭 품고 있으면, 계속 그 품안에만 있으면, 삐약! 삐약! 생명이 되어 나옵니다.  그러나 품기지 않으면 生과 死의 결정적인 순간에 죽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나온 한 해를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힘든 세월이었습니까?  그러나 아직도 종지부를 찍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혼돈과 흑암과 공허가 내게 산 같이 밀려오고 파도같이 마구 밀려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신만 운행하시면 생명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십니다.  "빛이 있으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든 것이 좋았더라"  죽음과 생명의 갈림길에 있다고 할지라도, 쓰고 못쓰는 판단의 마지막 기점에 와 있다고 할지라도, 어미 닭이 그 알을 품으면 생명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나를 품어 주시면 새로운 삶의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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