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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여호와를 기억하라 (시 1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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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기억하라 (시 103:1~5)

1. 여호와를 기억하라

  지중해 한 가운데에서 이탈리아 어부들이 바다에 빠져 표류하는 한 남자를 건져냈습니다. 끌어올려 보니, 두 발의 총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총알을 꺼내자,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기억 상실증에 걸려 있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소지품을 살펴보니, 가명으로 만들어진 여러 개의 여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혼란스러웠습니다. 곧 영문을 모른 채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놀라운 무술 실력과 사격과 운전 등 예상치 않은 능력이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바로 영화 ‘본  아이덴티티’의 줄거리입니다. 음모에 휩싸인 미국 CIA 요원이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리면, 결국 자기를 잃어버리는구나!

  어느 날, 교회 근처에서 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여기가 어디여?” 할머니는 자기 집을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 옆에 교회 십자가가 있었는데.” 경찰에 연락해서 모셔 가게 했습니다. 노인들이 무슨 병을 가장 두려워할까요? 암? 아닙니다. 치매를 가장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기억을 잃는 치매가 더 두렵다는 것이지요.

  기억은 개인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에게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왜곡하는 일도 많고, 역사를 지키기 위한 노력도 많습니다. 1920년대 우리 나라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우리 역사를 지키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박은식 선생은 [한국통사]를 썼고,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를 썼습니다. 왜요? 나라의 역사를 기억하게 함으로써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인에 대한 기억이나 나라의 역사에 대한 기억보다 더 중요한 기억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기억입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라”(전 12:1).

  올 한 해 얼마나 효도를 많이 하셨습니까? 효도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효도란 자식이 부모를 잊지 말고 기억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저는 어머니에 대해 불만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옷 장사를 해서, 자주 시내 도매상에 물건을 떼러 갔습니다. 저도 어머니를 돕기 위해 같이 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 불만이었습니다. ‘왜 어머니는 나에게 자장면을 안 사주실까?’ 얼마 전에 어머니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왜 자장면 하나 안 사주셨어요?” 그 때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버스가 돌아오기 전에 물건을 떼고 돌아와야 해서 그랬다.” 그래서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시장에서 저에게 뭐 사주신 것 없나요?” “빵과 사이다를 사 주었지.” 그 때 저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아뿔사, 왜 나는 엄마가 빵과 사이다를 사 준 것을 기억을 못하는 것일까?’ 효도는 부모의 은혜를 기억하는 만큼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지 못하면, 효도할 리가 없겠지요. 그러나 ‘어머니, 아버지가 이렇게 해 주셨지!’ 하고 그 은혜를 기억하면, 하지 말래도 효도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는 부모의 자녀이지만, 영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부모의 은혜를 기억해야 효도를 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신앙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볼 때, 자연 종교와 사변 종교가 있습니다. 자연 종교는 자연의 위력에 놀라, 자연과 그 안에 있는 영들을 섬기는 종교입니다. 샤머니즘이 이에 해당됩니다. 또 사변 종교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 속에서 영원한 진리를 깨달으려고 하는 종교입니다. 불교가 이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우리 성경의 기독교는 자연 종교나 사변 종교가 아니라, 역사의 종교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이 시간 속에서 인간을 구원한 역사를 체험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역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역사에 대한 기억을 신앙의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개인의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도 기가 막히고, 나라의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도 통탄할 일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은 정말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영원의 차원에서 생과 사를 가르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2. 여호와를 기억하는 것은 여호와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benefits)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그 혜택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은혜를 잊으면 배은망덕한 자식이 되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배은망덕한 신자가 됩니다.

  오늘 말씀은 특별히 구체적으로 여호와의 다섯 가지 은혜를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둘째, 병 고침의 은혜입니다. 셋째, 파멸의 구렁텅이(함정)에서 건져주신 은혜입니다. 넷째, 인자(헤세드)와 긍휼을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다섯째, 소원을 들어주시고 건강하게 해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오늘 2007년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올 한 해 어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잘 기억나지 않으시면, 이 말씀에 올 한 해의 삶을 대입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올 해 어떤 죄를 용서받으셨습니까? 어떤 병을 고침 받으셨습니까? 이제는 정말 죽었다 싶은 수렁에서 건짐 받은 일은 없습니까? 남들이 무슨 비난을 해도 감수해야 할 상황인데, 하나님이 관대하게 보아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일은 없으셨습니까? 올 한 해, 하나님이 어떤 소원을 들어주시고 어떤 건강을 주셨나요?

