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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왜 울고 있는가? (눅 7: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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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울고 있는가? (눅 7:36~50)

사람의 눈물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눈물 종류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1)기본적 눈물입니다.
이 눈물은 눈을 깜박일 때마다 배출되는 눈물로 촉촉한 눈 상태를 유지하며 눈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눈물은 공기나 먼지 등이 눈에 바로 닿지 않게 하고, 달라붙은 이물질이 있으면 이것을 씻어 내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 신체 부위 중에서 사람이 직접 씻지 않는 곳이 바로 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이 눈물이 있기 때문에 눈꺼풀과의 마찰도 줄여 주고 안구 운동도 부드럽게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 눈물이 부족하면 안구 건조증이란 병이 생겨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 중에도 이것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상시 눈물의 역할은 눈에 영양을 공급한다는 것입니다. 눈 각막에는 혈관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폐로 호흡한 산소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공기 중의 산소를 눈물에 녹여 직접 눈에 흡수시키는, 마치 물고기 같은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눈물은 잘 나와야 합니다. 

2)반사적 눈물입니다.
양파를 까거나 먼지 티끌 등 눈에 자극성 물질이 들어갔을 때 저절로 나오는 눈물입니다. 외부 자극에 즉각적인 방어를 함으로써 눈을 보호합니다.
과거 제가 대학 다닐 때 체류탄 냄새를 많이 맡았는데 그 체류탄은 눈물을 엄청나게 흘리게 하는데 눈을 자극하는 가스가 각막에 붙어 그것을 씻어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3)정서적 눈물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감정 상태에 따라 흘러나오는 눈물입니다.
슬플 때, 기쁠 때, 화가 날 때, 또는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나오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감정을 갖고 있기에 눈물에는 그 사람의 감정이 담긴 눈물이 많습니다. 이별과 헤어짐의 슬픔 때문에 흐르는 눈물도 있고 외롭거나 그리워서 흘리는 눈물도 있습니다. 또 몸이 너무 아프고 힘들어 흐르는 눈물도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35에 보면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4)그러나 우리 성도는 하나가 더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영적인 눈물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흐르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이 너무 놀랍고 크기에 기뻐서 흐르는 눈물도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행복해서 흐르는 눈물, 은혜가 넘치고 감격해서 흐르는 눈물, 그리고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흐르는 눈물도 있기를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크고 놀라운데 자신의 죄악이 너무 크고 부끄럽고 죄송하여 회개하는 눈물이 많아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에도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와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은 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일까요?

시몬이라 이름하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하여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나 선지자로 알고 있어서 대접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거나 예수님께 자기 의를 들어내고 싶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그 집에 들어가 식사자리에 앉아 계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식사 자리는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먹는 자세이기에 발을 옆으로 뻗고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그 동네 살고 있던 죄인으로 취급당하는 한 여인이 들어와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주고 있었습니다.

한국적인 예절 같으면 무슨 해괴망측한 짓이냐고 하고 발을 거둘텐데 그 시몬의 집에서는 아무도 그 여인을 제제하지 않고 그냥 두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유대 사회에서는 그런 행동이 용납되는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 여인은 울며 눈물을 흘린 것일까요? 오늘 봉독한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중요한 몇 가지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 주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흘린 눈물입니다.

이 여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약간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사건은 여러 번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봉독한 본문의 여인은 그 마리아가 아님이 확실합니다. 왜냐 하면 본문에 나온 바리새인이 이 여인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여인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왜 예수님의 발에 눈물을 흘리며 그 발을 씻고 있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주님의 은혜가 크고 놀라워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이 여인은 예수님께 사람대접을 받으면서 큰 용서를 받은 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여인이 한 행동을 보시고 “빚 탕감 받은 자” 이야기를 꺼냅니다. 한사람이 한사람은 오백 데나리온 빚졌고 한사람은 오십 데나리온 빚을 졌는데 주인이 그들이 갚을 길이 없는 것을 보고 불러 탕감을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가 주인을 더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바래신인이 답하기를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지요.” 라고 대답하니 그래 “네 말이 옳다” 하면서 바리새인의 행위와 여인의 눈물로 발 씻긴 사건을 비교합니다.

결론은 ‘저 여인이 바리새인 너보다 훨씬 낫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뭐가요? 그 여인은 자신이 죄인인줄 알고 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께 나아와 죄 사함의 은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죄를 많이 탕감 받았으니 감사해서 주님을 만나자마자 눈물을 펑펑 흘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발에 묻은 먼지를 씻길 정도로 눈물이 펑펑 흘러나온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을 ‘수도꼭지’라고 부릅니다. 저와 같이 사는 우리집 여인들 둘이 다 수도꼭지입니다. 화동의 김광순 사모도 그렇습니다. 야단친 것도 아닌데 조금만 서러우면 눈물이 ‘수도꼭지’ 튼 것처럼 펑펑 나옵니다.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특히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수도꼭지가 많습니다. 대개 속상하고 억울할 때 수도꼭지가 열립니다. 
그러나 그 눈물이 은혜에 감격하여 흐르는 눈물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다 흘리는 눈물,  말씀 듣다 감사해서 흐르는 눈물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한 해 동안 우리는 주님이 베푸신 은혜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나요? 한해를 되돌아보면 그 은혜가 크고 놀라운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특별히 사랑해 주신 그 은혜를 되새겨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날마다 엄청난 죄를 짓고 사는데도 그때마다 용서해 주시고 용서 받도록 도와주신 은혜, 남편 때문에, 자식 때문에, 질병 때문에, 고생할 때 그때그때 찾아와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잘 넘기게 도와주신 은혜. 얼마나 놀라운지요.
어떤 사람은 남편이 바람을 피워 힘들어 하고 어떤 성도는 자식 때문에 엄청나게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회개의 눈물이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고 복을 베푸십니다.
아마도 우리 믿음의 조상들 가운데 눈물을 제일 많이 흘린 사람은 다윗일 것입니다. 시편6:6에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회개를 많이 했는지 침상을 눈물의 바다에 띄우고 요를 적신다고 했겠습니까? 물론 좀 과장법을 썼겠으나......
그러니 하나님이 그를 높이시고 그를 가까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세상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주님은 나를 사람대접해 주면서 엄청난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생각하고 주님께 감사의 눈믈을 흘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주님의 그 크신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받은바 은혜를 헤아리며 은혜를 감사하는 눈물을 흘리시기를 축원합니다.


