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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 잃은 하룻길 (주님 잃은 하룻길) (눅 2:41 -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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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눅 2 : 41 - 52
제목 : 주님 잃은 하룻길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가족들과 함께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찾아갑니다.  그 당시의 유대의 모든 남자들은 매년 큰  3대 명절이 되면, 그러니까 유월절, 맥추절, 그리고 수장절, 이렇게 3대 절기가 되면, 예루살렘을 향해서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오늘 이 요셉과 마리아도  그러한 전례를 지켜 예루살렘을 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에서 모든 볼일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만  어린 예수를 잃어버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줄 알고 하룻길을 내려갔다가, 예수께서 함께 아니한 것을 뒤늦게 발견을 하고서, 찾기까지 찾으며 되돌아갔지만, 그 잃어버린 예수를  만나러 가는 길은, 사흘 길이었던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요셉과 마리아라 할지라도, 그들이 예수의 부모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동행하지 못하고, 함께 있는 줄 생각하고 하룻길 갈 수 있었다면, 주님 잃어버린  하룻길 갈 수 있었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에서도, 주님 잃은 하룻길, 얼마든지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자칫,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지금도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이런 안일함 속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가  참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정말 그러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이, 정말 이런 주님과 동행하는 신앙생활이라고 한다면, 그 신앙생활은 정말 축복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면, 그렇지를 못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도 모른 채 주님과 멀어져 가고 있고, 그로 말미암아 주님이 주시는 축복과 은혜를 상실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요셉과 마리아가 걸어갔던 주님을 잃어버린 하룻길,  그 하룻길은 어떤 길이었습니까?  그 길은 결코 생명과 평안, 그리고 화평의 길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다.” 라는 말씀만 보더라도, 주님 없이 간 그 하룻길은, 아픔과 염려와 걱정의 길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고통과, 아픔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일들이 우리에게 왜 일어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이 모든 상황과 형편들이, 우리의 신앙생활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신앙 따로, 생활 따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렘 17 : 13절에,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우리의 삶에 수치를 당하며, 고통을 당하게 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떠나 있음을, 성경은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하나님을, 우리가 버렸다고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난 인생, 어디서 생수의 시원함을 맛 볼 수 있겠습니까?  어디서 갈함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인생이 메마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우리 스스로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오늘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440장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지 않습니까?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워 정처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운 삶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  혹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아닙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는 오늘 그 신앙의 발걸음을 돌이켜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디를 향해 돌이켜야 합니까? 
주님이 계신 예루살렘을 향해, 다시금 그 신앙의 발걸음을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늦기 전에, 우리의 인생에 더 큰 고통과 아픔을 겪기 전에, 주님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이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까, 유월절을 지키고 돌아가는 요셉과 마리아는, 온종일 하룻길 간 후에야, 예수께서 함께 있지 않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때에 어린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43절 말씀에 보니까,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가족들과 떨어져 나가서, 그래서 갈 데가 없어서 성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보면, 주님은 분명 그 때에 하실 일이 계셔서, 예루살렘에  의도적으로 머무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또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자신들과 동행하는 줄 알고, 주님을 잃어버린 채 하룻길을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주님의 어떠하심을 알고, 또 그 하시는 사역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았다면, 사흘 동안 예루살렘에 더 머물렀다가, 예수와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가도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이켜 성전에서 묻고 대답하는 예수를 만날 때까지, 또 성전에서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저들은 영적으로 매우 무지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들이 왜 주님 잃은 하룻길을 갔습니까?
그들이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셨고,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였더라.”
주님과 다른 곳에 머물면서도, 주님을 잃어버린 채, 세상 속에서 거하면서도  자신과 주님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성도, 바로 이런 성도들이 영적으로 무지한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주님과 함께 하는 신앙이십니까? 
