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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의 현장을 하나님의 나라로 (롬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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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롬 14 : 17
제 목 : 삶의 현장을 하나님의 나라로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열심을 내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거룩한 비전을 가지고, 이를 위해 기도하며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재능과  은사를 발휘해 평신도 선교사를 꿈꾼다던지, 아니면 장래에 아주 큰 비전을 놓고 기도로 준비하는 성도들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참 도전이 되고, 또 귀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는 아니겠습니다만, 대체로 보면, 이들이 가진 하나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지금 자신이 속한 삶의 현장에서, 자꾸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비전을 위해, 지금 현재의 삶을 포기하고, 속히 정리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참으로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어떤 일을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하던 일을 중단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일에 전념할 수 있고, 그 일이 또한 진척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새로운 일을 당장에 시작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지금 하는 일에 대해서 포기하고, 중단하는 모습은, 분명 잘못되어진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결코, 신앙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장래에 선교사에 대한 꿈과 비전이 있다고 해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중단하고, 그 일을 위한 기도에만 전념하면, 하나님이 과연 그 신앙을  기뻐하시겠습니까?  또 내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고, 그 일에 전념하겠다고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가정생활은 내 몰라라 하고, 남편도  아내도, 자식들도 잘 돌보지 않고, 교회 일에만 전념하겠다고 한다면, 과연  그 신앙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열심이 특심인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나중을 위해 현재를 포기하고, 큰일을 위해 작은 일을 포기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결코 신앙적이지 못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아멘!!!  주님은 누구를 칭찬하고 있습니까?  누구를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고 있습니까?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 다시 말해, 현재 맡고 있는 직분과 일에 충성하는 자, 그리고 자신이 처한 위치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 이런 성도들을, 주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성도들을 주님은 축복해 주시는데, 많은 것을 그에게 맡기셔서,  장래에 더 큰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히 11 :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실상도, 현재의 삶에 충성되고,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이루는 것이지, 장래의 비전에 대한 꿈만 꾸고, 기도만 하는 성도들에게는, 신앙이 없는 자와 같이, 그 비전은 결국 허상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성도들의 신앙에 있어,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지금 현재,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삶의 현장이, 곧 비전을 이루는 거룩한 사역이요, 선교지라는 의식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 어디입니까?  삶의 현장입니다. 
학생은 캠퍼스고, 직장인들은 직장이고, 주부들은 가정이 바로 삶의 현장인 것입니다.  먼저 그곳에 있는 불신자들과 부딪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곳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나가고,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를 크게 들어 사용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선교사로 보내시지 않습니다. 과정이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삶의 현장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고, 먼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삶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 목사님이, 자신이 섬기는 교회를 소개하는 영상자료를, 새로 초청되어 온 분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동영상을 보니까, 처음에 소개 되는 장면이, 교회 건물이나,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작 장면부터, 월요일에 출근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그들이 일터에서 어떻게 일하는지를, 계속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렇게 5일 동안 열심히 현장에서 일하다가, 주일에 모여서이와 같은 모습으로 예배한다고 하면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나, 초청되어 온 사람들이, 교회를 소개하는 그 동영상을 보고서는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전에 없던, 신선한 충격이었다는 겁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생각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웅장한 교회의 건물이 아니라, 그 속에서 신앙생활 하는, 교인들의 삶 자체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나라도, 우리가 예배드리는 예배당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일하는 직장과, 캠퍼스 현장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 이런 내용이 있잖아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멘!!!  하나님은 당신의 뜻이, 이 땅에서,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12 : 1절에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에 나오는, 우리 몸을 드리는 거룩한 산제사가 무엇입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이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생활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와, 주일이 지난 나머지 6일 동안의 삶이, 전혀 별개의 삶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주일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6일 동안을,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열매를 가지고, 다시금 주일날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일하는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을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바르게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정직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일을 하거나, 사업을 하다보면, 솔직히 하나님의 의보다는,  물질의 이익을 더 추구하게 됩니다.  물론 장사해서 이익을 남겨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의를 잃어  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청년들이나, 학생들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는데, 잘 모르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시험을 치는 친구는, 그 문제를 잘 아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받고 싶은 충동이 생깁니다.  또 그 친구가 도움을 안 주게 되면, 스스로가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되지요.  그럴 때 과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자립정신을 가지고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용기를 내어, 요약 정리한 내용을 한 번 더 확인해 봐야겠습니까?  이를 가리켜 우리는 컨닝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예전에 시험 볼 때 컨닝을 한번쯤은 해 보았을 줄 안다.  안 했다면 여러분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의지의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사실은 컨닝한 경험이 있거든요.  물론 고등학교 이전의 때입니다. 
