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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주인을 기다리는 종 처럼 ... (눅 12: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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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을 기다리는 종 처럼 ... (눅 12:35-40)

인간은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그리고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려서는 아빠를 기다리고, 청소년 때에는 이성 친구를, 결혼해서는 아이를, 나이 들어서는 행복을, 늙어서는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은 자각하고 있을 뿐이고 어떤 이는 무의식적으로 기다릴 뿐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참 지루하고도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기다림의 대상을 만나면 우리는 만족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빈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 동안의 지루함과 괴로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오히려 기다림의 지루했던 순간들을 아름다운 과거로 자랑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36절의 말씀은 아주 짧은 한 구절이지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어떤 집 주인이 혼인집에 초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친구의 아들의 혼인인지 그저 동네 사람의 혼인 잔치인지 어떤 친척의 혼인 잔치인지 알 수는 없지만 혼인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대개 한 밤중에 거행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손님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새벽 2시 정도를 지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잔치의 여흥에 따라 그 시간은 더 길어 질수도 있습니다.
집 주인은 잔치 집에 가기에 앞서 종들에게 단단히 일러둡니다
.
내가 돌아올 때 까지 문단속 잘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돌아오면 문을 열어달라고 말입니다. 그러기에 종들은 주인이 돌아올 때 까지 잠자리에 들 수 없습니다. 주인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언제 돌아온다는 약속도 없이 무한정 주인이 올 때 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열어주고 주인이 잠자리에 든 후에 자신도 잠을 자는 것이 종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하나의 의미 없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옛날 유대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이 이야기를 주님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연결을 시켜주고 계십니다. 36절 마지막에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이 말이 바로 그 연결점입니다.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종들의 모습을 통해서 이 시대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1. 재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혼인집에 간 주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다시 오시는 재림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주인은 혼인집 잔치에 참석하러 갔기 때문에 길어도 그 날을 넘기지 않고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기독교가 2천년 동안 재림을 외쳤지만 아직도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허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약속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옛날 5백여 갈릴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너희가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 라고 선포하셨던 그 말씀은 지금도 살아있으며 유효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재림에 대한 주님 자신의 언급은 성경에서 여러 번 반복됩니다.
(마24: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의 시간으로 많은 시간이 흘러가서 재림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주님의 시간으로는 잠시 잠간입니다. 그래서 히10:37절에서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이 주의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더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택한 백성들 중에 최후의 한 사람 까지 복음을 듣고 구원 얻을 때를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의 인내” 인 것입니다. 그것은 벧후3:9절에서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혼인집에 간 주인이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 처럼 주님은 이 땅에 다시 오실것입니다.

2. 준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싶으신 두 번째 말씀은 재림을 어떻게 준비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허리에 띠를 띠고 ....
허리에 띠를 띠고 있는 것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옷은 길고 통이 넓어 여행할 때나 활동할 때 허리에 띠를 매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활동이 자연 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일할 수 있는 준비의 자세를 갖추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오실 때 우리는 어떤 자세로 있어야 하겠습니까?
허리에 띠를 띠고 있는 종의 모습으로 있어야 합니다. 주인이 오기도 전에 잠옷으로 갈아입고 잠자다가 주인을 맞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일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허리띠를 매고 일하고 있다면 하던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신학교에서 한 시간의 수업이 마쳐지고 쉬는 시간에 교수가 몇 사람의 학생들에게 “예수님이 30분 후에 오신 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라고 질문 했습니다.
첫 번째 학생이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급히 집으로 가겠습니다. 가서 믿지 않는 부모님께 전도하겠습니다”
두 번째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며칠 전 다툰 친구를 찾아가겠습니다. 그와 화해를 하겠습니다.
세 번째 학생이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지금은 쉬는 시간이니 아무생각도 않고 쉬겠습니다”

여러분 누가 교수로부터 칭찬을 받았겠습니까?
세 학생 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부모님 전도는 평소에 했어야했습니다. 또 다툰 친구와의 화해는 그 즉시, 그 날 해가 지기 전에 했어야 했습니다. 결국 세 번째 학생이 칭찬을 받았습니다. 허리띠를 동여매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다 보면 주님이 지금 오신다고 해고 당황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허리에 띠를 띱시다. 그리고 주님을 기다립시다.

둘째는 등불을 밝히고....
등불을 밝히는 것은 어두운 동안에도 활동할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이 오실 때에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닥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즉 외부적으로 여러 가지 핍박과 시련이 있고 내부적인 갈등과 회의가 먹구름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을 찾을 수가 없게 되어 집니다.
신앙인 인지 종교인인지 구별이 안 되게 됩니다. 그래서 눅 18:8절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참 믿음의 사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도는 복음의 말씀의 등불을 들고 어둠을 밝히는 등불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재림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등불을 밝힐 수 있습니까?
세례 요한은 초림하시는 주님의 앞길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주님의 앞길에 등불을 밝혔습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이 등불을 들고 나가야 합니다.
등불 들고 기다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빛 예수를 빛내는 것이 등불 들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착한 행실로 주님의 등불을 밝힙시다. 착한 행실은 나누어주고 베푸는 것입니다.

