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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마지막 날의 현상과 역설 (전 8:6~8, 요 6: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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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의 현상과 역설 (전 8:6~8, 요 6:39~40)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의 파멸과 위협을 상징하는 것으로 ‘운명의 날 시계(Doomsday Clock)’가 있습니다. 1947년 미국 핵과학자협회가 만든 지구의 종말을 예고하는 시계입니다. 지난 1월 17일 북한의 핵개발과 여러 가지 변수로 이 시계가 오후 11시 55분까지 당겨졌습니다. 이 시계가 가장 자정 가까이 간 때는 1953년 미국이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을 때입니다. 이때는 오후 11시 58분이었습니다. 이후 1991년 냉전이 끝난 뒤에 다시 뒤로 돌려져서 11시 43분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911사태 이후 2002년에는 11시 53분이었는데 이제 11시 55분이라고 합니다. 이 시계는 만들어진 다음 모두 17차례나 조정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운명의 날이 거의 다가왔음을 말합니다. 이 시계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마지막 날이 가까웠음을 알고 있고 그래서 늘 각성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당면한 시간에 민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것이 지혜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3:2-8을 보세요.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모든 것에 때가 있는데 때를 잘 아는 것이 지혜이고 승리자입니다.

  예수님은 가나 혼인 잔치에서 어머니께서 포도주가 없다고 하시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이르지 아니 하였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의 때가 아직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공생애를 마치고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드시기 전에는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유월절을 지키자”고 하셨습니다. 내 때가 되었는지 아닌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이번 대선에서도 보니 이것이 자기 때인지 아닌지 모르고 출마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때를 모르면 고생합니다. 자기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까지 고생을 시킵니다.

  우리는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태안의 기름띠를 제거하는 일은 우리에게 시급한 일입니다. 봉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물때를 잘 맞춰가야 합니다. 우리교회에서도 매 주간 가서 봉사합니다. 그런데 이번 주간은 가고 싶어도 못갑니다. 물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간은 물이 차서 가도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물때를 못 맞추면 가도 물이 차서 일을 못합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때를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무엘상서 17:14에는 “다윗은 말째라”고 다윗을 소개합니다. ‘말째’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학카톤’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나이의 개념을 넘어 등급을 의미합니다. 가장 늦게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제일 변변치 못한 형제라는 말입니다. 우리말로 꼬마, 꼴찌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양을 지키는 일은 ‘학카톤’의 몫이었습니다.

  우리의 시간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날이란 시간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의 질이며 인격의 개념입니다. 마지막 때란 시간 개념이 아니라 종말 의식의 개념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매일이 마지막 날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매일이 새로운 날입니다. 이런 시간을 가진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매일은 ‘남은 인생의 첫날’(The first day of the rest of your life)입니다. 이런 희망을 가지고 삽시다. 동시에 매튜 헨리가 말한 대로 “우리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것이 매일의 일이 되어야 한다.”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16:2-3에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하십니다. 시대를 분별하는 능력, 때를 알고 준비하는 지혜를 가지고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마지막 날은 모든 것이 끝나는 죽음의 날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내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개인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인류의 종말도 분명히 언젠가 오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마지막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은 끝 날입니다. 죽음의 날입니다.
  과거라는 시간은 죽은 시간입니다.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죽은 시간과 죽은 날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 성경은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라고 합니다. 마지막 날, 끝 날에 대하여 인간은 속수무책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마지막 때는 성취하는 때입니다. 열매를 거두는 기회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끝나야 성취합니다. 끝나야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도 죽기 전에는 참 열매가 없습니다. 죽어봐야 참 열매를 압니다.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벼가 익어 쌀을 추수하면 벼는 볏단으로 변합니다.

  신학적인 시간으로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입니다. 하루가 24시간이라는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는 영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입니다. 사람마다 시간의 개념은 다 다릅니다. 그리고 그 외에 ‘플레루’(pleroo)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4에 “때가 차매”라는 말씀이 그 말입니다. 이 말은 어떤 것이 완전히 완성되거나 끝났음을 가리킵니다. 카이로스는 어떠한 과업이나 열매를 결실하기 위한 기회를 가리키는 반면, 플레루는 그것이 성취됨을 의미합니다. 아기를 가지고 뱃속에서 자라서 해산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죽을 만큼 고생한 끝에 아기를 낳습니다. 끝나는 시간은 죽음의 시간입니다. 죽지 않고 죽을만해야 열매가 있고 성취감이 있습니다.

