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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영혼의 닻 (히 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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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닻 (히 6:13-20)

  해상전투가 육상전투와 다른 점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퇴로가 없다는 점입니다.
  육지에서는 자기 부대가 패전해도 각개 병사가 도망칠 길은 남아 있지만, 바다 위에서는 자기가 타고 있는 배의 갑판만이 발을 디딜 수 있는 유일한 '땅'이 됩니다.
  그러니 일단 함정이 침몰하게 되면 그 배의 수병들은 바다에 뛰어들어서 적군이든지 아군이든지 간에 다른 배가 발견해서 구출해 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저 구명복을 입고 물 위에 떠 있기만 하면 언젠가는 구출될 것이라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선 구원선이 오기까지 바닷물 속에서 추위와 허기와 싸우며 밤을 새기도 해야 했고 그런 식으로 며칠 씩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또 그처럼 기다리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파선되었던 위치로부터 여기저기 흩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다른 배가 찾아온다 할지라도 망망대해에서 사람 머리 하나만 떠 있는 것을 발견해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도 수많은 함정들이 침몰했고 수많은 구출작업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특기할만한 점은 나이 많은 수병들이 육체적으로 훨씬 더 건강한 젊은 수병들보다 구출되는 확률이 더 높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일본 수병들 중에는 중년에 들어선 보충병들도 많았는데, 일단 배가 침몰하게 되면 그런 사람들은 의외로 잘 견디어내고 나중에 구출되었지만 오히려 나이 젊은 수병들은 구원선이 왔을 때 이미 죽어 있을 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순전히 심리적 조건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나이 든 수병들은 파선을 당해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버텨낸 반면에 젊은이들은 일찍 절망에 사로잡혀서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져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하여 희망을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이처럼 꼭 같은 역경을 만나도 생과 사로 나누어지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었습니다.

  다사다난했던 2007년이 저물어가면서 이제 연종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올 한 해 동안에도 우리 각자 개인의 삶을 통해서는 이루어진 것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성취되고 축복 받은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감사드림으로써 유종지미를 만들어야 함이 당연하고,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결코 낙심하지 말고 새해를 통하여 응답받을 수 있도록 새로운 소망을 붙잡아야 할 시점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있는 히브리서 6장 11절과 12절에서도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 되라고 명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뜻에서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게 되는 풍성한 소망'을 지키는 생활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인내'를 통하여서만이 소망 중에 기다린 약속의 기업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 13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이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데, 기록하기를 "13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15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흔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소망의 조상 이삭, 사랑의 조상 야곱'이라는 말을 합니다만, 사실에 있어서는 아브라함이야말로 믿음의 조상인 동시에 또한 소망의 조상이라 불리어도 조금도 모자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제일 처음 받았을 때에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이삭의 출생을 통하여 성취될 때까지는 무려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던 것이며 그 기간 동안 아브라함에게 요구된 것이 바로 '인내'였습니다.

  사실 그 세월이 너무 오래 걸렸던 까닭에 아브라함 자신도 흔들렸던 때가 없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데리고 있던 종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삼을까 생각도 해 보았으며, 기다리다 지쳐서 하갈이라는 첩을 두고 그를 통해 서자(庶子) 이스마엘을 얻기까지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약속을 재확인시켜 주셨으며, 결국에는 모든 소망이 끊어진 듯이 보였던 100세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에 이삭을 낳게 되는 소망의 성취를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인내는 거기서 끝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테스트가 주어졌을 때에도 그는 또 한 번의 인내를 발휘했습니다.
  일단 성취된 소망을 다시 포기하라는 하나님의 모순된 듯한 명령을 듣고서도, 그는 아마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 주실 것'이라고 나름대로 믿으면서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 18절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라고, 즉 '소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소망했다.'라고 칭찬한 것입니다.
  실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인 동시에 소망의 사람이었으며, 그 소망을 이루기까지 극단적인 인내를 발휘했던 것이었습니다.

