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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욥 4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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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욥 42:1-10)

여러분, 오늘이 태양력 2007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주일마다 이 강단에서 건강한 몸으로 말씀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동시에 예배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매주일 경청하여 주시고 격려해주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남은 목회의 기간 동안도 은혜로운 설교를 할 수 있도록 여러분 많이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넬슨 만델라’(Mandela, Nelson Rohih-lahla 1918~)

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영국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백 인종 차별정책을 종식시킨 탁월한 인권운동가입니다. 1963년 44세 때에 종신형을 선고 받아 27년 동안 옥생활을 하였습니다. 1990년 2월 11일 72세에 석방이 될 때까지 감옥에서 은밀하게 민중을 이끌었습니다. 민주적 선거방식을 통하여 대통령이 되어 1994년 5월 4일 취임을 하게 되었을 때, 전 세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미래를 걱정했습니다. 오랫동안 극심한 인종차별정책에 시달려온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피의 보복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델라는 일체의 정치보복을 가하지 않고, 흑백의 화합을 위한 관용과 화해의 정치를 하였습니다. 혁명 대신 백인 정권 지도자들과 대화와 협상을 통해 민주적인 통치 아래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일에 공헌하였습니다.

그의 대통령 취임사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 모두의 상처를 치료할 시간이 왔습니다. 우리를 갈라놓은 공간들을 채울 다리를 놓을 시간이 왔습니다. 새 시작을 할 시간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취임사는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정의가 있게 하소서. 우리 모두를 위한 평화가 있게 하소서. 우리 모두를 위한 일, 양식, 물 그리고 소금이 있게 하소서. 우리 모두 우리 각자의 육체와 영혼이 이미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소서.”

350년 동안 계속된 백인들의 인종차별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나라를 시작하려 할 때, 분노와 보복 대신에 용서와 화해, 화합을 위한 관용을 실천함으로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동방의 의인’이라고 칭찬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재앙은 그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하루아침에 다 잃었고 착하고 의좋던 열 명의 자녀들도 갑작스런 사고로 한꺼번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욥의 온 몸에 생긴 부스럼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고, 아내마저 등을 돌리고 그의 곁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때, 고통 받는 욥의 소식을 듣고,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멀리에서 엘리바스, 빌닷, 소발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말은 위로라기보다 충고였고, 책망이었습니다. “죄 없이 망한 자가 있냐? 빨리 회개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세 친구가 번갈아가며 자신을 정죄하는 가운데 오랫동안 벌인 논쟁은 친구들의 침묵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렇게 변론이 끝난 다음, 비로소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을 만난 다음 욥의 변화입니다.

첫째로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입니다.

고난의 과정에서 만난 하나님은 욥의 신앙에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고난당하기 전까지 경험했던 하나님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시면 “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주께서는 못하시는 것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가 눈으로 본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고난 중에 욥은 하나님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습니다. 친구들과 논쟁을 계속하는 동안 그 불만이 순간순간 튀어나왔습니다.

“내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내가 어떤 범죄에 연루되어 있습니까?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피하십니까?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원수로 여기십니까? 주께서는 줄곧 나를 위협하시렵니까? 나는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같을 뿐입니다. 주께서는 지금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나를 공격하고 계십니까?”(13:23-25)

욥은 자신이 이토록 가혹한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을 이 지경으로 몰아가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난을 겪으면서 만난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모든 오해가 풀렸습니다.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왜 자신을 고난으로 이끄셨는지!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섭리를 깨닫고 난 다음에야 이렇게 회개하였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습니다.”(42:3)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회개도 은혜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고 하는 것은 곧 회개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짓는 죄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세상에서 내가 의로운줄 알고 살 수도 있습니다. 한 해 동안 살아오면서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시시각각으로 만나 주신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욥처럼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우리의 생각으로, 말로 지은 죄악들을 회개합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였고, 부정적이고, 악의적인 말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많았습니다. 주님,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옵소서.” 우리도 욥처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여 용서받은 모습으로 새해를 맞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사람을 향한 용서입니다.

“주께서는 욥에게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분노한 것은,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마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지고 가서, 너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번제를 드려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용서해 달라고 빌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않고, 어리석게 말하였지만 내가 그대로 갚지는 않을 것이다.”(42:7,8)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용서에 관한 교훈이 있습니다. 용서는 서로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대개 용서는 상처를 입은 사람이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는 법입니다. 문제는, 상대방은 내게 상처를 입히고서도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나만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경우에는 용서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사람이 어떻게 하든 내 마음에서 그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힘든 것이 아니고 내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문제입니다. 그 사람의 죄는 엄밀하게 말하면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과 나의 관계에서 용서는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부정적인 감정이 내 몸에 병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미움, 분노, 증오, 저주하는 마음은 독과 같아서 내 마음에 품고 있으면 내가 피해를 받게 됩니다.

