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송년] 간증이 풍성한 교회 (갈 2:20)

  • 잡초 잡초
  • 305
  • 0

첨부 1


간증이 풍성한 교회 (갈 2:20)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름을 남길 것이 아니라, 위대한 간증을 남겨야 한다.” 간증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함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 하는 일을 말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 세상에 간증을 남겨야 한다.

  성경적인 간증은, 감정적 흥분상태에서 생기는, 변화를 말하지 않는다. 진리에 대한 분명한 체험, 말씀 속에서 내가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분명한 체험을 말한다. 이러한 체험적인 신앙이 있을 때,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뒤로 물러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

  성경에는 믿음의 사람들이 남긴 위대한 간증들이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고,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참됨을 체험하고 전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간증을 듣는데 만족하지 말고, 간증의 주인공이 되어야, 신앙생활을 재미있게, 또한 확실하게 할 수 있다.

  1970년대 ‘신과 인간’, ‘영성과 이성’을 놓고, 기독교계와 격한 논쟁을 펼친, 당대 최고의 석학이며 지성으로 꼽히는 이어령 전 교수가,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고, 금년 7월 23일 일본 도쿄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직후 “자신은 자연인으로 태어났을 때의 기억은 없지만, 신령으로, 영성으로 태어난 오늘의 기억은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지금까지는 이성과 지성, 의지로 살아왔는데, 그것만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잘 모르는, 또 다른 영적 세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내가 크리스천이 되리란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자신이 넌-크리스천에서 크리스천이 됐다. 이건 내게 있어서, 어떤 기적보다 큰 기적이라고 했다. 무신론자였던 그가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

  이 교수의 딸 장민아씨는, 미국의 변호사이며 LA지방 검사였다. 그러나 1992년 갑상선 암 판정을 받고 수술했지만, 재발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유치원에 들어간 민아 씨의 작은 아들이 ‘주의력 결핍 행동 장애’로 판명이 났다.

  딸 민아씨는 자신의 몸조차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아들의 치료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 쏟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눈이 점차 흐릿해졌다. 망막이 손상돼 거의 앞을 보지 못할 정도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어령 명예교수 부부는, 급히 미국으로 건너갔다.

  눈이 안 보여 설거지도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딸을 보고, 두 부부의 마음은 애가 탔다. 그는 동네의 한 작은 교회를 찾아가, 무릎 끓고 기도했다. “하나님, 사랑하는 내 딸에게서 빛을 거두시지 않는다면, 남은 삶을 주님 위해 살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딸과 함께 한국에 돌아 온지 얼마 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 교수의 딸인 민아 씨가 점차 시력을 회복하더니, 정상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지만, 의사는 망막이 다 나았다고 진단했다. 또한 암도 치료받았다. 이적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민아 씨의 눈물의 기도로, 아들의 병이 완치되었다. 이렇게 딸과 손자의 병이 치유되는 과정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남의 일이지만 얼마나 신나고 좋은가? 우리교회가 2008년도에는, 간증이 풍성한 교회가 되기 원한다. 그러면 어떠한 간증을 남겨야 할까?

1. 십자가의 죽음을 간증하자(20上).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같이 죽었다. 따라서 자신이 죽었다는, 분명한 경험이 있기를 바란다.

  많은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새로운 삶을 살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은 신앙생활에 실패하여, 믿음의 낙오자가 되어버린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기 전, 옛사람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려면, 먼저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육신의 뜻대로 살아온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는,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애를 살아갈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십자가뿐이다. 따라서 십자가를 거치지 않은 회개는, 모두 다 거짓 회개일 뿐이다. 한 죄인이 십자가에서, 옛사람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남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구원받음으로,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수는 없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다. 구원받았다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축복이, 저절로 굴러 들어오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저절로 가정에 평화가 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평안과 축복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활을 살아갈 때, 얻을 수 있다. 우리 가정에 평안이 없거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구원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생활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 없는 성경은, 세속 종교의 경전에 불과하며,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세속 종교에 불과하다. 십자가 없는 체험은, 죽은 정통, 죽은 교리, 죽은 교회를 초래한다. 진정한 회개는, 세상을 포기하고, 십자가로 나아가야 한다.