주님과 동행하는 신앙입니까?  혹 요셉과 마리아와 같이, 주님이 함께 있는 줄 착각하고, 하염없이 인생을 보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신앙의 주체되시는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관심과, 주님의 뜻과 주님의 생각, 그리고 주님의 사역을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왔어도, 그 신앙은 주님 잃은 하룻길과 같은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신앙의 연륜을 자랑하지만, 그 연륜에 합당한 신앙의  모습을 보이질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느 순간엔가 주님을 분명 놓쳐 버렸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로, 그냥 신앙생활을 해 나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 우리가 주님을 놓쳐 버렸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명 누가 보아도, 주님과 동행하는 신앙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신만은 그걸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신앙은, 과연 주님과 동행하는 신앙인가? 
이에 대한 의문이, 아마 여러분 마음속에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런데 이것을 스스로 진단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진단해 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현재 내 신앙이,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는 신앙인가? 
다시 말해, 지금 내 신앙이 말씀 중심의 신앙인가?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인가? 이것을 점검해 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하룻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주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성전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고, 또 선생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시면서, 말씀에 전념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왜 성전에 머물러 있었는지를 알지를  못했습니다.  왜요?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영적인 무지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잘못된 예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겁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먼 길을 여행하며 성전을 찾아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예배의 본질은 망각하고,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1 - 42절을 말씀을 봅시다.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분명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루살렘까지 올라오는 것은 보통 열심이 아닙니다.  누가 보아도 그들은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에서 열심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주체되시는 그리스도가 자신들과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주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길을 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돌아갈 길을 더 염려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먼길을 다시 돌아가려고 하니 막막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놓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이미 망각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이미 그리스도의 탄생을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아니 온 유대 민족이 그토록 기다리던 대망의 메시야가, 바로 자신의 가문에 태어나신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 메시야가 자신의 가정에서 함께 자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지내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들이 메시야와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인식을 못하고, 그저 평범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던 보통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갔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그들의 삶에 바빴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일에 더 신경을 썼기 때문에, 메시야가 바로 옆에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깨닫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 예수와 함께 안식일마다 마을에 있는 회당에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일생생활을 다시 시작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과 마리아의 삶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얼마나 아이러니 합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도, 현재 나와 함께 하고 계신 주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매 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주일만 아니지요. 수요일도 나오고, 금요일 밤에도 나옵니다.  매일 새벽에도 나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나옵니까?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왜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주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이 성전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줄로 믿습니다.
얼마나 열심이 대단합니다. 누가 보아도 신실한 신앙인이라고 인정받을 만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한다고 해도, 우리들에게 예수님에 관한 바른 지식이 없다면,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이 없다면,  오늘 우리들도 요셉과 마리아처럼, 주님을 잃어버린 채 저마다  제 나름대로, 제 갈 길로 가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신앙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주님과는 전혀 무관한 신앙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마을의 회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은혜를 주셨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분명 다른 감동을 주셨을 것입니다.  이런 특별한 은혜와 감동을 주시고, 하나님은 남들과는 다른 헌신을, 또한 그들에게 요구했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예수의 성장을 책임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의 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를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전혀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지를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삶에 더 바빴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고, 헌신에 관한 하나님의 뜻도  전혀 깨닫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월을 몇 년이나 보냈습니까?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될 때까지 12년을, 이러한 신앙의 모습으로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룻길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그들의 삶에 반복되다 보니,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결정적으로  주님을 완전히 놓쳐버리는 상황에 처하게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적어도 주일 낮 예배를 드리고, 또 주일 밤에도 나오셔서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이라면, 분명 다른 보통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혜와는 다른, 특별한 은혜를  하나님께서 이미 부어 주셨으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은혜를 받았음을 여러분은 인식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아니면 무감각한 가운데 전례를 따라, 오늘도 주일을 보내고, 이 시간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오늘 이 예배를 드릴 때에,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여러분의 심령으로 듣고 계십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분명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정작 그 분이 나의 하나님이신 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며, 나와 함께 한 그 주님이,  나의 모든 영적인 상처와, 모든 육신적인 문제를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는, 무지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삶에 곤고함이 있습니까?  슬픈 일이 많고, 근심된 일이 많습니까?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까?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고, 매주 금요일마다 집회에 나와서 기도하는데도, 문제는 그대로이며, 여전히 어려움 속에 지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신앙에, 먼저 주님이 계신 곳을 확인하고, 그 주님을 찾아  만나는 노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멀리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크게 부르짖어야, 우리의 소리를 듣고 찾아오시는 주님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항상 성전에 계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입니다.  요 1 :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다른 곳에서 주님을 찾으려 하지 마시고, 오늘 나에게 들려지는 이 말씀 속에서 주님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4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성전에서 들려지는 말씀 속에 거하시는 주님을 발견하고, 그 말씀에 힘써 순종하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지금도 이 시간 설교를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  하시는 내용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오늘 50절 말씀에,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주님이 이렇게 까지 말씀하셨으면, 이제는 깨달았더라. 라고 말씀이 연결이 되어져야 하는데,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요셉과 마리아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심령으로 들어도, 헌신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신앙이라면, 그 또한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신령한 것 같습니다.  신실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도 충만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아무리 인간의 눈에는 좋게  보여도, 말씀에 따른 헌신이 없다면, 그 신앙은 마찬가지로 주님을 상실한  신앙이요, 주님을 잃어버린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없는 인생은 평안이 없습니다. 헌신이 없이 이루어지는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여전히 곤고하고 피곤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정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받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신앙의 모양만 있고, 신앙의 능력은 없는, 헌신이 없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없는 신앙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헌신에 관한 설교는 듣기를 부담스러워 합니다.