  그러고 보니 하나님의 은혜 아닌 일이 어디 있겠나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그리스인들에게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7-28)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다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 여기까지 움직여 온 것도 다 하나님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 분 아니고 숨이나 쉬고 살 수 있겠습니까?


3. 여호와의 은혜를 기억하면,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그것은 바로 여호와가 베푸신 은혜를 기억해야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레노바레’ 성경이 나왔습니다. 리차드 포스터라는 미국의 영성 신학자를 중심으로 편찬한 성경책입니다. 레노바레 성경은 그 서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 주제는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The with-God Life)이다. 맞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 함께 하는 삶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은 알겠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부재’ 현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안 느껴진다고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으시면, 우리도 이미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하나님은 바로 옆에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느껴진다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성품을 개발하기 위해, 하나님의 임재를 잠시 거두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 보여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의 영성을 키우시기 위해 그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다시 돌아오십니다.

  딸을 키우며 많은 것을 배웁니다. 14개월이 되니, 이제 곧장 잘 걷습니다.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아주 귀엽습니다. 넘어져도 또 일어나 걷습니다. 집 이 구석 주 구석을 돌아다닙니다. 온갖 말질을 다 시킵니다. 가끔은 제가 보이지 않는 곳에 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항상 아이를 보고 있습니다. 애가 안 보여도 뭐 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 곳이 위험한 곳이면 미리 가서 위험한 물건을 치워놓습니다. 아이는 나를 못 봐도 나는 아이를 다 보고 있습니다. 얼마 있으면 아이는 다시 저에게 옵니다. 와서 좀 칭얼대고 비벼대다가 다시 집안을 돌아다닙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애착 행동과 탐구 행동의 반복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체의 아버지인 저도 아이를 그렇게 돌봅니다. 그러면 우리 하늘 아버지는 어떻게 우리를 돌보시겠습니까? 가끔 여러분이 하나님을 떠나시겠지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잊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놓치는 적도 없고 우리를 잊을 리도 없습니다.

  2007년 마지막 주일을 맞아, 여러분에게 세 가지 하나님의 모습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먼저, ‘에벤에셀’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최후의 사사(판관)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의 일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미스바로 불러 모으고, 여호와께 범죄한 것을 회개시켰습니다. 블레셋이 기회다 싶어서 쳐들어왔습니다. 사무엘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큰 우레(천둥)를 치게 했습니다. 이에 블레셋 사람은 머리가 어지러워 혼란에 빠지고,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사무엘은 이 전쟁에 대한 승리의 기념으로 돌을 하나 세우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삼상 7:12)이라고 불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를 도우신 분입니다. 2007년을 보내며, 이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다음, ‘임마누엘’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사자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하나님은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 ‘여호와삼마’의 하나님입니다. 에스겔이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중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아직 예루살렘이 멸망하지 않았으나,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망한 후 14년 후, 에스겔은 다시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오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삼마’라는 예루살렘 성읍의 이름을 받았습니다. 바로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겔 48:35)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장차 거기에 계시어 우리와 함께 하실 여호와삼마의 하나님이십니다.

  2007년이 저물어 갑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많은 한 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것을 고백할 때, 올 한 해는 참으로 감사한 한 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 올 한 해 지금까지 나와 함께 있어 나를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지금 바로 여기서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여호와삼마의 하나님, 2008년에도 거기에 계시어 나와 함께 하실 하나님을 기대합시다.

  2007년의 해가 지면, 2008년의 해가 뜰 것입니다. 해는 바뀌었으나, 태양은 계속 뜰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태양이 그러하다면, 창조주이신 우리 하나님은 더 하실 것입니다. 올 한 해, 지금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우리와 함께 하셨듯이, 내년에도 그렇게 하실 것을 믿어드립시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과 함께, 2007년을 보내고 2008년을 선물로 받으십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곳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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