  이어령 전 장관 딸, 장민아 집사 간증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내 자아가 죽으니,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았어요. 아이의 병이 낫지 않아도, 내가 시각장애인으로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넉넉한 은혜를 알았거든요.” 바로 이런 모습이,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한 자의 삶이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죽은 사람은 화를 내지도 않는다. 죽은 사람은 남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욕심도 없다. 높은 자리를 탐하지도 않는다. 자기 의지가 없기에, 남이 시키는 대로 순종한다. 낮은 자리에 겸손히 누워있다.

  우리는 율법을 향하여 죽은 사람이기에, 내 생각과 기준으로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면 안 된다.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생각하면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이해가 된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그것이 틀린 것은 결코 아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상대방을 내 생각에 맞추려 하지 말고, 상대방의 다른 생각을 ‘아! 내 생각과 다르구나!’하고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의 법을 실천하며 살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사랑이 많고 좋으신,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게 되었다. 동시에 믿기 전의 마귀의 속성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지, 신앙생활도 더욱 잘 해야지, 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읽고, 교회 봉사도 많이 해야지 마음을 먹는다.

  그러다 은혜가 떨어지면, 마귀의 속성이 금방 드러나, 낙심하고, 좌절하고, 믿음이 형편없이 떨어진다. 구원받은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의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육신의 정욕을 위하여 살아가려는 나를 죽여야 한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내가 죽어야 산다. 내가 죽어야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산다. 또한 내가 속한 공동체가 산다. 바울처럼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2.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간증하자(20中).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 말씀을 보다 쉬운 말로 원문을 직역하면 이렇다.

  “나는 산다. 그러나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해 왔던 옛사람이 죽었으니, 이제 새로운 생명, 그리스도가 나를 지배하는 생애가 전개된다는 말씀이다. 이 새로운 생명은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의 임재를 의미한다.

  (롬8:9)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성령님께서 나를 지배하셔야 한다. 믿는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고, 육신의 생각대로 살아가면, 사는 방식이 잘못된 사람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확실히 자기 자신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나라고 하는 육의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고,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애를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살아계셔서, 마음과 생각을 붙잡아, 좋은 생각, 좋은 일을 하도록 만드신다. 주님께서 우리 속에 계시니까, 생각과 생활 속에서 주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주님께서 우리 속에 계시면, 주님의 능력을 힘입게 된다.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D.L 무디가 사용한 성경을 보면, 온통 T자와 P자로 표기되어 있다. “T자는 Tried요, P자는 Proved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시도했더니, 이 말씀이 입증되어진 말씀 위에는 T자와 P자를 적어 놓았다고 했다.

  옛날에 아주 지독한 구두쇠 부자 영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 구두쇠 영감님이 회갑을 맞게 되었다. 그래서 종들은 ‘회갑 날이니까 오늘 하루는, 잘 먹고 잘 쉴 수 있겠지’하고, 다들 기대를 잔뜩 했다. 그런데 이 지독한 영감님은, 그 날조차도 쉬지 못하게 하면서, 종들에게 새끼를 꼬라고 하였다.

  그것도 가늘고 길게 말이다. 그러자 종들이 투덜댄다. “오늘 같은 날 무슨 새끼를 꼬냐!” 그런데 유독 한 사람만이, 그 새끼를 가늘고 길게 꼬라는 말에 순종했다. 잔치가 다 끝난 그날 저녁에 이 구두쇠 영감님이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꼰 새끼를 가지고 오너라. 그리고 거기다가 너희가 끼울 수 있을 만큼, 엽전을 가득 끼워 가지고 가서,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아라.” 새끼를 제대로 안 꼰 사람들은, 엽전을 제대로 가져가지 못했다. 그러나 가늘고 길게 꼬았던 사람은, 많은 엽전을 끼워 가지고 나가서, 잘 살았다고 한다.

  우리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어려운 난관에 부딪힐 때도, 늘 주님께서 주인이기에, 주인 되신 하나님께 부탁하면, 주인이 돌보아주신다. 모르스 부호는 가장 쉽고 유용하게 만들어진, 전신 부호로, 1832년부터 인공위성통신으로 대치되기까지, 주요 해상구조신호로 사용되었다.

