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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현상유지를 거부하라 (막 10:46 -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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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막 10 : 46 - 52
제 목 : 현상유지를 거부하라

세계 3대 경영학자 중에 한 사람인, 톰 피터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쓴 “최고를 찾아서” 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요, 이 책에서 그는 미국에서 가장 잘 경영되고 있는, 성공적인 43개의 기업들을 조사를 해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기업들은, 이후에 모든 미국 기업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발간된 후, 불과 2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조사를 해 보았을 때,  43개중 30%가 넘는 14개의 기업이, 재정적으로 도산 위기에 처할 정도로, 대단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불과 2년 만에, 어떻게 이런 충격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런 궁금증 때문에, 비즈니스 위크지가 또 다시 그 이유를 조사를 해서 분석한 결과를 내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업들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변화에 대한 반응과, 응수의 실패” 때문이었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업의 현상유지, 기업의 현실안주가 실패의 원인이었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소니를 잘 아시지요?  소니하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굴지의 기업 아닙니까?  세계 제일 경영을 추구하던 소니가, 지금은 지독한 경영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대적인 인원 감축을 하고, 기업의 사활을 건 경영 개편을  시작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이처럼 소니가 이런 위기를 맞이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시대의 변화의 흐름을 외면하고, 고집스럽게 과거의  경영기법만을, 추구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니 제품 선전을 보면, 유명한 광고 모델이 등장해서 자사 제품을 선전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요, 불과 1년 전만 해도 그런 광고가 없었다고 합니다. 자사 제품을 선전하는데, 굳이 유명광고 모델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예요.  자사 브렌드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광고를 보면 제품만을 크로즈업 시키는 선전을 해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선전해서는 사람들이 안 알아준다는 겁니다.  다른 회사들도 품질 좋은 새로운 제품을 많이 내어 놓고, 유명 광고 모델로  선전을 하기 때문에, 그런 제품들에게 이제는 밀린다는 거지요.
그래서 지금은 유명광고 모델을, 자사 제품의 선전 모델로 쓰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누구를 쓰고 있는지 아십니까?  욘사마 배용준을 썼더니, 그 이후로 그 제품이 대박났다고 하지 않습니까?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자신의 경영마인드를 수정하고, 변화시킨 결과였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한 예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지만, 우리 인생의  경영이나, 또 우리 신앙의 경영도, 결코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인생이 성공을 하고, 어떤 신앙이 성공을 하겠습니까?  인생의 연륜이나, 신앙의 연륜에 걸맞는 변화와 도전이 있을 때, 그 인생이나 신앙이, 성공을 거두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또 신앙에 있어서 이런 변화와 도전을 추구한다는 것이,  참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요.  왜냐하면, 사람은 근본적으로 변화를 싫어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켄 블랑카드라고 하는 교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한다.” - 변화에 대한 호기심은 있으나,  변화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나, 정작 자신이 변화되는 것은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네 가지의 변화를 사람들이 두려워한다고 했는데,
첫째는 지식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둘째는 자세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셋째는, 행동의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조직의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것이지요.  무엇이든지 바뀌는 것이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저 단순한 현상유지, 현실안주가 좋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사실 어지간한 결심이 없으면, 이루지 못할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 변화가 없다면, 그 인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루하루가 얼마나 무의미하겠습니까?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여러분, 가난보다 더 견디기 힘이 든 것이, 지루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인생에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또 그런 인생에 무슨 발전이 있고, 성취가 있겠습니까?  물론 당장에는 편한 것 같고, 그것이 좋아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편안함이 결국은, 그 인생의 장래를 망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 24 : 33절에 보면,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네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신앙은 자라는 것이지, 결코 정체되거나 퇴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이 고이면 어떻게 됩니까?  물이 썩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평안한 것이 좋게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만, 잠잠히 있는 가운데 나타나는 평안은요, 결코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아닙니다. 
