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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구영신] 빈배에 만선을 채우고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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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배에 만선을 채우고 (눅 5:1-11)

오늘은 금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 우리는 새로운 한해를 다시 맞아들이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살아온 한해를 돌아보는 심정이 어떠하십니까? 해마다 연말이 되면 교수신문은 국가 상황을 나타내는 그 해의 대표 사자성어를 발표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가 좀 눈 여겨 본 것은 지난 5년 동안 참여정부가 들어선 첫해인 2003년은 방향을 못 잡고 헤매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우왕좌왕(右往左往)이 선택됐고,2004년에는 떼를 지어 상대를 공격한다는 당동벌이(黨同伐異)가 등장했습니다. 2005년은 물이 아래에, 불이 위에 있어서 불과 물의 위치가 거꾸로 잡힌 채 불이 오히려 꺼지는 모습을 나타내는 상화하택(上火下澤)이,2006년에는 구름은 잔뜩 있지만 결국 비는 오지 않는 모습을 나타내는 밀운불우(密雲不雨)가 선택됐습니다.

그런데 올해의 사자성어는 '자기기인(自欺欺人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인다는 뜻)'으로 선정됐습니다. 사실 올해를 돌아볼 때 "1년 내내 한국사회를 뒤흔든 학력 위조, 논문 표절 등 모두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다 보니 스스로 도취돼 자신까지 속이는 지경까지 온 것"이 아닙니까? 참 답답하지 않습니까? 참여 정부로 시작한 우리의 기대가 이런 결말로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니 허탈감도 크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사회 속에 파묻힌 우리 자신도 금년한해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고 세월을 보냈는가 하는 자괴감을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금년한해 내 인생이 후퇴하거나 내 삶의 터가 망가진 실패감으로 한해를 결산해야 하는 가슴아픈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하신 분들, 건강에 실패하신 분들, 혹은 인간 관계에 실패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직장을 잃고 방황의 한해를 보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금년 한해 몸부림치고 애쓴 세월이었지만 도무지 내 인생의 강에서 내가 낚아 올린 수확이 변변히 없다고 허무감을 느끼시는 분들도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제자 베드로가 바로 그런 심정으로 그 어느 날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날 호숫가에서 만난 낯선 나그네에게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습니다." 이는 단지 하소연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닷가에서 잔뼈가 굵어온 어부의 이 탄식은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운데도 베드로처럼 금년 한해를 살아오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을 보면 적어도 제자 베드로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2절에 보면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본문을 동일하게 다루고 있는 마4:21절에는 그물을 깁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물을 씻는다든지 혹은 그물을 깁는 행위가 어부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물이 씻겨져 있지 않으면 통상적으로 그물에는 바다 잡초식물들이 걸리게 되고 이것들은 그물을 속히 부식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그물을 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그물을 수선하여 다음의 고기잡이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어제는 헛수고였지만 고기잡이를 아직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제의 실패 때문에 내일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제일 쓰기 어려워하는 인생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인생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 사회가 나를 포기하고, 내 형제들도 나를 포기하고, 모두가 나를 포기했을찌라도, 나 스스로 아직 나 자신을 포기하지만 않았다면 희망은 있습니다. 포기는 곧 절망이고 절망은 희망의 유일한 적인 것입니다. 난치의 질병과 싸우시는 분들을 관찰해 보면 한 동안 잘 견디시다가 한 순간에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언제 그렇게 됩니까? 스스로 희망을 포기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병세가 위중해도 악 조건 속에 잘 견디다가 한 순간 극적으로 호전되고 기적을 체험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누구입니까? 포기하지 않는 분들입니다.