  정말 소망에 풍성한 사람은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까지 인내에서도 풍성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25년 아니라 혹 평생을 기다리게 하셔도 끝까지 참고 끝까지 바라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혹 소망을 조금씩 이루어 주시는 것 같다가 갑자기 도로 빼앗아 가는 듯이 보이는 순간에조차 절대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떤 축복을 우리에게 "약속하실 때에"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시면서"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번성케 하겠다"고 약속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보증 서 줄만한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는 까닭에 항상 당신 자신을 보증인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장 크신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복 주고 번성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시는데 그것이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는 좀 더 걸린다고 해서 부도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업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하나님 앞에서 "왜 아직도 축복해 주시지 않으시나?"하고 함부로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막 어린이 새소식반 첫 학기를 마쳐놓고서 "왜 우리 교구 새소식반을 통해서는 전도의 열매가 아직 나오지 않는 것일까?"하고 지레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불신 남편을 전도하고자 노력해 온 것이 십 년, 이십 년이 지났다 할지라도, 난치의 지병이 있는 자식이나 부모를 위해 평생을 기도해 왔지만 아무 응답이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아직 포기할 때는 결코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야말로 저와 여러분이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는' 소망을 계속 지켜야만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조금 잘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다가 갑자기 망하게 될 때, 조금 풍성해지는 것처럼 보이다가 또 한 번 밑바닥으로 내려앉게 될 때에도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내가 너를 반드시 복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절대로 잊거나 어기실 수가 없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소망하는 성도는 오직 '오래 참음'으로써 그 약속들을 성취 받게 되는 줄을 깨닫고 또한 그런 소망 끝에 반드시 누리게 되는 기업 역시 꼭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믿음'을 통해서만이 그 어떤 어려움 중에도 소망을 끝까지 지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소망은 믿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16절 이하 18절 말씀에 "16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17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16절은 당시의 법정에서 행하던 관례를 배경으로 한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은 맹세할 때에 "자기보다 큰 자" 즉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거나 혹은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 예를 들면 하늘이나 성전 또는 예루살렘 등을 두고 맹세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법정에서 원고나 피고나 증인들이 그처럼 맹세를 하고 증언하면, 바로 그 증언의 내용에 따라서 모든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본문에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라는 말씀이 바로 '맹세하고 증언한 말들은 모든 법정 시비에 대하여 최종 판결을 내리는 기본이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 맹세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또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도 했습니다.
  17절에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약속을 사람에게 주실 때에 그 확실성을 재삼 다지기 위하여 바로 그런 법정 증언의 형식까지 빌어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맹세를 해도 법정의 최종 판결을 결정지을 만큼 엄중한 것인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맹세하셨다면 그 약속의 확실성이 오죽하겠느냐는 것이 본문의 논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18절에 기록된 대로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이 우리에게 소망의 근거로 주어졌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약속 그 자체가 변치 못할 첫 번째 사실이며, 그 약속에 대하여 보증하신 맹세 이것이 그 두 번째인 것입니다.
  사실 이 두 번째 것은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을 가리켜 "당신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하신 것처럼, 결코 변치 못할 하나님의 말씀 그것만으로도 이미 그 약속을 확실한 것으로 믿게 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 사람과는 달리 당신의 약속에 대하여 따로 맹세 같은 것을 하실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 맹세를 하자니 하나님 당신보다 더 크신 이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신 스스로를 두고 맹세하실 수밖에 없는 희한한 맹세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처럼 꼭 필요하지도 않는 맹세를 당신의 약속에다 덧붙여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어찌하든지 우리로 하여금 그 약속을 믿고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18하반절에서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라는 말은 '이 두 가지에 의지해서'라는 뜻이며,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이라는 말은 '소망 안으로 피하여 가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당신의 약속의 신실성에 대하여 우리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있을 만큼 최대로 다 보여 주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들이 그 약속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철저히 의지하고 살아갈 것을 촉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12절에서도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은" 그 약속을 "오래 참음"과 동시에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고 말씀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과 그 맹세하시는 성품의 신실성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 바로 이것이 '믿음을 통하여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길이며, 역시 아브라함이 또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본이기도 합니다.