  부부가 함께 오래 사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짝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하늘나라에 가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었다고 했는데 그런데 왜 짝을 지었으면 같이 오래 살게 하지 한쪽을 먼저 일찍 데려가 짝을 잃게 합니까? ‘사별’이란 단어는 bereavement인데 이 말은 ‘강탈하다’는 뜻을 가진 ‘reave’에서 나온 말입니다. 억지로 빼앗다, 약탈하다, 박탈하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시간은 하나님이 억지로 빼앗는 시간입니다. 아무리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시간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다시 가지고 가시는 것입니다. 언제 내 생명이나 시간이 내 것인 적이 있었습니까? 빼앗기기 전에 드려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나의 시간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평생토록 주 위해 봉사하게 하소서.” 참 지혜로운 자의 찬송입니다.

  인간이 끝나는 시간은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시간입니다. 인간의 시간이 끝나면 하나님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우리 자신이 끝나는 지점이 바로 하나님의 출발점입니다. 죽어야 사는 것이 우리의 비밀이며, 끝나야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비결입니다.

  이삭은 모리아산에 올라가면서 자신이 제물이 될 것도 알지 못하고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몇 시간 더 올라가야 하나요?” “더 이상 갈 데가 없을 때까지 가야지. 끝까지 가야 한다” “누구의 끝이요?” “너의 끝이란다. 더 이상 갈 데가 없을 때까지 가라. 그 지점이 바로 너의 문제가 하나님의 해답을 만나는 곳이란다.” 이런 대화를 하면서 같을 것입니다. 끝까지 가야 하나님을 만납니다. 모든 끝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한 해의 끝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였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야구선수인 요기 베라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마지막이지만 끝난 게 아닙니다.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닙니다. 마지막 날은 끝입니다. 그러나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마지막 날의 역설입니다.

둘째, 마지막 날은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사는 날입니다.

  요한복음 6:39에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마지막 날은 잃어버리고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사는 날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40에는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합니다. 마지막은 또 다른 시작입니다. 다시 사는 날입니다. 마지막은 끝이고 죽음일 뿐만 아니라 다시 사는 날이고 다시 시작하는 날입니다.

  은퇴하다(Retire)란 말은 타이어(tire)를 다시(re) 갈아 끼우고 시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인생에서 은퇴란 없습니다. 죽어야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자체가 무엇인가 소명이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퀴를 갈아 끼울 수 있게 바퀴를 준비해 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다음 마지막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창조 상으로는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의도 상으로는 첫째입니다. 하나님의 시작은 창조이지만 인간은 창조되자마자 안식부터 하였습니다. 인간을 위한 천지창조의 목적은 안식입니다. 마지막 날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은 제 8일에 계속 됩니다. 우리에게 제 8일은 끝나지 않습니다. 7일 이후의 날인 8일은 영원한 안식의 날입니다. 그래서 오랜 기독교 전통에서 8은 영원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8을 옆으로 눕혀 놓으면 무한대입니다. 언제나 마지막 후에는 영원한 시작이 있다는 것입니다.

  7세기의 영성가 존 클리마쿠스는 “당신이 오늘 하루를 마지막 날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날을 경건하게 보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항상 마지막을 생각하며 살아야 참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을 마지막 날로 생각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끝은 없습니다. 매일 새롭고 영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매일을 마지막으로 살 수 있다면, 마지막을 아름답게 살 수 있다면 모든 날이 경건한 삶입니다. 하루하루가 보람 있는 삶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보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겠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기대감이란 인간의 특권입니다. 마지막은 또 다른 새로움의 기대감을 줍니다. 2007년은 이제 마지막입니다. 그렇다고 절망입니까? 모든 것을 포기합니까? 아닙니다! 2008년이 어떻게 다가올까? 기대감과 행복감이 함께 밀려옵니다.

  마지막 날은 결코 잃어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얻고, 살고, 다시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저는 대선 기간 동안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 말은 참 듣기 거북한 말이었습니다. 지난 10년은 쓸데없는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학습 대가를 너무 많이 지불해서 그렇지 잃은 시간이라고 보진 않습니다. 시간은 잃어지지 않습니다. 학습효과를 얻은 시간입니다.

