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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자 (엡 4:1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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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엡 4 : 1 - 16
제목 :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보편적으로 점차 느끼게 되는 감정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신앙의 연륜이 싸이면 싸일수록, 점점 더 힘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분들이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는, 그 은혜의 체험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정말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또 주님이 원하신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이든지, 다 주님께 드릴 각오가 되어져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주님 앞에 자신을 아낌없이 드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세월이 흐르면서 그러한 열심이 조금씩 식어져 가고, 어느센가 자기도 모르게 반대급부를 생각하며, 타협적인 신앙생활, 조건부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또 어떻게 변합니까?  자기의 현 신앙을, 다른 사람들과 자꾸 비교해 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조금 낫다고 판단이 되어지면, 스스로 만족해하면서, 이만하면 괜찮은 신앙이라고, 자부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때부터는, 신앙의 진전이 없게 됩니다.  현재에 상태에 만족하면서, 늘 변화가 없는, 그저 밋밋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여러분 가운데, 지금 이러한 생각을 가지며 신앙생활 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그 분은 지금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의 신앙 가운데 점차 메말라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처음 예수를 믿는 심정으로, 겸손한 가운데 새롭게 신앙생활을 힘써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아멘!!  잠 3 : 34절에 말씀하지요?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여러분, 우리가 은혜가 메마른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자연히 삶이 힘들어 집니다.  기계를 돌릴 때, 윤활유가 부족한 가운데 기계를 돌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기계가 돌아가는 것이 힘이 들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결국에는 기계가 마모되고 손상을 입게 되듯이,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의 은혜가 소멸되기 시작하면,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힘들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  하노라.”  지금 내 영혼이 잘 되어 있지를 않는데, 어찌 범사가, 내 육신이  잘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앙에, 그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늘 자신을 부족하게 생각을 합니다.  참으로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그 하나님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하나님 앞에 내가 무엇을 드릴까, 염려하며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감사함이 있을 때에, 내 속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만한 헌신이, 비로소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아무나 헌신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감사의 눈물과,  또 그 감사함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열정의 헌신, 이런 헌신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고, 이런 성도의 삶을 더욱 더 윤택하게 만들어 주시며, 더욱 더 복되게 만들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어떤 신앙이 되어져야 하겠습니까? 
이런 감사와, 이런 순수한 열정이 있는 신앙, 다 되어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에베소서를 쓴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이런 열정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처음 예수를 만났던 그때 그 감격으로,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변함없이 주를 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은혜의 체험이 얼마나 크고 놀라웠던지, 이제까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그 모든 것을, 무엇과 같이 여겼다고 했습니까?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그리스도와는 족히 비교할 수 없고,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보다 더 귀할 수 없다고 하는, 놀라운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처음 부르신, 그 때가 있었지 않습니까? 
각 자에게 이런 부르심이 분명 다 있었는 줄로 압니다.  처음으로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을 때, 그 때 그 감격, 그 은혜의 체험, 오늘 우리 가운데는 얼마  만큼이나 남아 있습니까?  아직도 여러분 가운데, 주를 향한 뜨거운 마음이,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존귀한 존재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멘!! 
열두 제자들을 주님이 찾아다니시면서 부르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주님이 우리의 심령에 친히 찾아오셔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다 주님의 제자가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은혜로서, 모두가 주님의 제자가 되어졌지만, 대부분의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마치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의, 변화되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3년이나 따라다니면서, 수많은 말씀을 듣고, 수많은 이적들을 바라보고 또한 체험을 했으면서도, 그 제자들은 주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누가 높아질 것인가 자리다툼이나 하며, 예수님을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 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제자들을 향해 묻지요?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그 때 제자들이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주여, 할 수 있나이다.”