시험 문제가 좀 어려울 때는, 친구의 도움을 직간접적으로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저는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친구를, 잘 두어야겠다.  친구도 친구 나름이구나.”  별로 도움이 안 돼요!!

한번은 이런 문제가 나왔습니다.  음악 시험이었는데, 문제가 뭐였냐고 하면,  19세기 체코의 유명한 작곡가 이름이 무엇인가?  라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답이 생각이 안 나는 겁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친구 놈은  답을 어떻게 썼는가?  궁금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자식이 쓴 답을 보니까, “드보르” 라고 써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나도 “드보르” 라고 적었지요.

그런데 답이 무엇이었는가?  드보르가 아니라, “드보르작” 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따져 물었습니다.  “야 임마, 드보로가 뭐냐?” 
그랬더니, 이 친구가 하는 말이, 자기는 드보르가 이름이고, 그가 쓴 작품을  드보르 작이라고 하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듣고 보니, 또 그런 것도 같애요. 그런데 그 일 이후로, 저는 생각했습니다.  하여튼 친구를 잘 만나야 한다.  이런 놈은 평생 도움이 안 되는 친구구나.  저는 그 때부터 자립정신을 키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렸을 적에 이런 유혹에 한두 번쯤은 넘어간 적이 분명 있었을 줄 압니다.  어린 나이에 뭐 그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볼 때, 이런 행동이 어떠합니까? 
또 시골에 가면, 과수원이나, 과일 밭에 가서 서리를 하지 않습니까? 
수박을 서리해 오기도 하고, 복숭아나, 사과 같은 과일을 서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들을, 우리는 흔히 뭐라고 하며 감쌉니까?  관행이라는 겁니다.  전통이라는 겁니다.  좀 넘어 가줄 수 있는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신앙적으로 볼 때, 이런 행동들이 어떠합니까? 
분명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굳이 신앙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분명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불의한 일을, 예수를 믿고서도, 그것도 이제 나이 들어 어느 정도 신앙이 있는 학생들이나, 청년들, 또는 성도들이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직장생활을 할 때나, 개인적인 사업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이런 불의한 이익에 대한 도전과 유혹들이, 얼마나 많이 나타납니까? 
제 말이 무슨 말인지, 굳이 설명을 안 해도 잘 아실 줄로 압니다. 
이중장부를 쓴다든가, 또는 세금을 편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적게 낸다던가? 
이런 유의 일들이, 사실 많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요즘 연말이기 때문에, 연말 정산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것도 정당하게 하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우리 교회는,  이런 분들이 한 사람도 없는 줄 압니다.  저기 다른 교회들 이야깁니다.
어떤 분은 교회도 안 나오는데, 전도 목적으로 그 사람이 교회에 헌금했다고  증명서를 좀 떼 달라고 합니다.  전도는 좋지만, 방법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자녀들이 대학에 원서를 내야 하는데, 성적에 맞는 대학이  기독교 대학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학에 들어가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세례 증명서와, 교회 출석 증명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교회도 안 나오고, 세례도 받은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해 달랍니다.  사무원에게 이런 부탁하는 것은 그래도 좀 봐 줄만 합니다.  더 심한 경우는, 담임 목사님 추천서를  허위로 좀 작성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학도 좋지만, 이렇게 거짓으로 서류를 꾸며서 대학에 들어간들,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진리를 전파하고, 정직을 가르치는 목사님에게, 거짓 서류를 부탁하는 일이, 과연 가당찮은 일입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안 해주면, 시험 들잖아요?  정이 없다느니, 성도들을 무시한다느니, 이상한 소리 하면서 목사님을 괴롭힙니다.  이런 모습이 과연 신앙적인 모습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기뻐하실 모습이냐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물론 세상 사람들이라면, 이런 일은 사실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입니다. 
웃으면서, 이해하면서 해 줄 수 있는 일들입니다.  사실 이렇게 다들 살아가지 않습니까?  요즘 세상에 법대로 살아간다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는, 적당히 편법과 불법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지혜입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치고 가제 잡고...  임도 보고..  아니 이건 빼고.... 