여러분도 좋아하시겠지만, 저는 운동경기를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축구경기에서 보면 '인저리 타임'에 골이 터지고 승패가 바뀌기도 합니다. 농구경기에서는 '버즈비터'라는 게 있습니다. 신호음이 울리는 순간 공이 손을 벗어나 그물이 출렁이며 경기가 완전히 뒤집어지기도 합니다. 축구경기에서는 '서든 데스'가 있습니다. 경기가 연장전에 돌입할 경우, 한 골로 승부가 납니다. 골프경기에서도 연장전에 한 홀에서 승부를 가리기도 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인생의 승패가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실패한 인생 같지만 마지막 순간에 승리를 뒤집기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포기하기 전에는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도 나에 대하여 끝까지 절대로 포기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포기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자! 지금 이들이 그물을 깊고 있는 그 낙심의 현장에 바로 누가 다가오고 계십니까?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한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베드로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뀐 터닝 포인트는 예수님이 그의 배에 오르신 후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여기 한 배는 고기를 잡지 못한 시몬의 빈 배였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은 바로 실패의 현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사람들은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늘 자신의 배가 넉넉히 채워지길 원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룻길을 걸어도 험한 계곡과 태산 준령을 넘게 되거늘 하물며 사람이 한 평생 살다가 왜 실패의 순간이 없겠습니까? 낮과 밤, 빛과 그림자가 왜 없겠습니까? 어떤 이는 건강의 빈배를 안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사업의 빈배를 안고 몸부림 할 때가 있고, 때로 사랑의 빈배를 안고 허탈과 허무에 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인생의 밤은 우리가 절망하고 낙심해야 할 순간이 아니고 주님이 찾아오시는 기회입니다. 주님 만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여러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문제를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성도는 실패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그 생명이 코의 호흡에 붙어있는 하루살이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원수의 자리에 있던 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사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시고, 그 위에서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말끔히 씻어 주셨습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죄 사함의 은총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름을 지으시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주의 영원한 나라에 면류관의 주인공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까지 하신 그 분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지금은 내가 나의 이 현실과 처한 환경 앞에 왜 이 어려움이 있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지만,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그분께서 나의 머리털 하나까지라도 세신바 된 그 뿐께서 나의 작은 신음 마져도 응답하시기를 원하시는 그분께서 내가 당하는 고난의 현장에 그리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현실가운데도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기 다시 5절을 읽어보십시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엄청난 자기포기입니다. 저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여럿 만나 보았는데 한가지 공통점은 자존심이 그 누구보다 강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쉽게 꺽이지 않습니다. 베드로도 예외가 아닌데 여기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고 겸손하게 자신을 내려놓습니다. 그런데 자, 이 헛수고의 밤을 지난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명령이 무엇이었습니까?

4절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에 따른다면 해가 뜬 후에는 깊은 물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상식을 깨트리는 명령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 바닷가에서 어부로 지금까지 고기잡이의 전문가인 베드로가 이 아마츄어의 말에 순종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6절에 보면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혔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설교가는 이 장면을 베드로가 사용하던 그의 그물이 찢어지던 그 순간 그의 이성과 상식이 찢어지고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이성이나 상식을 무시하는 종교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저는 기독교가 단순히 이성과 상식에 매여있는 종교만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은 이성과 상식이 실패한 곳에서 이성과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이루어내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파스칼은 '참된 신앙은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금년 한해 여러분의 이성과 상식으로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내 인생이 코너에 몰려 있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러면 이제 내 이성과 상식의 우상을 깨트리시고 나의 인생의 참된 주인이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이렇게 고백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 아니 새해부터는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며 살겠습니다."고. 더 이상 과거처럼 "내 잘난 것, 내가 자랑하던 내 판단력, 내 경험에 의지하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 붙들고 순종하며 살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선 베드로는 무엇이라 고백합니까? 본문 8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시몬 베드로가 마침내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리며 "주여"라고 고백합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예수의 주인 되심-곧 주권(Lordship)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주인되신 하나님을 떠나 내 판단만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바로 죄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의 주께 대한 순종이 놀라운 기적을 가져왔을 때 그는 주인 되신 그 앞에 엎디어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만선을 기대했던 그였지만, 자기 앞에 다가오신 주님은 자신의 생애 전체를 붙잡고 자신에게 가장 큰 소망임을 깨달았을 때 그는 이 거룩하신 주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나약한 한 인생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만선 보다 귀한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는 이제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그물에 들려 올라온 이 고기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자, 본문에서 찢어지는 그물에 넘쳐나는 고기를 인해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을 불러 나누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런데 나누기 전에 이런 생각도 해보지 않았습니까? 이게 어떻게 얻어진 것들인데, 이런 생각에 머물다보면, 자기가 고생한 것을 쉽게 나눌 수 있나요.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그물에 담긴 고기를 주변에 어부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자! 절망의 어둠이 사라지고 빛으로 오신 주님과 함께 한 배 안에 아침 햇살에 실려 함께 나누는 기쁨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찌 그뿐입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여기 "모든 것을 버려 두고"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자신들에게 성공의 잣대로 여겨진 것을 포기하고 이제 자신을 주께 맡기고 그동안 자신들이 축복이라고 여겨진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떠납니다. 이제 이런 변화가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변화는 그냥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변화는 값을 다 갖고 있습니다. 변화하려 할 때에는 거기에 따른 값이 매겨져 있습니다. 어떤 변화든 값을 치러야 합니다. 큰 변화이면 그 값이 비쌀 것입니다. 작은 변화이면 아마 그 값이 조금 쌀 것입니다. 그 변화가 특별히 고상해서 많은 사람이 감히 가질 수 없는 그런 독특한 변화이면 아마 그 값은 대단할 것입니다.