사단이 준 가짜 평안인 것이예요. 그 거짓 평안으로 인해서, 내 신앙이 어떻게 되어집니까?  점차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미지근한 물에 담겨 있는  개구리와 같이, 불 위에 올려진 그릇 속에서 평안하다. 아 뜨시다. 헤엄치는 개구리와 같이, 나중에 서서히 데워지는 그 온도에 둔감하게 되어져서, 결국에는 그 그릇 속에서 익어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니라, 그 보다 더 못한 그릇 안의 개구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 13 : 3절에 보면, 다윗이 뭐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라고 했습니다.  “나의 눈을 밝히소서.” 지금 내가 처한 이 시점에서, 나를 바로 깨닫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 신앙의 현 주소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현상유지는 기독교의 정신이 아닙니다. 현실안주도 성경적 인생철학이 아닙니다. 성경은 현상유지나 현실안주를 강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인생과 신앙에, 항상 새로운 변화와 도전이 나타날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믿습니까?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신앙생활인 것이예요.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없기에,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 살아가면서도, 도무지 세상 사람들과 구분이 되질 않는, 무능력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세상과 다름이 무엇입니까?  능력의 차이가 아닙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이미 이런 능력을 부여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능력을 사용할 줄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예요.  왜입니까? 
그 능력은, 변화를 통해서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은, 도전을 통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에,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하며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고, 믿음은 있으나 행함이 없으므로, 여전히 무능력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우리 벧엘 교회 성도들은, 이런 무능력한 모습에서 탈피해서,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이런 변화와 도전을 추구해 나가시고, 그래서 여러분의 삶에 신앙의 능력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인생과 신앙에, 이런 변화와 도전을 추구해 나가며 능력 있는 삶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을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의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떤 내용입니까?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거지 바디메오가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눈을 뜨게 되는, 놀라운 기적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현상유지를 거부하고, 현실안주를 거부하고,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도전해 가는, 입지적인 한 인물을 발견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바디메오는, 우리에게 있어 좀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많은 신앙의 인물들이 있지만, 특별히 이 바디메오는, 우리 성도들의 영적인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소경 거지의 형편이 어떠했겠습니까?  얼마나 초라했겠습니까? 
얼마나 궁색했겠습니까?  두 눈 멀쩡한 거지도 거지같이 해 다니는데, 앞을 못 보는 소경 거지였다면, 그 꼴이 얼마나 거지 같았겠습니까? 
남들과 비교해 보아도, 아니 같은 거지끼리 비교해 보아도 훨씬 초라하고 불쌍한 처지입니다.  한마디로 불행하고 불쌍한 인생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런 바디메오의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 성도들 가운데,  대다수의 인생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가운데 누가 남들보다 부자입니까? 
여러분 부자입니까?  우리 가운데 누가 남들보다 명예가 높습니까? 
누가 남들보다 권세가 높습니까? 우리 가운데 누가 남들보다 지식이 뛰어납니까?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 보아도 별로 나을 것이 없는, 어떤 면에서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부족한 것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고전 1 : 26절 이하에 보면,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지 않습니까?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할렐루야!!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믿습니까?  우리는 원래가, 세상에서 천한 것들이고, 멸시 받는 것들이고, 없는 것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안목이 있습니까?  장래를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이 있습니까?  그저 눈앞에 펼쳐진 현실만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 거지 바디메오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인생을, 우리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시간, 이 바디메오를 통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불쌍하고 불행한 소경 거지 바디메오가,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이처럼 기적적으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었을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자기 인생의 현상유지를, 스스로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불쌍한 거지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과도 같았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어요.  앞을 못 보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일을 배울 수가 있습니까?  그저 남이 먹여주는 밥을 먹어야 했고, 그저 남이 이끌어주는 대로 가야만 하는, 그런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가 택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구걸하는 일 밖에는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리고 성의 길 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이런 처지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보통의 사람들은, 바디메오와 같이 자신이 당한 처지가 불가항력적이라면, 그냥 모든 것을 체념하고 운명적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신체의 장애가 없는 단순한 거지였다면, 자기가 좀더 노력하고 수고하면 얼마든지 거지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선천적인 장애를 안고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지체 장애가 아닌, 가장 중요한 눈이 보이지 않는 소경이었다는 겁니다.  누가 봐도 절망적인 처지입니다.  구걸이라도 하면서, 남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다행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이런 절망적인 처지에서도, 결코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신의 처지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지를 않았다는 것이지요.  바디메오는, 자신의 이런 운명과도 같은 인생을, 강하게 거부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지금과 같이 남에게 구걸이나 하며, 평생을 거지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는가? 그는 이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빌어먹는 인생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자기 인생의 현상유지를, 자기 인생의 현실 안주를 강하게 거부하며, 새로운 인생으로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바디메오의 감정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기를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나도 간절하게 찾고 있다는데서, 그의 평소의 감정을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왜 예수님을, 그토록 간절하게 찾고 있었던 것일까요? 예수님이 자신의 불행한 인생을 바꾸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바디메오는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각 처에서 병든 자를 만나 주시고, 치료해 주셨던 사실을 소문을 통해 듣고 있었습니다.