어쨌든,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 보면, 굉장히 지혜로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아닌 것입니다.  누가 준 지혜입니까?  사단이 준 지혜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창 3장에 이런 지혜에 대해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일찍이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제시했던 그 지혜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눈이 밝아진다고 했습니다.  눈이 밝아지는데, 하나님과 같이 지혜로 눈이 밝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눈이 밝아져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고, 눈이 밝아져 죄를 더 짓게 되고, 눈이 밝아져, 결국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요?  사단이 준 지혜로 말미암아... 
지혜로 인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지혜를 얻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고, 하나님이 보장해 주셨던 에덴동산의 모든 풍성함을 상실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 명령이 지켜지지 않았고, 불순종함으로 불의를 저지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무엇이다?  사망이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죽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세상의 지혜를 가지면, 인생에 유익할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거기에 우리 성도들이 속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인 거룩함과 순결함을 저버립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인생의 유익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 세상적인 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인생에 더 손해를 보는 경우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남고, 뒤로는 엄청 밑지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적당한 죄, 남에게 피해 입히지 않는 선의의 죄, 또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죄, 아무리 불의와 죄를 그럴듯하게, 아름답게 포장해도, 그것은 엄연한 죄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하실까요?  “독약은 잘 먹어도 죽고,  잘못 먹어도 죽는다.”  아멘!!!  죄는 그 자체로 죄인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눈에 그럴듯하게 보이고, 아무리 우리가 애써 아름다움으로 포장한다고 해도, 죄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다 사망의 독이 든 죄인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편법과 불의, 모두 다 죄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고, 그래서 이득을 챙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불꽃같은 눈동자를 가지신 하나님이 바라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은 믿고 계십니까? 

이것을 우리가 믿고 있다면, 정말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분명 알고 있다고 한다면, 결코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의가 아닌, 불의한 일을 행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코람데오” 의 신앙...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득죄 하리이까?”  요셉은, 이 코람데오의 신앙으로 죄의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와는 달리, 자신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지켜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르지 않았습니까?  왕 다음으로 높은, 아니 왕 보다 백성들에게 더 신임을 얻는, 유망한 총리가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요셉이, 잠시의 쾌락을 위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이 넘어갔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먼저는 보디발의 가정에서 쫓겨났을 것이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약속도 취소되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도  쫓겨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래저래 손해 보는 인생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장 눈앞에 나타난 이익을 우선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시 한번 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하나님의 의를 붙잡게 될 때에, 그 신앙은 하나님께 인정받고, 또 그 인생은 두고두고 하나님의 나라를, 삶 속에서 누릴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려면, 그리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려면, 내가 먼저 하나님의 의를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사를 바르고 정직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기업들도 보세요.  ‘윤리경영, 윤리경영’ 그러지 않습니까? 
물론 윤리경영을 외친다고 해서, 기업인들의 마음속에 갑자기 도덕심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왜 윤리경영을 외칩니까?  지금 이 시대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지요.  기업이 사회적으로 투명한 윤리경영을 하지 않으면,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 소비자에게나, 상대기업에 신뢰를 쌓을 수가 없고, 결국에는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들도, 이제는 옳고 바른 것이 결국은 힘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저마다 윤리경영을 외치는데, 세상의 윤리보다 더 뛰어난 하늘나라의 윤리를 전수받은 우리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눈앞의 이익 때문에 하나님의 의와 정직을 버리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현대교회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오히려 밟히는 인생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세요.  우리 기독교인들의 기득권이 어디 있습니까?  기독교라는 종교의 프리미엄이 어디 있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는데, 오늘날은 그 빛을 잃어, 존재감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는데, 소금의 맛을 잃어, 땅에 버리워져 세상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무엇입니까?  기독교인에 대한 매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겁니다. 
지나 내나 똑같다는 겁니다.  신앙인과 불신앙과의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상황 속에서, 무슨 신앙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불신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자주 교회에 모여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매 주일날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높였다면, 그 이후에 이어지는 6일 동안의 삶의 현장에서도, 예배드릴 때와 같은 경건한 모습으로, 거룩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높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생각하며, 구별되어진 하나님의 사람답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삼손과 같은 나실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롬 12 : 1절에서 말씀하는, 영적예배요, 산제사인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利)를 위해서, 의(義)를 포기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장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 같지만, 나중에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진노하심 가운데 모든 것 잃어버리고, 후회함이 있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후회함이 있는 인생 살아가는 사람, 우리 가운데는 한 사람도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가 속한 삶의 현장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번째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 화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평강인 것이다. 