헌신하는 신앙이 바른 신앙이요, 하나님을 체험하는 신앙이요, 살아있는  신앙이라고 설교를 해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 설교를 한다고, 목회자를 은연중 비난한다는 것입니다. 

벧전 1 : 24 - 25절 말씀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주의 말씀은, 곧 이 시간에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여 언제나 변함이 없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당신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시면서, 그에 합당한 헌신을  요구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어찌 오늘날에 와서는 중단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는 내가 하나님의 백성 됨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겁니다. 

오늘날 이 세대는 헌신에 관한 설교는 싫어합니다. 그러나 축복에 관한 설교는 귀를 쫑끗하고 듣습니다.  아멘하고 화답하며 듣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신앙, 분명 잘못된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축복이 있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헌신으로, 먼저 여러분의 삶에 심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이루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주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남들과 구별된 헌신을 요구하실 때에라도, 기쁨으로 순종하며 그 길을 걸어갑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린 채, 요셉과 마리아가 정처 없이 하룻길을 걸어갔을 때,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예수님은 성전에 계셨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이 성전에 계시는 줄 알지 못하고, 말씀 안에 거하시는 줄 알지 못하고, 우리 인생의  전례대로, 체험했던 어떤 신앙 속에, 표적 속에, 내 주관 속에 예수님이 계시는 줄로 알고 인생을 살아간다면, 오늘 우리들도 여지없이, 요셉과 마리아처럼 주님 잃은 하룻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요셉과 마라아는 하룻길 간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 속에  되돌아간 길은 사흘길 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다시금 만나 말씀을 통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을 때에,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서 그 말씀을 마음에 품게 됩니다.  그리고는 주님과 육신적으로 함께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함께 동행하며 내려가게 됩니다.

그 깨달음이, 마리아의 신앙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까? 
함께 한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며,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역을 감당해 나가실 수 있도록, 주님의 일생에 자신을 드리며 헌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52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서 메시야의 권위를 인정받으며,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어지고, 영광이 되어지는 귀한 사역이 이루어 질 수 있게끔, 받들어 섬겼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잃어버린 채 하룻길을 걸어간 것을 깨달았던 마리아에게는, 그 일이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마음이 아픈 일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영적인 회복을 이루며, 하나님이 진정으로 자신에게 원하셨던, 주님을 섬기는 헌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 귀한 계기가 되어졌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로 하여금 큰 위로가 되어진다고 생각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해가 벌써 다 지나갔습니다.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12월의 첫 주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 각 자의 신앙생활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라도, 주님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셨다면, 이 시간 깨닫는 대로 속히 그 발걸음을 주님을 향해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연말연시다, 성탄절이다. 뭐다 해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자칫 정체될 소지가  다분히 있습니다.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싶은 마음이 저마다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돌이키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오늘 깨닫는 이 순간부터 돌이키시고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시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의 삶이, 지금 이 순간부터, 여러분의 남은 시간들 속에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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