자신 있게 대답을 합니다.  주님은 고난의 잔을 말씀하셨지만, 그 제자들은  영광과 축배의 잔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함께 죽을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주님과 함께 살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눅 9 : 23절 말씀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여러분, 십자가는 죽음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희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 여러분들은, 어떠한 생각과 어떠한 모습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목적에, 현재에도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처음 주님을 향한 그 순수한 마음은 다 사라져 버리고, 자꾸만 내 삶의 필요만 주님께 요구하는, 변질된 신앙을 가진 채, 오늘 이 시간까지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를 안 뒤, 자기를 부인하고, 철저히 부인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갔습니다.  주를 향한 변함없는 마음으로 충성하며 살아갔던 인물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어떻게 보면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위로하심과 도우심을 체험하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덧입어서,  수많은 기적도 일으키며 살아갔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천상의 모습을 바라보는, 신령한 축복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입은 바울은,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군 된 나 바울은”  그는 또한 자신의 삶에, 주를 위한 수고가 넘친다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고후 11 : 23절에 보세요.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무엇입니까?  자신의 일생이, 이처럼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로 점철되어 있음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무엇을 자랑하며, 이 땅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재물입니까?  명예입니까?  가문입니까?  도대체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을, 우리는 자랑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은 과연 무엇을 위한 수고로, 또 누구를 위한 수고로 점철되어 있습니까?  내 가족의 안녕을 위해, 오늘도 수고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 인생은, 참 어리석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왜 어리석습니까?  복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고 있으면서도, 그 예수님을 배제한 채, 인생을 복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 인생이 얼마나 어리석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였던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가 주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그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위기가 닥쳐왔을 때, 그는 주님을 배반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는 주님을 사랑했지만, 세상도 사랑했기에, 그는 주님을 사랑했지만, 자기 목숨을 더 사랑했기에, 그 위기의 순간에 주님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집니다. 
주님을 시인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를 주저하는 이유가, 우리가  붙잡고 있는 세상의 것들 때문이라면, 우리는 우리를, 자신의 몸 버려 십자가의 피 값으로 사신, 그리스도 예수를 부인하며, 배신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결코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주를 위해 수고하다가, 옥에 갇혀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옥 중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그 가운데 많은 성도들이 있지만, 아직까지도 구속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 됨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편지를 통해 권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분명 하나님께로 부름을 받은, 주의 백성들인 줄로 믿습니까?  그렇다면, 주의 백성답게, 주를 위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
그렇다면, 여러분 어떤 모습이, 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모습이겠습니까?
크게 세 가지로 살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크신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깨달아 알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위대한 신앙인인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힘을 인하여 크게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바울이 갇힘을 통하여, 그들도 갇힐 수 있다는 불안감이 온 교회에 퍼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하나님이 지켜주지 못했는데,  어찌 자기들 일까보냐 라고 하는,  그런 심리가 많이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교회 전체적으로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회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성도들 간의 다툼도 허다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에베소 교인들이, 이렇게 흔들리기 시작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신앙을 지탱해 줄, 신앙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 신앙의 근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믿는 그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시며,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시며,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비록 옥 중에 갇혀 있었지만, 오히려 에베소 교인들을 위로하면서, 이것 또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엡 3 : 11 - 13절을 보세요.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당당히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자신이 옥에 갇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예정되어진 일이며, 이것이 또한  너희에게는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연약한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바울은 오히려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있습니까?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우리 주님이 먼저 알고 계십니다.  그 주님이 우리를 결코 그 고통 가운데 그냥 내 버려두질 않습니다.  반드시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환난 가운데서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고통이 변하여 기쁨이 되어지고, 환난이 변하여 축복이 되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고난의 대명사격인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 상황 속에서도,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신앙을 지킨 욥에게, 갑절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우리 모두가 다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부름을 받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신앙의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두 번째로, 어떤 모습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모습입니까?
두 번째는, 교회가 하나 되게 하기 위해, 여러 성도들에게 신앙의 모본을  보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 1 - 4절 말씀을 보게 되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의 에베소 교회는, 신앙의 근본이 흔들린 가운데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마치 가정의 구심점인 아버지를 잃은 고아들처럼,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서로의 아픈 부분과 연약한 부분들을 감싸주지 못하고, 드러내며 공격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처럼 주님을 향한 믿음이 상실된 교회, 성도들 간에 사랑이 상실된 교회는, 사실 더 이상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란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에클레시아” 라고 하는데, 이는 성도들의 모임이란 뜻입니다.  주를 따라는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지 않고, 주님이 명한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단순히 인간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바로 이러한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바울은 그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요?  감옥에서요.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급한 마음에 감옥에서 편지를 썼겠습니까? 
