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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푯대를 향하여 (빌 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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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푯대를 향하여 (빌립보서 3:12-16)

2007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국교회가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의 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그 동안 침체되었던 부흥의 역사를 새롭게 써보리라는 큰 기대감으로 시작했던 2007년이 오늘 주일로 막을 내립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부흥을 꿈꾸었던 한국교회는 처음에 기대한 것만큼 목표에 달성한 듯 보이지 않습니다.  부흥운동이라는 것이 무슨 자연법칙처럼 100주년이 되면 그 세월의 쌓임과 100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따라 자연스럽게 반복되어 일어나는 이벤트로 기대하고 시작한 운동은 아니었지만 기대만큼 열매를 거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흥을 열망했던 교회와 기독교인들 앞에 쏟아진 것은 아프카니스탄에서 벌어진 자원봉사 단원들의 납치사건으로 인한 무지막지한 사회의 비난과 조소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독 실업인이 경영하는 한 기업의 비정규직 근로자 해고사건은 타는 불에 기름을 붓듯 반기독교 정서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교회 비판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사학법 개정 반대운동 등등 교회가 개입된 사회운동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참 많이도 얻어맞은 한 해였습니다.  부흥을 꿈꾸는 100주년 기념의 해에 한국교회의 열기를 향해 끼얹은 찬 물입니다. 

나는 아프칸에 자원봉사단을 보낸 교회 교인이 아니고, 그 잘나가던 기독 실업인 기업과 나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사람이라고 애써 부정할 수도 없는 우리는 한국교회라는 공동 운명체 속에 속해있는 가족들입니다.  부흥이라는 것이 결코 외부적으로 보이는 폭발적인 성장이 아니라고들 말했지만 결국 부흥을 꿈꾸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리는 부흥은 겉으로 드러나는 성장입니다.  교회 건물이 웅장하게 세워지고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며 교회재정이 불어난 결과를 보고 부흥을 평가하려 드는 세속적 가치관이 진정한 부흥을 오해하게 만듭니다. 

개인은 물론 가정과 단체들이 이제 지나온 한 해 동안 잘한 일, 잘 못한 일, 즐거움과 아픈 상처, 아쉬운 일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나누어서 사용할 줄 아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오늘을 반성하고 내일을 다시 시작하며, 금년을 반성하고 내년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비록 실패하고 부족했을지라도 새 마음과 결심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주는 이 세월의 매듭을 잘 엮어가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무엇을 이루었다는 것으로 자만하여 지난 날의 성공에 도취되어 게으름과 교만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고, 무엇을 잃었다는 것 때문에 실망하여 내일을 포기해버리는 어리석음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 송년주일에 함께 읽은 성경말씀 가운데 우리를 향해 주시는 지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인간적인 면으로 본다면 누구보다도 자랑할 것들이 많고 육체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혈통적으로 볼 때 유대인 중의 유대인인 바리새인이었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학문적으로는 히브리 사상과 헬라 사상에 능통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자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구약의 율법에 능하며 하나님께 대하여 특별한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개종한 이후로는 그가 믿는 기독교 복음을 누구보다도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전파했던 열정적인 전도자였습니다.

지난 날 그의 인생 속에 그가 이루어놓은 업적을 나열하자면 몇 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만큼 대단한 일을 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랑할 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를 믿음으로 받은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 그리고 그 믿음으로 얻은 새 생명,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얻은 나의 생명과 부활의 소망 이것이 그의 가장 크고 확실한 자랑이었습니다.  그리고 푯대를 세우고 달려가는 육상 선수처럼 그것을 잡으려고 달린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참으로 많은 일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 안에서 체험하고 얻은 생명의 귀중함과 부활의 기쁨을 깨달은 이후로는 내가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완성했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것을 위해 여전히 달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아직 잡은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직 이 한 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그것을 잡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 푯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실 바로 그 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깨달은 중요한 진리는 ‘은혜’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의 열심과 의로움으로 오늘의 자신을 만들어왔다고 자부했던 바울입니다.  나의 명철, 지혜, 노력과 타고난 혈통 등이 나를 이 젊은 나이에 성공적인 인생의 대열에 서도록 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예수를 만난 후 이 생각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그런 육체적, 인간적인 조건이 나를 의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의롭게 만들었다는 고백입니다.  그 동안에는 나의 뒤에 있는 그것들, 내가 이루어 놓은 업적과 성과를 의지하고 있었지만 이젠 앞에 있는 생명과 부활을 바라보며 뒤에 있는 그것들은 잊고 살리라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한편 바울은 이 생명과 부활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깨닫기까지 그가 걸어온 인생의 길 속에서 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던 사람입니다.  성공가도를 줄기차게 달렸다고 생각했던 그에게도 상처와 실패의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앞을 향해 나아갈 사람의 발목을 끈질기게 붙들어 놓을만한 엄청난 실수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앞장 서 예수의 원수가 되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교회를 위협했던 핍박자였습니다.  그러나 감히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군으로 쓰임 받을 수 없는 자신을 불러 복음의 일군으로 삼으신 그 은혜에 감격하여 일생을 주를 위해 살기로 결심한 바울입니다.  과거의 실패와 상처에 매이지 않고 앞에 보이는 영광스런 상을 바라보며 달리기에 열중했던 사람입니다. 