이런 소문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속에서는 자신도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눈을 고침 받아 뜰 수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강한 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바디메오의 이런 확신이, 어디서 기인된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을 향한 믿음에서입니까?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을 믿었기에, 그에게 이런 확신이 생긴 것입니까?  표면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만, 보다 더 깊은 내면을 보면, 믿음 이전에 그의 생각에서 기인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입니까?  남에게 구걸하며 먹고 사는 거지의 생활을 청산하고자 하는 생각, 자신의 인생에 현실안주와 현상유지를 강하게 거부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윌리엄 제임스가 이런 말을 했지요?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  까지도 바뀐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생각이 가장 우선인 것입니다.
생각이 바뀔 때 행동도 바뀌게 되는 것이예요.  바디메오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도, 자기 인생의 현상유지를 거부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었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생겨나지 아니했을 겁니다.  믿음이 없는데,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인들 생기겠습니까? 
바디메오의 무관심 속에, 예수님은 그냥 여리고 성을 빠져 나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바디메오는 그냥 자신의 현실에 안주하며, 평생을 구걸하는 거지로 살아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생각이,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구원에 관한 믿음 외에, 신앙생활에서 필요한 모든 믿음은, 우리의 생각이 지배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생각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필요로 하는데, 이러한 은혜와 축복을 간구하는 그 믿음은, 우리의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예요.  왜 야고보 기자가,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입니까?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믿음이 온전하게 나타나지를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을 보게 되면, 참 힘들고 어려운 인생을 살아가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분들도 주일이면 변함없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설교 말씀의 주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귀한 말씀을 매 주일마다 듣지만, 그 분들의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그 분들의 삶 가운데서는 나타나질 않는다는 것이예요. 

왜입니까?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를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요?  그 분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참 위로가 되는데, 실제 자신의 삶에는 그 말씀이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예요. 

그 자신의 생각이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인생이 전과 다를 바 없는, 그렇고 그런, 현실에 안주하고 마는 생활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자신의 생각을 도무지 깨뜨릴 생각을 하고 있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현재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은,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평생을 배부르게 먹으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생입니까?  오늘 우리 가운데, 저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이런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현재의 자신의 삶에 부족함을 느끼고,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처지의 인생입니다.  내일 일을 우리가 알 수 없기에,  하루하루를 불안해하며 살아가는, 오늘 본문의 소경 거지 바디메오와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우리의 모습이 원래 정상적인 모습입니까?  이런 우리의 신앙생활이 원래 정상적인 신앙생활입니까?  소경된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비정상입니다.  장래에 대한 소망이 없이 항상 불안해하며, 언제나 남의 도움을 받아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지금 내 인생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예요. 

오늘 여러분의 처한 인생의 환경이, 불가항력적인 열악한 환경입니까? 