  잘 믿는 사람은 반드시 큰 소망을 품게 되어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며, 또한 소망을 지켜나가면 그 믿음 역시 더욱 든든히 서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절망하고 금세 낙심한다면 곧 우리 자신이 믿음 없는 사람인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망 없는 사람이란 분명히 우리에게 소망의 약속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며, 그 약속을 맹세로 보증까지 해 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전혀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사업에서 실패를 해도 그 아내가 "여보, 그래도 저는 당신을 믿어요."라고 말해 줄 때 그런 아내를 향한 남편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정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성공해서 그처럼 자기를 믿어 주는 아내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을 것이며, 이처럼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서 서로 믿어 주는 부부의 앞날에는 반드시 희망이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당신의 자녀를 향한 선한 뜻이 결코 변치 아니하시고 그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실 수 있는 전능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보유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미래에야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진실한 믿음의 사람은 필연적으로 소망의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믿음이 소망을 낳고 그 소망이 또한 그 믿음을 더욱 든든히 세워주는 은혜를 꼭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소망의 최고 풍성한 은혜인 천당구원을 누리게 됩니다.

  소망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19절과 20절에 기록하기를 "19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20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의 소망은 닻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닻은 해저에 박혀져서 배를 고정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장비입니다.
  이 '닻'이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신약에서만 네 번 나오는데, 한 번은 본문에서이고 다른 세 번은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가던 중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던 사건에서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대체적으로 바다를 싫어했습니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육로에 비해서는 훨씬 더 위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그런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 있어서 닻이란 예나 지금이나 필수적인 장비가 됩니다.
  비록 닻 그 자체는 물밑에 내려져서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만 바로 박혀 있으면 비록 바다 위에 바람과 물결이 몰아친다 해도 배는 떠내려가지 않고 "튼튼하고 견고하게" 즉 '안전하고 확실하게' 제자리를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도 닻이 물속에 들어가서 감취어지는 모습을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휘장 안에 들어가신" 모습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번 들어갈 수 있었던 성소의 휘장 안쪽은 곧 지성소라 불린 곳으로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바로 그 하나님의 지성소 안으로 들이시기 위하여 자신이 먼저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셔서 그 지성소에 당신의 보혈을 뿌리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휘장 안의 지성소,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신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비록 물밑에 잠긴 닻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보이지 아니하는 천당을 우리의 확고부동한 최고의 소망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천당구원의 소망이야말로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최고로 '튼튼하고 견고한 닻,' 가장 '안전하고도 확실한 소망'인 것입니다.
  또한 현실적으로는, 바로 그 천당구원의 소망을 교회중심으로 확고부동하게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교회야말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상의 보좌이며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통하여 지성소의 시은좌까지 이끌어 들이는 구원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우리가 이런 소망의 닻만 분명히 내리고 있으면 흔들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예외가 없이 우리 모두의 인생 항해에는 이런저런 잔물결과 큰 풍랑들이 부딪혀옵니다.
  사업 때문에 휘청거릴 때도 있고 진학의 실패가 나를 흔들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가족 간의 불화가 내 인생을 표류하게 만들기도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낙심이나 불안 때문에 스스로 떠내려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인생의 바다 위에서 그런 바람과 파도가 몰아쳐 온다 해도, 우리 영혼의 닻만 정확하게 내려져 있으면 아무 문제도 있을 리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야 어떤 때에는 좀 속상한 일도 당하고 좀 아픈 맛 쓴 맛 다 볼 때도 생기고 좀 실패를 겪을 때도 있지만,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나의 내세는 저 천국에서 우리 주님과 영원히 살게 될 것을 확실히 소망하는 이 '튼튼하고 견고한 닻'만 박혀 있으면, 절대로 그 인생이 잘못된 곳으로 떠내려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당구원을 확실히 붙잡고 있는 성도들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떻게 감당하며 도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소망의 닻은 오직 교회중심으로 신앙생활함으로써만 든든히 내릴 수 있습니다.
  교회의 강단 아닌 다른 어느 곳에서 우리에게 이런 구원의 복음을 선포해 줍니까?
  교회의 성도 아닌 다른 어떤 사람들과 이런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며 교제할 수 있습니까?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그 어떤 성인이나 교주가 당신의 몸을 우리 위해 대신 희생제물로 바치신 놀랍고도 고마우신 대제사장이 되어 주셨습니까?
  실로 교회만이 이 세상에서 우리 '영혼의 닻'을 내릴만한 가장 안전한 포구인 것입니다.
  이 소망 중의 소망, 성도의 최고 최대의 소망, 우리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휘장을 찢으심으로써 길을 열어 놓으신 이 천당구원 소망의 닻을 바로 이 지상의 성소인 교회에 깊이 박아 놓음으로써 그 어떤 환난과 시험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끝내 그 소망의 저편에 함께 도달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대로 신자에게 있어서 소망이란 믿음과 사랑과 꼭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의 필수요건 중에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은 '믿음'이나 '사랑'만큼은 중요시되지 못하고 간과되어질 때가 적지 않습니다.
  물론 잘못된 것입니다.