성경에는 용서에 대하여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어느 날 주님께 물었습니다.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곱번만이 아니라, 일흔번을 일곱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다가 죄를 짓는 것이 그 사람의 습관이 되게 해서 도리어 그 사람을 망치는 것 아닙니까? 나는 뭐 속도 없는 줄 아십니까?” 이렇게 말하면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내가 하는 말대로 해 보고서 그 결과를 보라니까!”

그렇습니다. 용서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진리’, ‘참’이라는 자신의 막대기로 욥을 치면서 괴롭혔습니다. 욥은 자기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회개를 독촉하는 친구들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그 많은 시간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욥에게 그 친구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욥의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고 용서하면 내 기도의 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기도가 막히는 경우, 도무지 기도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할때입니다. 용서하면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기도의 문이 닫힙니다. 부부관계, 성도간의 관께, 친척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를 먼저 푸십시오.

기도하고 싶으나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만 해도 입이 막히곤 하는 한 남자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 다니는 것조차 고통스러웠고, 사회생활에서 대인관계 역시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지 못해서 성적표를 가지고 가면 꼭 아버지께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것도 저녁 식사시간에 다른 식구들은 다 밥을 먹는데, 베개를 들고 서 있게 했습니다. 4남매의 장남이었던 이 사람은 동생들 앞에서 자존심이 크게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성적표를 받아오는 날이면 그렇게 벌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마음에 쌓여서 아버지와 관계된 모든 것이 싫어졌습니다. 직장의 상사도 아버지 같다는 이유로 아주 싫어졌고 어디서나 상사를 비난하고 욕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조차도 싫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힘들게 하고 미워하던 그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고는 기도도, 일도 잘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조용히 묵상하면서, 예수님이 자기 마음의 방에 찾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가 들고 있던 베개를 내려놓고 꼭 껴안아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그동안 얼마나 마음아 아팠니?” 그리고 아버지를 향하여 조용히 타이르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아들에게 그런 응어리를 심어줄 수 있단 말인가?” 이분은 그 주님의 모습을 본 다음 대성통곡하며 울고 난 후 얼굴이 천사처럼 환해졌습니다. 그리고 35년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수요일 밤 예배에서 회중기도를 인도하였습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 시간 우리가 잊지 말고 꼭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굳이 상대방을 찾아가지 않아도 먼저 마음으로 용서하십시오.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버리십시오.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십시오. 이 시간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합시다. 내 마음에 아직 용서하지 못한 어떤 사람과 일이 있다면 그를 용서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여러분의 심령에 평강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기도>


마지막으로 회복과 축복의 시작입니다.

10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욥이 주께 자기 친구들을 용서해 주시라고 기도를 드리고 난 다음에, 주께서 욥의 재산을 회복시켜 주셨는데, 욥이 이전에 가졌던 모든 것보다, 배나 돌려주셨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정말 귀합니다. 친구들을 용서하는 기도, 축복하는 기도를 드린 욥을 하나님이 받으셨을 뿐 아니라 욥의 삶에 회복과 축복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난 받기 전의 욥의 상태보다 갑절이나 더 주시는 은혜와 축복이 열렸습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 1,2장에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얻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편 엘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라고 하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브닌나는 자식을 많이 두었는데, 한나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한나의 마음에 브닌나에 대한 시기와 질투와 증오가 있었습니다. 브닌나에게는 자식을 주시고 자기에게는 주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불만과 불신이 있었습니다. 자식도 하나 낳지 못하는 자신이 한없이 미웠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한나는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한 기도를 계속하였습니다. 기도 중에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기의 마음에 원통함과 격분함이 많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브닌나의 격분시킴 때문에, 괴로움과 고통으로 슬퍼하며 애통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이 기도 후 한나의 마음에 있던 모든 원통함과 격분함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아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분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지 않습니다. 새날이 밝았다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새 삶이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사람을 용서하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새로운 축복의 문은 열릴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주님 앞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새해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회개와 용서 속에서 진정한 축복의 시작이 되는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무겁고 개운하지 못한 것은 내 속에 용서하지 못하는 미움과 원망과 시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모든 죄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용서 하셨음을 믿습니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용서하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 하십니다. 예 하고 대답하십시오. 다 용서하고 사랑으로 덮으면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이 나라의 여, 야 정치인들에게도, 기업마다 노,사의 긴장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교회 속에서 풀지 못한 매듭에 매여있는 이들에게도, 가정에서 털어놓지 못하고 안고있는 원망과 미움위에도 우리 주님의 크신 사랑과 용서의 은혜가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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