도무지 일어설 방법이 없는, 절망적인 환경입니까?  그래서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이런 생각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꾸만 약해지고,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는 그 생각을, 우리는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예요.  바디메오와 같이 현재 자기 인생의 현상유지를, 현실안주를 강하게 거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아갈 것인가?  내가 언제까지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 것인가?  이렇게 살아갈 수는 없어!!  나는 이제 정상적인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돼!!!”  자기 인생의 현상유지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거부하는,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세상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줄로 믿습니다.  요 1 :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그 권세가 오늘 우리에게는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권세는 오직 예수로만, 나타나는 권세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생각을 바꾸고, 오직 예수께로 믿음을 가지고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내게 주어진 이 권세가, 우리 인생에도 나타나서, 우리로 하여금 능력 있는 인생, 남에게 더 이상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는, 오히려 남에게 꾸어주고 나누어 주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디메오는, 자기 인생의 현상유지를 강하게 거부했던 사람입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신은 반드시 예수로 말미암아 눈을 뜨겠다고 하는 강한 집념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48절을 보세요.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바디메오를 꾸짖었습니까?  왜 잠잠하라 했습니까? 
그가 눈을 뜨겠다고 하는 생각이 가당찮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디메오가 예수께 나아와도, 눈은 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 사람들이 바디메오의 이런 모습을 보았을 때, 정신 나간 놈이라고  말 했을지도 모릅니다.  인생이 너무 불행하다 보니까, 저럴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겠지요. 
“야!  바디메오, 정신 차려. 너의 그런 생각이 이루어질 것 같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야.  그러니 그냥 니 운명을 받아들여.  차라리 그것이 속 편한 일이야.”  여러분 이것이 무엇입니까?  현실 안주입니다.  현상유지입니다.
그냥 네 형편대로, 운명을 거부하지 말고, 순응하며 살라는 것이예요. 
그러나 바디메오는, 그런 인생의 현상유지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송명희 시인을 아시지요?  의사가 태아의 뇌를 집계로 잘못 건드려  소뇌가 손상되어, 평생 뇌성마비로 지내야 하는 중증 장애인입니다.
7살 때까지 꼼짝 못하며 누워 지내야 했고, 집이 너무도 가난해서 분유 살 돈도 없었습니다.  정말 어찌 해볼 도리가 없이, 그냥 그렇게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갔습니다.  그러던 중 송명희 시인이 생각을 달리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나이 17살 때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런 생각에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모든 사람들이 다 비웃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불쌍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할 때, 비로서 그녀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녀에게 음성을 들려 주셨는데, “나를 믿으라!  내가 너를 버리지 않으리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할렐루야!!! 
그 사건 이후로, 그녀의 인생은 180도로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신앙의 시를 지었습니까?  주옥같은 시에 곡을 붙여 찬양으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했습니까?  자기 인생의 현상유지를 강하게 거부하고, 오직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갔을 때, 이런 기적적인 인생으로  변화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평생 슬픔으로 누어있어야 하는 인생이, 이제는 기쁨으로 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던 인생이,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감동을 주고, 도전을 주는 영향력 있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과 같은 현실 안주의 생각을 가지지 않고, 인생의 현상 유지를 거부하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오늘 우리에게도,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조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과 믿음을 또 다시 흔들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라도, 바디메오와 같이 더욱 더 소리 지르며,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치며, 예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여러분을 불러 주시고, 여러분의 인생에 모든 답답한 문제들을, 주님의 능력으로 다 해결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런 주님의 음성, 우리 모두가 들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을 살아갔던 이 소경 거지 바디메오가, 자신의  인생을 기적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신앙의 현상유지를, 스스로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제 눈을 떴으니까, 자기 소원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기적적인 인생을 만든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눈을 뜬 그 자체로도, 놀라운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이 한 순간의 은혜의 체험으로 만족하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이 한번으로 끝내지 않고,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의 현상유지를 거부했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52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바디메오가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할렐루야!!!눈을 뜬 그 은혜의 현장에 그냥 머물러 있지를 아니하고,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을 즉시로 따라 나섰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52절을 끝으로 바디메오에 대한 이야기가, 더 이상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능히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는 분명 주님의 제자의 반열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느냐?  “예수를 좇으니라” 라고 하는 이 표현은, 단순히 따라갔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좇았다는 말을 헬라어로 보면 “아콜루떼오”라는 단어를 쓰는데, “모방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닮아가는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 홈 페이지를 보면, 좀 크다 싶은 교회는 유행처럼 사용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님을 만나면 끝이 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 벧엘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납니다.”  믿습니까?
