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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그리스도인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신 33: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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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신 33:26-29)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팔십 세에 호렙산의 불타는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로 무려 40년 동안 한결같이 충성스럽게 이스라엘 백성을 섬겼습니다. 그는 애굽 왕 바로와의 대결, 출애굽, 40년 광야생활을 거치는 동안 어느덧 120세의 고령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이 바라다 보이는 모압 평지에 이르렀을 때, 온 백성을 모으고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모세는 열 두 지파를 하나씩 축복해 주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인가를 다시금 들려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결론적으로 그가 한 말이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한 이 말은 출애굽 후 광야를 지나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자손에게만 적용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성도님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그러하냐 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이 말씀은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말입니다.

오늘 저는 그리스도인이 행복자인 이유에 대하여 말씀해 드림으로써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이 행복자인 이유는 그 자신에게 있지 않고 그를 불러내어 자기 백성 삼아주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돌보심을 받은 것은 그들에게 그럴만한 자격이나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부터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살적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 당시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하필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까닭이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은 그가 흠이 없는 완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창세기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인품이 고상하고 사려 깊고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성경은 아브라함의 실수와 인간적인 약점에 관해서도 증언합니다. 예를 들면, 그가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을 때 애굽인들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했다가 바로가 사라를 후궁으로 들이려고 한 일이 있었고, 사라의 말을 듣고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 같은 사례는 아브라함이 완전무결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말해 줍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합니다.

“1)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그리고 신명기 9장 6절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민이 된 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지 않고 오직 그들을 택하신 하나님께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천국 백성이 된 것은 우리에게 그만한 자격이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62억이 넘는 사람들 가운데서 저와 성도님들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으며, 때가 되자 우리를 부르시고 마음을 열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끔 역사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2장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맞습니다. 오늘 우리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요, 영광스러운 천국 시민이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된 것은 우리에게 그만한 자격이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잘난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능력을 믿고 살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자도 주님을 믿기 어려운데 그것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도 돈으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잘 난 사람, 돈 많은 사람보다는 못나고 가난한 사람을 부르셔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이방인 신자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잘나고 지혜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제쳐 놓으시고 못나고 미련하고 무능한 사람을 택하신 이유를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은 순전히 은혜로 된다는 진리를 밝히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런가하면, 우리가 누리는 행복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누리는 행복이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 행복을 언제까지나 누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으며, 우리가 처한 환경 역시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행복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다면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한이 없으시며, 또한 신실하셔서 그 하신 말씀을 끝까지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받아 천국 백성 된 이 행복을 날마다 누리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이 행복자인 이유는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여수룬”이란 “의인”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너, 의인이여!”라고 칭한 것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 백성이 보여준 불의한 행위에 근거한다면 결코 의로운 백성이라는 평가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목이 곧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도 감사하기 보다는 원망하고 불평을 일삼았습니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광야에서 매일 아침 하늘에서 일용할 양식인 만나를 내려 주셨건만 이 백성은 “매일같이 만나만 먹고 어떻게 살란 말이냐? 우리가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고 불평했습니다.

광야길을 가는 데 길이 험하다고 원망하는가 하면,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무엇이 필요하면 모세에게 와서 요구하면,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해결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일단 원망, 불평부터 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시니 많은 사람이 불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의 제물을 먹고 모압 여자와 행음하여 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이 지나도록 내려오지 않자 아론을 협박하여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서 분향하며 뛰놀았습니다. 이 외에도 이스라엘 자손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결정적인 잘못을 범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열 두 정탐꾼을 뽑아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정탐하러 보냈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회를 하는데 그 중 열 명은 가나안 땅을 악평하고 그곳에 사는 거인족을 보았는데 그들에 비하면 자기들은 마치 메뚜기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가나안 족속은 우리의 밥이라고 하면서 곧 일어나 그 땅에 들어가 차지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열 사람의 말을 듣고 밤 새도록 울면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급기야는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심히 노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도록 벌을 내리셨습니다.