노벨 평화상을 탄 테레샤 수녀가 하루는 상처 난 아이들의 곪은 데를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일하던 한 사람이 다가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잘 사는 사람이나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 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지 않습니까? 시기심은 생기지 않습니까?”
그 때 테레사 수녀가 유명한 말을 하엿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는 매일 아침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주여 당신께서는 이 비참한 세상에 사시는 33년 동안 충분히 우셨어요. 그러니 오늘은 쉬세요. 오늘은 제가 주님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고 제가 주님을 대신하여 가서 울고 오겠습니다.”
그는 정말 주님을 대신하여 울었고 낮은 자들을 섬겼습니다. 이것이 정말로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밝혀야할 등불이 아닐까요?

셋째는 깨어 있음으로 ..
본문에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서있는 것과 깨어 있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종은 언제라도 주인이 돌아오면 문열어줄 만반의 준비를 다한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긴장 상태를 말합니다. 군인은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군대에 말부터 다릅니다. 긴장된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걷는 모습이나 앉아있는 모습에 긴장이 있습니다. 절도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에도 군인 정신이 필요합니다.
군인정신이 헤이 해지고 나태해지면 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군인정신이 투철하면 무기가 부족하고 소수라고 하여도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는 법입니다. 40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입니다. 생각지 않고 있는 시간에 주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긴장하여 서 있는 사람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사람 즉 영적 긴장이 풀어진 사람은 주님을 맞을 수 없습니다. 신앙인의 모습을 성경은 언제나 대칭구조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곡식과 가라지
알곡과 쭉정이
양과 염소
왼편과 오른편

그러니까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알곡이든지 쭉정이든지 입니다, 곡식이든지 가라지든지 입니다. 양이든지 염소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최근 정통 기독교 교회를 가장한 이단과 사이비 기독교단체들의 활동이 아주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만희 씨를 교주로 하는 단체의 활동은 아주 조직적이며 대규모 적입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전주지역에만 3천여 명의 특공대를 풀어서 정상적인 교회 생활을 하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포섭작전을 한다고 합니다. 최근 5만여 명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이 단체에 빠져있습니다. 참고 동영상을 한편 보겠습니다.
(참고 동영상...추수꾼)

여러분 어떻습니까?
서 있으라는 것은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벧전 5: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 24:24절에 의하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깨어 있는, 즉 서서 기다리는 종의 자세가 되었습니까?

3. 기다리는 마음

그러므로 이 시대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기다리는 마음은 영적으로 신앙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첫째, 기다리는 마음은 가난한 마음입니다.
가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기다리는 마음이야말로 겸손한 마음입니다. 겸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빈 마음입니다. 배부른 자, 마음이 교만한 자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소유에 만족해 할 뿐입니다. 그런데 과연 기다리지 않아도 될 만큼 배부른 사람이 있을까요? 다만 스스로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기다리는 마음은 집중하는 마음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다른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다리는 일을 할 뿐입니다. 혹 다른 일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모든 신경은 그 한 가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기다렸던 일이 이루어질 징조가 감각의 레이더에 나타나면 그는 언제든지 하던 일을 포기하고 그리로 달려갑니다. 그러므로 기다리는 자는 늘 깨어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셋째, 기다리는 마음은 준비하는 마음입니다.
기다리며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얼굴의 화장을 다시 고치고 할 말을 준비합니다.
오는 행복보다 그 행복을 담을 그릇을 준비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 것이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다림은 사랑이며 정성입니다.

어떤 시인은 기다림 없는 사랑은 무늬 없는 바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랑과 정성이 부족한 기다림의 결과는 비극적입니다. 정작 왔지만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해 날려 버리는 은혜가 얼마나 많은가요? 또 임할 행복에 어울리지 않는 그릇을 준비하여 둘 다 못 쓰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오늘 날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다림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가난하지 않습니다. 너무 많은 것들로 배불러서 예수님의 재림에 배고프지 않습니다. 기다림에 배고픈 사람들이 됩시다.

저는 주님의 재림에 관하여 네 가지의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1)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2) 그러나 우리는 그 때를 알 수가 없습니다.
3) 우리는 오실 그분을 만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4) 언제든지 주님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인을 기다리는 종처럼 주님을 기다립시다. “가시면서 다시 오마” 라고 하신 예수님은 분명 우리에게로 다시 오십니다.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24:44)
기다리는 마음을 잃지 맙시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는 띠를 띠고 기다립시다.
등불을 밝히고 주님을 기다립시다.
서서 긴장하고 주님을 기다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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