평강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화평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화평... 

나와 함께 한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며, 그들과 화평한 모습으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삶에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공부나 업무를 바르고 정직하게  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나와 함께 거하고, 일하는 사람들과 화평을  이루는 것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상은 어떠합니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화평보다 경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기업끼리의 경쟁은 말할 것도 없고, 직장 내 부서간이나, 개인 간에도 경쟁이 치열합니다.
때로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상대방을 짓밟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현대를 살아가면서, 그런 상황은 피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도, 이렇게 경쟁하는 사회구조에 동참하면서, 때로는 피가 튀기고, 때로는 물불 가리지 않는 경쟁구도의 사회 속으로 들어갑니다. 
직장생활하면서, 사업을 하면서, 신앙이나, 믿음, 이런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무조건 이기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왜요?  그렇지 않으면, 이 경쟁에서 지게 되면, 내가 도태되기 때문에... 

물론 경쟁 자체가 제가 부인하고,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직장생활과 사회생활 속에서, 인간관계의 전부가 되어진다면,  우리의 삶은, 비참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경쟁만을 지향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은, 독특한 나를 찾는 과정이 아니고, 남들과 비교하여 우월한 자신을 만들기 위해 발버둥치는 시스템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교육의 풍토인 것입니다. 
기업도 마찬가집니다.  기업간의 경쟁을 피할 수는 없지만, 경쟁만이 난무한  기업과 직장에,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겠습니까?  그런 분위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직장생활을 하고, 사업을 하면서도, 여유가 없습니다. 늘 쫓기듯이 생활합니다.  웃음도 잃어버리고, 여유도 없어져 버리고, 그저 삭막하고 피곤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왜입니까?  우리 성도들이, 환경에 지배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주님의 창조명령이 나오지요?  창 1 : 28절에 보세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할렐루야!!!  이것이 오늘날에도,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창조명령인 것입니다.  이 창조 명령에 나타난 축복의 약속은,  여전히 우리 가운데 효력이 유지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무한 경쟁 사회에서, 우리가 지지 않고 이기면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사람들과 화평을 나누며, 우리가 속한 곳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갈 수 있겠는가?  오늘날 현실과는 맞지 않는 말씀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그 효력이 발생되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 그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 5 : 9절 말씀을 보세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온 인류를 다스리시고, 이끌어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지면,  이런 주님과 같은 칭함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일컬어 뭐라고 부릅니까?  평화의 왕, 화평의 왕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왜입니까?  주님이 자신을 못 박은 원수들을 미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축복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오히려 선으로 갚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평화의 왕, 화평의 왕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희생으로 화목 제물이 되어 주셨듯이, 오늘 우리도 내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오히려 더 손해보고, 희생하면서, 사람들과의 화평을 도모하고, 화목케 지내게 되면, 결국 그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고,  나를 따르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들이 나를 바라볼 때에, 마치 누구를 보는 것 같이 느끼겠는가?  마치 예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되어진다면, 우리가 굳이 입술을 벌여 그들에게 전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전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창세기에 보면, 이런 실례가 나타나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요, 창 26장에 보면, 이삭의 우물에 대한 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삭이 이방 땅에 들어가서도, 이방문화에 속하지 아니하고, 오직 신앙으로 살아감으로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12절, 13절에 보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복을 받아도, 그가 속해 지내는 곳은 이방 땅이었기에, 끊임없이 이방 사람들과 경쟁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그들과 싸워 이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들과 같은 세상적인 모습으로, 치고받고 하는 경쟁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양보하고, 희생하는  미덕을 통해, 그들을 이기었던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땅에 거하는 이방 사람들이, 이삭의 우물을 빼앗았습니다. 
중동 지방에 우물이 어디 흔합니까?  귀한 재산인 것입니다.  아무 땅이나 판다고 해서 다 우물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굉장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지만,  우물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삭이 그러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힘들여 판 우물을, 이방인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대적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에게 양보하고, 또 다시 우물을  팝니다.  그런데 또 물이 나와요.  또 빼앗깁니다.  또 양보합니다. 