바울이 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까?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천교회는, 지금도 그러하겠지만, 앞으로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성령으로 하나 된 축복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속한 이 서울만 해도, 교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저녁이 되어지면, 붉은 십자가가 달려 있는 건물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그만큼 교회가 많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때로는 분열을 일으키며, 그러한 모습으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교회가 성령으로 하나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가 성령을 거스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데, 어찌 그 교회가 바로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으로 주를 바라보며, 환난 가운데서도 서로 격려하며,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교회들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 가운데,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성천 교회가, 바로 그러한 교회 중의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가운데서도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하는 신앙적인 모습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도, 일반 사회와 마찬가지로, 여러 모양의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부한 자도 있겠지만, 가난한 자도 있습니다. 또 학식이 뛰어난  사람도 있겠지만, 불학무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일반 사회와는 다르게, 이런 여러 모양이 조화를 이루며 지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못 가지고 못 배운 사람들이, 혹여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인해 상처를 입을 까봐, 언행에 조심을 하는 겸손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가식이 없기 때문에, 그 곁에 누가 오더라도 진실로 남을 배려하는 그 온유한 성품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 55 : 1절 말씀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들과 친구로 지내셨습니다.  또한 무식한 자들을 택하사 제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가난한 자들을 배척하고, 무식한 자들에게 군림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정말 고난 가운데 은혜를 사모하며 주님 앞에 나온  그들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러 교회에  왔다가, 교만하고 아집으로 가득한 사람들로 인해, 주님은 만나지도 못한 채, 실망감만 안고 돌아가 버립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입니까?

어느 동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마을에 성자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경건하고 덕망스러워서, 모든 사람들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그 생활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심지어는 천사들까지도 이 성자의 생활에 감동을 받아서 땅으로 그를 찾아내려 왔습니다.
그를 찾아온 천사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그대가 기도하기만 하면 무슨 병이나 다 낫고, 죽은 자라도 살리는 권세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성자는 “감사합니다만 저는 그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셔야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그대가 말한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권세를 드리려는데, 이것은 어떻습니까?”
그 때 성자는 대답합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하셔야 할 일이지, 어찌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천사들이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무슨 은혜를 원하시오?”
그 성자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예, 한가지 받고 싶은 은혜가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사는 동안에 어떻게 해서든지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되, 그 선을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고 행할 수 있는, 그런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겸손과 온유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이러한 모습이 주님을 닮은 신앙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15 - 16절 말씀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으므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교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어떤 모양이든지 간에,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줄로 믿으며,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둔 형제와 자매임을 기억하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며, 돌아보며, 용서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이 교회를 더욱 더 아름답게 세워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주님이 주신 직분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본문 11 - 12절 말씀에,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의 직분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님과 당회를 통하여서 세워진 직분이겠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친히 세워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직분을  감당할 때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일을 할 때마다, 사람의 칭찬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자세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공식적인 직분을 맡지 않았다고 해서, 그런 분들은 아무런 직분이 없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성도로서 맡겨주신 일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내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다른 성도들을 바라본다면, 그들을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일들을 우리가 거절하지 않고 성실히, 또한 충성되이 행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을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먼저 우리에게 직분 주심에 감사하시고, 그 직분에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해 충성하시고, 주 중에라도 돌아볼 지체들이 생각나시면, 성령의 감동함으로 믿으시고, 지체 없이 그들에게 달려가, 그들을 위로하며 돕는,  주의 충성된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부르시고, 직분자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지 않고, 여러분들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섬기는 성천 교회와 여러분의 가정 위에, 하나님의 더욱 더 크신 은혜가, 날로날로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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