  O. 헨리의 유명한 단편소설인 '마지막 잎새'를 읽어 보면, 폐렴에 걸린 존시라는 화가 지망생 여자가 삶에 대하여 완전 포기하고 그저 창밖에 보이는 담쟁이덩굴의 남아 있는 잎만 세면서 그 마지막 잎이 떨어지는 날 자기도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디어 정말 그 담쟁이덩굴의 잎이 딱 하나만 남게 되었는데 그날 밤 세찬 비바람까지 몰아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존시가 창밖을 바라보니 그 잎새는 떨어지지 않고 여전히 달려 있었고 그 다음날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을 보고 존시는 자기 생명을 포기하려던 마음을 고쳐먹고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게 되며 결국 완쾌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마지막 잎새는 그녀의 아파트 아래층에 살던 늙은 화가 베어먼이 존시를 위해서 바로 그 폭풍우 치던 날 밤에 담벼락에 직접 그려 넣은 그림이었습니다.
  베어먼 자신은 바로 그날 밤에 병에 걸려 죽게 되는데, 그가 그린 그 담쟁이 잎새 하나가 존시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고 결국 그녀를 살려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에게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극단적인 차이까지 유발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통하여 천당 약속의 소망을 새겨 주시고 대신 죽으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기독신자들은 '희망'보다도 더 좋은 '소망'을 보유하게 된 것입니다.
  '희망'이라고 할 때에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는 불안이 약간 내포되어 있지만,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만 쓸 수 있는 말인 것입니다.
  오직 인내가 있어야만 그 소망 중에 기다린 약속의 기업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만 그 풍성한 소망을 끝까지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서 최고의 소망이란 바로 천당영생 외에 어떤 것도 될 수 없으며, 이런 소망을 전파하고 나누고 간직하게 해 주는 것은 교회중심의 신앙생활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소망이 기독신자들의 '기업'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즉 이 소망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성도에게는 최고의 기업입니다.
  돈이 최고의 재산이고 회사가 물려주고 물려받을 수 있는 유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복 주고 번성케 하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이야말로 최고의 귀중한 재산이요 가장 값진 기업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소망이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 '영혼의 닻'이 되어서 우리의 인생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확실하게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 자기 인생의 닻을 잘못 엉뚱한 곳에 내리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나야 똑똑하고 돈 잘 버는 자식이 있으니 이 자식이 있는 한에는 나는 아무 걱정 없네.'라고, 자식을 자기 인생을 끝까지 안정시켜 주는 닻으로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부부야 교회 헌금 안 하고 꼭꼭 저금해 둔 돈이 있으니 세상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이 돈만 있으면 안심일세.'라고, 재물을 자기 여생을 보장해 주는 닻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믿고 살다가는 그런 닻들 정도는 한 순간에 간단하게 뽑아버릴 인생의 큰 풍랑이 닥치게 될 때 꼼짝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의 닻, 영혼의 닻을 내릴 곳은 단 한 곳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열어 주신 휘장 안의 지성소, 저 소망의 천국에 이르기까지 바로 이 교회를 중심으로 말씀의 성취를 인내로 기다리며 믿음으로써 그 소망을 더욱 굳건히 지키는 가운데 이 '확실한 약속'을 저 '풍성한 기업'으로써 다가오는 새해와 우리의 남은 금세에서 또한 내세에서까지 반드시 함께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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