인생의 방황은 누구를 만나면 끝이 납니까?  예수님을 만나면 끝이 납니다.  바디메오는 자신의 인생의 방황을, 예수님을 만남으로 끝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만남으로 신앙인이 된 바디메오는, 자신의 신앙이 이전의 인생과 같이 방황하지 않도록, 눈을 뜬 즉시로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디메오는 자신의 인생에 두 번의 기적을 연출해 내었습니다.  첫 번째 기적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뜬 것입니다.  육신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적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입니다.  이 두 가지의 기적을 이룬 바디메오의 인생, 어떻게 되어졌겠습니까? 평생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살아가게 된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로서 사명을 감당하며,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도 나타내며  살아간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신앙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구원받은 이후 여러분의 신앙은  점점 자라가고 있습니까?  변화되어져 가고 있습니까?  성숙되어져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현상유지의 신앙, 현실안주의 신앙입니까?  아직도 인생의 방황과 더불어, 신앙의 방황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신앙도 바디메오와 같이, 현상유지를 강하게 거부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스카 와일드 쓴 우화적 단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시고 은혜를 베푸셨는데, 하루는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시고자 몸소 방문하셨습니다.  어떤 곳에 갔더니 말도 못하며 늘어진 주정뱅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주정뱅이가 되었나?”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원래 절름발이에다 거지였소, 그 때에는 손만 내밀면 얻어먹을 수도 있어서 편했지요, 아, 그런데 두 발이 다 성하고 보니 아무도 안 도와줍디다. 스스로 벌어먹고 살다보니 힘들어서 술을 먹게 되어 주정뱅이가 됐지요.”
또 한 곳에 가니까 아주 추한 창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아서 “너는 어떻게 이렇듯 비참해졌느냐?” 물었습니다.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본래 창녀였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게 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새 사람이 되었지요. 하지만 막상 새 사람이 되어서 깨끗이 살아보니까 너무도 따분하고, 재미도 없고, 행복도 없고, 영 진저리가 나서 도대체 살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 다시 창녀가 되어 지내다보니 이 꼴이 되었지요, 뭐”

또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 가보니 불량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이렇게 되었나?”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본래 장님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 눈을 뜨게 해주셨지요. 그 때는 너무도 감사했지요. 하지만 막상 눈을 뜨고 보니 세상이 어떻게나 더러운지 몰라요.  못된 놈들도 많고, 부조리한 것도 많고, 내 신경을 건드려 화나게 하는 일이 너무도 많습디다.  그래 어쩌다 보니 그만 깡패가 됐습니다.”

인생의 현상유지를 거부하고, 예수님을 만나 인생의 방황을 끝을 내었지만,  새롭게 시작된 신앙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며, 신앙의 현상유지를 해 온 결과가, 이렇듯 불행한 인생으로 되돌아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재의 신앙에 만족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현실안주는 퇴보입니다.  신앙의 현상유지는 타락입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까?  예전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까?
그러나 예전의 은혜와 축복에 만족하고, 더 이상 변화가 없고, 발전이 없고,  성숙이 없는 신앙이라면, 여러분의 인생은 또 다시 불행해 질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는 바디메오와 같이, 예수를 좇아가는 신앙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쫓아내는 신앙은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더 힘써 예배하시고, 더 힘써 기도하시고, 더 힘써 전도하시고, 더 힘써 헌신 하시면서, 예수를 좇아가는, 닮아가는 제자로서의 인생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 또한 기적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남은 평생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제자의 권능을 가지고,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며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인생과 신앙에 현상유지와 현실안주를 거부하고, 오직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바디메오와 같이 기적적인 인생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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