이와 같은 사례들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을 “여수룬”이라, “의인”이라고 칭한 것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분명히 자기 백성을 보고 “여수룬이여” “의인이여”라고 하였으니 어찌된 일일까요? 모세가 실수로 그런 것일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신에 의하여 감동을 받아서 이 말씀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완고하고 목이 곧은 백성에게 여수룬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주신 근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은 죄를 용서 받기 위해 양이나 염소를 이끌고 성막으로 제사장을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그 사람은 제사장이 보는 앞에서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는데, 이는 자기 죄를 짐승에게 전가하는 행위입니다. 그런 다음, 칼을 들어 짐승을 잡았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제물의 피는 양푼에 담아 제단 아래 쏟고 나머지 고기를 번제단 위에서 태웠습니다. 이 제사를 속죄제라고 하는데, 이로써 제물을 바친 사람은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또 일 년에 한번 씩 대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그릇에 담아서 지성소로 들어가서 온 백성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죄사함의 길이 이중으로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소나 양이 제물로 바쳐짐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속량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구약 시대의 속죄 제사는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려주실 영원한 속죄 제사에 대한 모형이요 그림자입니다. 실제로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에 불과합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9장에는 이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구약의 이스라엘 자손이 바친 짐승의 피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그 가치를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고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죄 사함 받았습니다. 불의하고 죄 많은 우리대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는 우리가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을 들라면 양심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양심이 있으므로 우리는 죄를 지으면 양심에 가책을 받습니다. 일전에 어떤 사람이 범죄하고 숨어 지내다가 자수하면서 하는 말이 “죄 짓고는 못 살겠더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죄를 지었더라도 자기 양심이 알고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으면 자기 양심과 하나님에 대하여 불편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세상에 마음에 죄를 숨겨두고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가 남아 있는 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수 없으며,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의 심령에는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복 된 약속들은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만 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죄사함은 행복한 사람이 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사함 받은 것은 감옥에 갇힌 사형수가 특사로 풀려난 것과도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죄값으로 인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 받고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 받은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렇다면 성도님들은 행복자가 되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셨으므로 행복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즉 이 속죄의 기쁨을 날마다 누리면서 행복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이 행복자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처소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기를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처소는 피난처를 의미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읽어 보면, 이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을 쇠약하게 만들어 없애버리려고 온갖 노역으로 괴롭혔으나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셨으므로 압제를 당할수록 더 번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처소가 되시니 창일한 홍해가 이스라엘 자손을 삼키지 못하고 좌우로 갈라져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을 뒤쫓아 홍해로 들어온 애굽의 마병들은 모조리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광야생활을 하는 40년 동안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추위에서 보호해 주신 것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처소가 되셨다는 증거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품을 상징합니다.

다윗은 노래하기를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심이로다”(시 37:39)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62:2)고 하였습니다. 이는 다윗이 실제로 경험한 바를 간증한 것입니다.

그가 사울왕에게 쫓기는 몸이 되어 광야로 피하였으나 거기까지 군사를 이끌고 추격해 왔습니다. 실로 삶과 죽음이 한 걸음밖에 되지 않는 위급한 순간을 여러 번 만났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사울왕을 죽일 기회를 얻었으나 살려주었습니다. 이 같은 경험을 통해서 다윗이 깨달은 것이 곧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시요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광야 같은 인생길을 가노라면 여러 가지 난관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인생의 폭풍우는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그럴 때에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있다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이 찬송가와 같이 우리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에 안길 때 그 누구도, 그 어떠한 세력도 겁낼 것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은 그 힘이 결코 다함이 없는 권능의 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시련과 고난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피난처인 하나님의 팔에 안겨 있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을 보십시오. 광야를 지날 때 아말렉 족속이 공격해 왔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물리쳤습니다. 또 시혼 왕 옥이 이스라엘을 대적했으나 오히려 파멸하고 말았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할 때는 철병거로 무장한 일곱 족속을 초개같이 무찌르고 그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이 같은 승리는 이스라엘 자손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권능의 팔로 대적을 멸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주신 결과였습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말하기를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적을 막아내는 방패가 되실 뿐 아니라, 적을 멸하는 영광의 칼이 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되심을 믿을 때, 어떤 악한 세력이 위협해도, 삶에 폭풍우가 휘몰아쳐 와도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같은 것들이 결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처소가 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복된 삶을 보장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백성들이 거하는 땅을 대적들이 감히 넘보지 못하는 안전한 곳이요, 풍부한 물을 내는 샘이 있고, 때를 따라 우로가 내려서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한 곳으로 만들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세가 언급한 축복은 비단 육신의 복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복을 포함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복을 받았기 때문에 육신의 복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이 복 받는 올바른 순서입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너의 처소가 되신다는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영원하신 처소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이스라엘 자손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했으나 그곳은 영원한 가나안인 천국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4장 8절, 9절에는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다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영원한 처소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처소가 되시는 이 사실로 인하여 항상 마음에 행복을 맛보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그의 자녀가 된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은 달리 없습니다.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하신 것처럼, 능력에 있어서 하나님 같은 자가 없을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 돌보시는 데도 하나님 같은 자가 없으십니다. 이와 같으신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저와 성도님들의 하나님이 되시니 어찌 우리가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하나님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이 말씀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 된 성도님 모두에게 그대로 적용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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