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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예수님의 탄생과 시대상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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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탄생과 시대상 (눅 2:1~7)

십이 월 이십 오일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탄생하신 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가 쓴 말라기를 보면, 그 시대의 시대상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사는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 이하를 보면, 누구보다도 거룩하게 살아야 할 성직자인 제사장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짐작해 보건대 성직자가 이정도라면 평신도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6절에서 “하나님을 멸시했다.” 7절에서는 “더러운 떡을 하나님의 제단에 드렸다.”고 했고 8절에서는 “눈먼 희생제물을 바침”이라고 했다. 이를 두고 너희 총독에게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려보라 그것을 그가 받겠느냐고 하나님께서 책망하셨습니다.

또 12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힘” 13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번거럽게 여기고 코웃음을 치고 멸시했다”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10절에서는 헛된 제사를 드리지 않도록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탄식하셨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나님을 속상하게 해드린 그들을 향해 “너희 복을 저주하고, 너희의 얼굴에 똥을 바를 것이며,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말 2:2,3,9). 또 10,11,15절에서 가정이 파고되고 이방신의 딸과 결혼하며, 조강지처를 버리고 학대하며 쫓아냈습니다.

또 2:17, 3:8을 보면 “말로 하나님을 괴롭힘”,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함 즉 하나님의 몫인 십일조와 헌물을 가로챔” 그 결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라고 했습니다(말4:1).

솔제니친의 자서전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내가 돈강 연안의 로스토프시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 콤소몰(소비에트 연방 공산주의 청년동맹) 단원들의 사주를 받은 동네 아이들이 내가 어머니를 따라 그 고장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늘 나를 놀려댔고, 목에 건 십자가를 떼어버리기까지 했다. 몇 년 후 나는 몇몇 연로한 분들이 러시아에 밀어닥친 그 크나큰 재앙에 대해서 이렇게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어. 그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거지.’ “

그 이후로 솔제니친은 러시아 혁명사 연구에 근 50년을 바쳐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면담했고, 수백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이미 8권의 책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누가 자기에게 약 6천만 명의 러시아 사람들의 생명을 삼켜버린 그 무서운 혁명이라는 것이 왜 일어났는지 그 주된 원인을 가장 간명하게 정의해 보라고 한다면 자기는 주저함이 없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답을 되풀이하는 것 외에 더 명확! 한 답변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 시대에 저질러진 그 모든 죄악은 모조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인간들의 정신적 파탄에서 유래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400여 년 동안은 선지자가 없는 그야말로 영적으로 암흑시대였습니다. 자연히 예수님이 탄생하였을 때에는 나라가 망한지 이미 오래 되었고,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본명은 Caius Octavius (BC 30~AD 14)입니다. 그는 줄리어스 씨저의 조카로 황제숭배를 강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지역은 새해를 그의 생일인 9월 23일로 바꾸고 자신을 구세주와 신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는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호적조사를 실시했고, 호적에 이름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고향에 가서 호적에 이름을 올리도록 명령했습니다. 이에 요셉과 마리아도 그들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심으로 주전 650년 경에 미가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미가 5:2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가짜 구세주가 통치하고 있을 때 진짜 구세주인 예수님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2:7을 보면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위해 아무도 방을 내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시대 사람들의 고약한 민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만삭이 된 여인에게 아기를 낳을 방 하나도 내주지 않아 할 수 없이 마굿간에 들어가 구유에 아기를 낳게 되었으니 얼마나 몰인정한 사람들입니까. 더구나 성령의 감동에 순종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수 있었을까요.

누가복음 4:24~26에서 예수님은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위하여,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는 한 여인을 준비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엘리야를 대접하는 축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가족이 3년 반 동안의 기근이 끝날 때까지 굶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에게는 이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감동이 일어나는 분은 안 계십니까? 이런 감동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습니다. 또 여러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단 한 사람에게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감동을 주십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사렙다 과부처럼 특별한 택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축복이요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실 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마음이 강퍅해지고 기회는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여 집사님은 영이 아주 밝고 맑은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면 그대로 순종하는 아름다운 분입니다. 오래 전에 한번은 어느 분으로부터 좋은 시계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시계도 제법 쓸만해서 선물로 받은 이 시계를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기를 원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던 중 마침 어떤 자매가 떠올라 그 자매에게 그 시계를 전해 주게 되었습니다. 알고보니 그 자매가 어느 집회에 참석했다가 드릴 헌금이 없어 대신 자신이 오래 착용했던 시계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정확하게 그 자매가 새시계를 받도록 그 집사님에게 감동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또 한번은 구역 식구들을 위해 기도하던 중에 어렵게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사는 집사님이 자꾸 떠오르며 감동이 왔습니다. 그리고 퍼뜩 그 가정에 쌀이 떨어져 밥을 굶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 집사님은 급히 쌀집에 연락을 하여 그 가정에 쌀을 몰래 배달시켰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가정에 쌀독이 비어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전지전능하십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뿐 인격을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를 보고 계시고 우리 말을 듣고 계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만지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감동을 주시면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영이 맑아지고 더욱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될 줄 믿습니다.

마태복음 2:1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말했을 때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이 소식을 듣고 일제히 소동을 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헤롯은 폭군으로 악명이 높은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방인인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나중에 이 헤롯성전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소동한 이유는?

1. 전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타락하면 영적으로 어두워지고 무지해집니다. 이들은 정작 고대하던 메시야가 오셨지만 모르고 있다가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에 소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메시야를 맞이 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타락하면 죄 가운데 빠져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등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수님을 맞이할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그에게 찾아가 경배하겠다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을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동방박사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 분문 2:8을 보면, 헤롯왕도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라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한 명의 군사도 박사들 편에 붙여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헤롯 역시 동방박사들의 말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참 후에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면 자기의 위치가 흔들리게 될 것을 생각하고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때를 기준으로 하여 두살 이하의 모든 아이들을 다 죽이는 악랄한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오늘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해산하려고 우리에게 찾아왔다면, 그분을 영접해 줄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우리도 그 당시 사람들과 달리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 소련이 공산화 되기 전까지는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그때 시베리아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 중에는 예수님이 오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늘 파티를 할 때마다 가장 좋은 자리에 예수님의 자리를 상징하는 가장 좋은 빈 의자를 두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성탄절,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즐기는 파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문을 열고 밖에 나가 보니 눈보라가 치는 이 추운 겨울에 왠 거지 차림의 남루한 옷을 입은 한 나그네가 추위에 떨며 서 있었습니다. 이때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보고 “예수님이 오셨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 나그네를 따뜻하게 영접하고 예수님의 빈 의자에 그를 앉혔습니다. 그리고 기뻐하며 파티를 즐겼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 이 이야기를 쓴 책을 읽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마태복음 25:31~46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우리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마음속에 감동이 오는 이웃이 있다면 외면하지 마시고 사랑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헐벗고 굶주리는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곧 예수님께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올해도 예년과 같이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실시합니다. 이 일에 동참하시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듯이 죄악이 관영한이 세상이 점점 어두워질 수록 예수님이 오실 날이 가까이 왔음을 알고, 항상 재림하실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를 해 놓고 우리는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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