어떤 변화도 값이 없는 변화가 없습니다. 변화는 큰데 싼값으로 그 변화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은 변화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변화에는 외상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변화라는 것은 할인매점도 없습니다. 일단 내가 변화를 찾았고 그 변화를 성취하기를 원하면 그 변화의 값에 따라서 내가 희생을 치러야 되고 내가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달성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변화가 얼마나 비싼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어떤 값을 치루든 그 값을 치루는 데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값을 치루기 위해서 어떤 희생을 강요당해도 그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값을 치룰 각오를 하십시오. 그럴 때 가장 가치 있는 삶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반응입니다. '데이비드 브링클리'가 남긴 말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남들이 던진 벽돌로 견고한 기초를 쌓는 사람이다." 짧은 말이지만 제게 감동을 준 까닭은 어쩌면 이 금언 속에 우리의 생애가 담겨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인생은 반응"입니다. 똑 같은 사건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남이 던진 벽돌에 분노로 반응할 수도 있고, 감사로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남이 던진 벽돌 때문에 쓰러질 수도 있고, 그것 때문에 오히려 더욱 견고히 설 수도 있습니다. 인생 승리의 비결은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응에 있습니다.

요즘 새 대통령이 당선되고 우리가 무엇인가 기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명박 장로의 승리는 긍정적인 반응과 선택의 결과입니다.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 확정된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어머니를 따라 뻥튀기, 풀빵, 생선 등을 팔았습니다. 포항 동지상고 야간부를 다니면서도 풀빵을 팔았습니다. 어머니가 행상을 하던 이태원 재래시장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면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버린 벽돌과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주경야독하며 열정을 가지고 거친 인생을 개척했습니다. 그 이면에는 일평생 새벽 기도를 드리신 그분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정말 힘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분의 어머니의 새벽기도는 이명박 장로를 새벽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이번 선거에서 인간이라는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지 않았습니까? 자식 사랑 때문에 허물을 보이기도 하고, 도덕성의 의혹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성경은 왕을 세우시고, 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단 2:21절에 보면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하나님이 우리 조국을 위해 새로운 대통령으로 이장로님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새로운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부강케 하는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일입니다. 한 때 쓰레기를 치우던 환경미화원이 대통령이 된 소식은 경이로운 소식입니다. 어려운 현실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소식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를 비료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남이 버린 벽돌 같은 인물을 대통령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건축자의 버린 돌이셨지만, 하나님은 건축자의 버린 돌과 같으신 예수님을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반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신의 실패의 자리에서 한 낯선 사람이 배를 달라지 않나, 그물을 깊은 데로 던지라하지 않나, 한마디로 공자 앞에서 문자쓰는 격이 아닙니까? 요즘 말로 표현하면 안 되는 사람 옆에 와서 염장을 저지르는 행동이지만, 베드로는 그것을 고깝게 여기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그게 그의 인생의 장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가 된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아침, 여러분에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이미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하나를 위해 저주와 고통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실 만큼 결코 예수님이 놓칠 수 없는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오늘도 보혜사가 되신 성령께서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나를 은혜로 붙잡으시며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살 맛나지 않습니까? 비록 한밤을 애써 노력해도 손안에 든 것이 없다 할찌라도 우리에게 바로 예수가 있습니다. 그 분을 앙망 할 때 헛수고의 밤은 내게 새로운 축복의 아침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빈배에 만선을 채우고 내년에도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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