또 우물을 파는데, 또 물이 나옵니다.  또 이방인들이 빼앗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에, 이삭이 어떤 사람처럼 보였겠습니까?  바보처럼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신앙생활 잘해서 자기 하나님께 복은 받았지만, 사회 생활하는 데는 영 잼뱅이야.  저거 아주 만만해.”  그런데 나중에 네 번째, 또 우물물이 나오게 될 때에,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결국에는 이삭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어디 그들에게 무릎 꿇으라고 했나요?  아니지요.  그들이 지발로 찾아와서, 먼저 사죄하고, 화평을 청하면서, 무릎을 꿇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창 26 : 22절에 보세요.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할렐루야!!!  이것이 화평케 하는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삭은 그저 양보하고, 화평하기를 힘썼을 뿐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 드세던 이방 사람들이, 이삭을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이제는 이삭이 죽을 때까지  두려워하며 지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승자가 누구입니까?  이삭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이런 이삭의 신앙을, 이런 이삭의 삶을 본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롬 12 : 18절에 보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고후 5 : 18절에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우리 신앙의 사람들은, 어딜 가든지 화목대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함께 일 할 때 갈등과 부딪힘이 있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 가운데서 어떻게 하든지 자신을 낮추고, 지혜로운 양보를 통해  화목을 이루고,  평화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일중심이 아닌, 관계중심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일 때문에 관계가 깨어지거나, 사람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여러분들은, 어디를 가든지 항상 피스메이커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 번째로, 무슨 일을 하든지,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희락인 것입니다. 

요즘 세상은 어떻습니까?  온통 쾌락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취해, 흥청만청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근 홍익대 장근호 교수가, ‘세계 독주 소비량’을 발표했습니다. 
1년에 국민 1인당 마신, 소주 및 위스키의 양을 비교한 것인데, 통계를 보면,  1위가 러시아 - 6.5ℓ,  2위가 라트비아 - 5.6ℓ,  3위가 루마니아 - 4.7ℓ,  4위가 코리아 - 4.5ℓ  이것은 15세 이상 남녀 1인당, 1년에 68병의 소주를  마신 양인 것입니다.

이렇게 쾌락 때문에 사람들의 술 소비량이 계속 늘어나고 있고, 유흥업소들이 성황을 이루고, 유흥업소나 서비스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직장 일을 끝내고, 동료들과 술 한 잔 하는 것을 최고의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근본적으로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다른 어떤 일을 해도, 인생의 진정한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감사함으로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 3 : 22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니”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직장 일은 돈 벌기 위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고,  즐기는 것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하는 일을 즐길 수 없다면,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 가운데서도, 자신의 일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일이, 너무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도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성도들이 억지로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가 이렇게 어려워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헝그리 정신을 잃어버리고, 소위 3D직종을 기피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굶어죽어도, 험한 일은 안하겠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보세요.  전셋집, 월세방에 살아도, 자가용은 끌고 다녀야 한다는 겁니다.  폼생폼사..
일을 쉽게 하고, 편하게 살겠다는 거지요.  손에 물 안 묻히겠다. 
그 만큼 일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라. 학생들은 거의 20년 이상을 공부해야 되고, 직장인들의 거의 평생을 직장 생활해야 되는데, 그게 고통이고 곤욕이고, 억지라고 한다면,  어찌 그 인생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인 저도 마찬가집니다. 
교회 사역하는 것이 힘들고 고통이면, 설교하는 것이, 가르치는 것이, 심방하는 것이 고역이라고 한다면, 어찌 이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다니는 직장이나 사업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려면, 먼저 주어진 일에서 즐거움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사실 월요병, 이런 거 없어야 합니다.  월요일이 오히려  가장 즐거운 날이 되어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요?  그래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가 있기 때문에... 
사실 힘든 일이지요.  어찌 보면 억지 논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에..  그것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주어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되, 항상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죽은 후에 가는 곳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적인 노력 여하에 따라, 이 땅에서도 우리가 얼마든지 맛볼 수가  있습니다.  주기도문 내용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따라, 항상 의로운 삶, 그리고 화평케 하는 삶, 그리고 일에 대한 기쁨과 감사를 회복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되, 더욱 더 아름답게, 더욱 더 창대하게 이루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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