우리 개인도 그렇지만 우리 한국교회가 그 동안 이루어놓은 일들을 돌아보면 자랑할만한 것이 참 많습니다.  세계 교회 역사상 우리만큼 빠른 시간에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한 예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일 교회로서 세계 최대의 교회와 최대 교단 교회들이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선교사를 미국 다음으로 많이 보내는 나라가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런 외적인 성장을 따르지 못하는 부실한 내면의 문제로 인해 드러나는 모순과 기독교인들의 이중적인 삶이 세상의 비난과 비판을 받는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지난 날을 돌아보며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는 것은 앞날을 위한 최선의 준비입니다.  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지난 날에 이루었던 것이나 실패의 상처에 붙잡혀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에 장애를 가져오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일에 미련을 두지 않고 앞날에 대한 푯대를 다시 확인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상처가 상처로만 남으면 생명을 위협하고 사망에 이르지만 그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면 더 나은 건강을 위한 활력이 됩니다.  지난 날 견디기 힘든 아픔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치유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한국교회가 가진 깊은 상처가 더 강건한 몸을 세우는 발판으로 회복되어지길 소망합니다. 

100년 전의 부흥을 다시 불일 듯 하게 하는 것은 외형적 부흥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깊이 살피는 기회로서의 심령부흥이며 이것이 보다 급선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교회를 무척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부흥을 꿈꾸는 교회에 차가운 비난과 비판의 홍수를 퍼부음으로 부흥의 열기를 밖으로 내뿜지 못하고 내면의 성찰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하였던 한 해였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커다란 상처와 자존심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습니다.  아니라고 애써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이런 상처들을 치유하면서 더 강건하고 겸손한 교회와 성도로 만들어가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소나무의 가지에 박힌 옹이는 나무의 상처를 치유하는 송진이 덩어리져 만들어진 단단한 부분입니다.  옹이가 박힌 나무는 목재로서는 쓸모가 없어 천대를 받기도 합니다.  목수의 태패날과 톱날을 상하게 하는 단단한 옹이는 집을 짓는데 인기가 없는 나무취급을 받습니다.  하지만 원목의 자연스런 무늬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옹이가 만들어내는 무늬는 더 없이 아름다운 소재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소나무의 깊고 은은한 향은 소나무의 상처가 치유되면서 만들어 낸 바로 이런 옹이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거친 삶에서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삶의 여유를 회복하면 오히려 그 아픔들이 인생의 깊은 향기를 내는 상급이 되기도 합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이 즈음에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체험하면서 우리가 가진 아픔들이 도리어 그리스도의 향기로 변화되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바라보며 푯대를 향해 달리는 자신을 경기장의 선수로 비유한 바울의 달리기는 정말 온 힘을 다해 목표점을 향해 달리는 육상 선수의 모습과 같습니다.  경기장에서 달리는 육상 선수들의 몸짓과 표정 그리고 머리를 디밀며 결승점을 향해 치닫는 그들의 마지막 모습, 온 몸의 에너지를 총동원하여 결승점을 향해 몸을 던진 후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헐떡이는 그들은 비록 1등은 하지 못했을지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모습이 아름답기만 합니다.  이런 선수들을 보면서 푯대를 향해 달리는 바울의 모습을 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닮아 살았던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하여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다 이루신 주님이셨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본 받아 자신을 관제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기를 소원하였고 마침내 주께로부터 사명을 다 마쳐갈 때 ‘내가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4:6-8) 하며 주의 부르심을 기다렸습니다.

묵은해를 보내면서 우리가 내년에 또 가져야 할 새로운 목표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닮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후에 주께로부터 받을 영원한 상입니다.  우리의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교회’이기를 바라고 달려온 우리 교회와 교우 여러분은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위해 살아왔는지 회고하는 아침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금 주 안에서 힘을 입어 주를 닮기에 힘쓰는 새로운 날들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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