2.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주님의 용서를 받은 자입니다.
용서 받은 것이 크다 보니 감사가 넘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사랑도 커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뭔가를 드려야 하겠는데 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져와 주님의 발에 부어 드렸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나 드릴 것이 없다보니 안타까운 마음으로 옥합의 기름을 드린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뭔가를 주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주는 것이 아깝다면 그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자식이 찾아오면 이것저것 막 싸줍니다.
저도 그런 것을 봅니다. 모처럼 장모님댁을 찾아가면 장모님이 이것저것 다 싸줍니다. 마늘, 콩, 쌀... “제발 그러지 마세요.” 하면 “자네는 가만있게” 하고 막무가내십니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제 집사람입니다. 그 여자도 막 주어 쌉니다. 트렁크에 가득 넣어 옵니다. 딸들은 다 못 됐습니다.
왜 그렇게 싸서 주시는 것일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나 가난한 형평이기에 대접을 못해드립니다.  그러나 자기가 갖고 있는 최고의 것을 주님께 아낌없이 부어드렸습니다. 옥합향유를 부어 드린 것입니다.
그녀는 참된 헌신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여인의 눈물을 통해 그리고 그여인의 행유 붓는 사건을 통해 그녀의 믿음을 확인하십니다. 그러기에 죄 사함의 은총도 부어주십니다. 더불어 구원의 은총도 베풀어 줍니다.

50절을 보세요.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성도 여러분!
참된 헌신이란 말 그대로 몸을 바치는 것입니다. 한자로 드릴 헌(獻), 몸 신(身), 그래서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바치기까지 충성을 다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 44절과 46절을 보십시오.
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45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 여자는 주님께 눈물을 드리고 머리털을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을 벌어도 못 모을 정도의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렸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자기 몸을 다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참된 헌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 헌신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여인의 눈물 속에는 그 헌신이 담긴 것입니다.


3. 주님을 부당하게 대접하는 것이 마음상해 흘리는 눈물입니다.

오늘 주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은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주님께 상당한 결례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초청해 놓고도 손님을 손님으로 대접치 않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관례는 초청된 사람이 자기 집에 오면 상대방을 끌어안고 입 맞추고 손 씻을 물을 주고 종들을 통해 손님의 발을 씻겨 드리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몬은 아마도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그가 과연 메시야인가? 그 여부를 시험해 보려는 의도에서 초대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마음이기에 그는 예수님을 초대하고서도 대접하는 태도가 불손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신데 그런 주님을 무시한 것입니다. 성경대로 산다고 자처하는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망신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분통이 터지는 것은 제자들조차도 그 광경을 보고 가만히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집에서 안하면 누가 해야 합니까? 제자들이 선생님을 당연히 씻겨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도 눈치만 보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 모습을 그 여인이 본 것입니다.
이 여인은 비록 죄인이었으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엄청난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그 여인은 그 모습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발쪽으로 다가와 눈물을 흘리며 발을 씻겨 드립니다. 그러기에 그 눈물은 감사와 사랑의 눈물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부당한 대접을 받는 주님을 향한 안타까움의 눈물이고 바리새인 시몬을 향한 분노의 눈물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아버지가 남들에게 멸시천대 당하면 괜찮습니까? 또 남들이 담임목사인 제게 모욕을 주고 합당한 대접을 안 하면 마음이 어떻습니까? 가슴이 아파 이 여인처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설 수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가 바리새인처럼 주님을 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주님을 주님답게 대접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남들이 하겠지 하고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주님은 모셔 들였을지 모르나 복은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고 눈물로 발을 씻기며 섬긴 여인이 복을 받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이 바리새인, 구원을 받았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긴다는 바리새파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집안까지 들어 오셨는데 그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그래서 제대로 영접치도 못하고 그를 제대로 섬기지 못해 지옥 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사람이 되겠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몇 번이나 울어 보셨습니까?
그때가 어느 때입니까? 혹시 장례식장에서가 아닙니까? 혹시 억울하고 속상해서가 아닙니까? 아니면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서러워서가 아닙니까?

그러나 그런 눈물이 아닌 주님의 은혜가 크고 놀라워서 눈물을 흘려 본적은 있습니까? 엄청난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람대접하시고 사랑하신 은혜 때문에 눈물을 흘려 본적은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제물로 받기를 원하십니다.
눈물의 기도를 받기 원하시고 눈물의 회개를 받기 원하시며 눈물의 감사와 사랑 고백을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우리의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찬송가 185장의 내용을 한번 음미해 보십시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4절 
한없는 용서와 참사랑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값없이 주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주느냐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주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줄 것을 다 주시고 이제 여러분들의 눈물의 헌신을 원하십니다. 이제부터는 구원의 감격과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이 원하시는 참된 헌신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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