  이 모르스 부호는 사무엘 모르스 교수가 발명했는데, 하루는 그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다. 교수님은 발명품을 연구하고 실험하는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중단하신 적은 없나요? 예! 여러 번 있었지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하셨나요?

  저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고, 그로 인해 모르스 부호를 발명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지금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축복을 주신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구주로 모시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기 때문이다. 모르스 교수가 모르스 부호를 발명한 뒤, 제일 먼저 보낸 전문이, 잠언3장 5-6절이었다고 한다.

  (잠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런 위대한 신앙인이기에, 하나님이 놀라운 전신부호를 발명하게 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사용하게 만들어 주셨다.

  우리의 삶의 주권은 주님께 있다. 우리 인생이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 주님이 주권자이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하고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형통한 길로 인도하신다. 이런 사람들이 되시기 바란다.


3.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주님의 사랑을 간증하자(20下).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을 직역하면, “믿음 안에서 나는 산다. 하나님의 그 아들의, 나를 사랑하신 자,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자의”라는 말씀이다. 즉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사는 사람은, 아름다운 간증이 있다.

  우리 인생에는 무거운 짐들이 많다. 사람마다 조금씩 달라도, 모두 다 인생의 무거운 짐들이 있다. 이 모든 짐을 나 혼자 지고 가려고 하면, 교만이고, 불신이다. 주님께 맡기며 사는 것이 믿음이다. 주님은 우리의 실수와 허물을 탓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의 실수를 복으로 바꿔주시는 분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이런 간증을 남기도록 만들어 주신다.

(1) 여기까지 도와주신, 에벤에셀의 은혜

우리 성도의 과거를 한 마디로 하면 에벤에셀이다. (삼상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사무엘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여호와의 도우심에 감사하며, 미스바와 센 사이에 에벤에셀의 돌을 세웠다. 우리도 지금까지 도와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에벤에셀의 비석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 보자. 우리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위기와 어려움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사고의 위험, 질병의 위험, 생계의 고통, 부부의 갈등, 자녀의 고통 등등 정말 많다. 그런데 우리가 잊고 있어서 그렇지, 사실 얼마나 많은 크고 작은, 역경과 고통 속에서 살아왔나요? 영적으로는 또 어떤가? 알게 모르게 지은 죄, 신앙생활의 방황, 시험으로 인한 위기…, 어찌 다 열거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도와주셨고, 지켜주셨다. 구원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짐은, 우리의 자격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로 받았을 뿐이다.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는, 분명히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

(2)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은혜

성도의 현재 모습은 임마누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동행하심이 없이는 설 수 없다는 고백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다. 포도나무를 떠난 가지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 있는, 열매 맺는 가지일 뿐이다. 마지막 임종을 하면서 웨슬리 목사님은 “내 평생에 내가 가장 좋았던 것은, 나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신앙인은, 무슨 일이 있든지 담대하고 용감하며, 환경에 좌우되지 아니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성령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다.

(3) 앞날의 좋은 것을 준비하고 계시는 여호와 이레의 은혜

성도들의 미래의 고백은,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신다는 확신이다. 아브라함의 장래 길을 인도하셨듯이, 우리의 장래도 여호와께서 인도하시고, 준비하심을 믿어야 한다.

  인간은 아무도 얼마를 살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살아야할 미래가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믿음으로 사는 자는, 아브라함의 뒤에 수양을 예비해두신 여호와 이레의 복이 앞날에 있다. 성도들은 미래를 염려하면 안 된다.

  과거에도 함께 하시고, 지금도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장래에도 함께 하심을 믿고 전진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등불과 같이 인도하신다. 등불은 비록 전방 2m 이상은 비춰주지 못하지만,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할 때마다, 등불도 전진하면서 길을 밝혀준다.


  결론이다. 올해도 참 힘들고 어려웠지만, 지금까지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잘 살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을 반역하며, 내 멋대로 살아온 일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죄송할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이르게 해주셨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수가 있었을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우리들을 도와주시는 분이다. 사자굴 속의 다니엘도 구원해 내셨고, 풀무불 속에 던짐을 받은 그의 세 친구도 구원해 주셨다.

  문둥병자도 고쳐주셨고, 귀신에게 끌려서 무덤 사이에 살던 자도 고쳐 주셨고, 무덤 속에 장사된 나사로까지 살려주셨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경험,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체험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란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