  욥기 5:24에는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것을 잃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뒤를 돌아보아도 절대로 잃은 것이 없습니다. 악에서도 선을 배웁니다. 실수에서도 유익을 배웁니다.
  궁극적으로 죽음은 다 잃은 것 같지만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살아서는 도저히 얻지 못하는 것들을 얻고 살게 될 것입니다. 끝난 것 같지만 시작한 것입니다. 순간을 잃고 영원을 얻는 것이 죽음입니다. 우리 모든 마지막 때가 마찬가지입니다. 잃은 것 같지만 얻고, 끝난 것 같지만 또 다른 시작이 있습니다.

  나는 죽지만 내 자손이 번성합니다. 나무는 죽는 듯하지만 새싹이 납니다. 산불로 폐허가 된 것 같지만 다시 생태계가 소생합니다. 그래서 끝은 또 다른 시작이고, 마지막 시간은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전도서 1:4에는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히 다시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 안에 살고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 이후에 이런 인생을 비유하는 말이 생겼습니다. 인생의 30년은 배우는 시간입니다. 전반전입니다. 그 다음 30년은 일하는 시간입니다. 후반전입니다. 후반전이 끝나면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장전이 있습니다. 그 후의 30년은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간입니다. 연장전이 끝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부차기가 있답니다. 10년은 더 살아야지요? 요즘은 아예 죽을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짧은 인생을 길게 사는 비결은 또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마지막을 준비하는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라나타’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말입니다. 작은 종말을 생각하는 삶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종말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이런 그들의 종말적 신앙, 마라나타의 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역동적인 삶을 살게 하였고 선교의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마지막 날을 학수고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의 인사도 ‘샬롬’에서 ‘마라나타’로 바뀌었습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기대감에서 인사도 바뀐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미국에 유학을 가시고 어머니와 우리 사남매가 아버지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무엇을 사달라고 할 때마다 “아버지 오시면 사줄게” 하셨습니다. 아버지 오시면 좋은 크레파스도 생기고, 손목시계도 생기고, 좋은 신발도 생기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오셨지만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오시니까 크레파스도, 손목시계도, 좋은 신발도 별로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오셨다는 것이 그냥 좋았습니다.

  그 때 제가 초등학교 2학년, 3학년 때였는데 저의 어머니는 가정예배 드릴 때마다 재림에 관한 찬송을 부르고 성경 말씀도 온통 재림이 주제였습니다. “대속하신 구주께서 구름타고 오실 때”, 요즘 찬송가에는 없지만 “천지가 진동하며 햇빛 흐리고”라는 찬송이 우리 가정예배의 주제가였습니다. 성경말씀도 온통 별이 떨어지고, 하늘이 종이 축같이 접히고, 땅이 갈라지는 말씀이었습니다. 장성하고 나서 어머니께 여쭈어봤습니다. “왜 그 때 매일 밤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넣었습니까?” 어머니는 그 때 한국전쟁 직후에 사회가 혼란할 때인데 아버지는 미국에 가고 안 계시고 언제 또 전쟁이 날지 모르는데 목사 자녀라고 공산당의 핍박이 올까봐 미리 단련하시느라 그렇게 하셨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찬송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나팔 소리 천지 진동할 때에”입니다. 저는 재림의 신앙을 어릴 때부터 마음에 간직한 것이 지금은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전도서 8:7에는 말씀합니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사람은 장래의 일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은 마지막이 두렵지 않습니다. 마지막은 끝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시작이 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의 역설적 의미입니다.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마지막 시간에 대한 지혜를 배우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을 잘 준비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을 기대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농구에서는 버저가 울리는 순간 손에서 벗어난 공이 그물을 출렁이며 골대에 들어가 승리하는 ‘버저비터’가 있습니다. 축구에서는 경기 시간이 종료되었지만 심판의 재량으로 3분 정도 주는 ‘인저리타임’에 골이 터져 승패가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끝이 오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 하여 마지막 순간에 승부를 바꾸고, 인생을 바꾸는 멋진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하루를 천년같이 사세요. 그리고 2008년을 기대감 속에서 맞이하세요. 이것이 마지막 주일을 맞는 우리의 신앙적 자세입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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