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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이렇게 되십시오! (갈 5: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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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제  목 : 이렇게 되십시오!

1. 변화

성도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무엇보다도 그 복은 여러분의 속사람, 영혼과 내면의 저 깊은 곳에서부터 일상생활 전체로 퍼지는 변화의 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국민 대다수의 새해에 대한 기대는 바로 이 변화입니다. 많은 의혹과 도덕성 시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당선자를 뽑은 이유는 그가 국민의 변화의 요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경제계 인사들이 당선자와 만난 자리에서 요구한 것은 기업 환경의 변화였고, 대입을 비롯한 교육 현장의 요구도 변화이고, 정치나 사회 등 모두 변화의 기대를 당선자에게 걸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마치 우리 국민이 대통령 당선자에게 변화를 요구하듯이, 오늘 여러분을 향하여 이 변화를 요구하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시죠. 그렇다면 주님이 기대하시는 변화는 어떤 모습일까요? 바로 오늘 본문이 그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2. 성숙

1) 성령의 열매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성령의 열매에 관한 것입니다. 즉 성령이 임하신 사람에게 나타나는 인격과 삶의 결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성령의 열매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➊ 첫 번째는 사랑, 희락, 화평입니다.

먼저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즉 우정을 말하는 ‘필리아’라든지, 이성간의 육체적인 사랑을 말하는 ‘에로스’, 혹은 가족 간의 사랑을 뜻하는 ‘스톨게’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령의 열매로 소개되는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이 “아가페”는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전 헬라 문헌에서는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유일하게 한 번 발견되는 것도 성경이 기록된 이후인 A. D. 2세기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아가페는 순수하게 성경적인 용어이고, 그 의미 또한 성경이 말하는 사랑,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신 것으로 자기를 온전히 소모하여 희생적으로 사랑하신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오늘 주님은 저와 여러분도 바로 이 아가페 사랑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음은 “희락”입니다. 이 말은 '기쁨, 즐거움'을 뜻하지만, 바울 사도는 이 말을 ‘슬픔과 고통과 근심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4절에서는 ‘극심한 박해와 위험을 초월하는 기쁨’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성도가 그렇게 극심한 고통과 박해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본문이 말하는 이 기쁨의 원천이 지상적이고 인간적인 기쁨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로서 희락은 육적으로 오는 쾌락이나, 소유에서 오는 쾌락이나, 감각적인 쾌락이 아닙니다. 외적인 환경과 관계없이 도리어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 가지는 행복과 기쁨을 말합니다.

다음은 “화평”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이 화평을 계속 되던 전쟁 상태에서의 잠시 쉬는 막간(a interlude)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 말은 구약성경의 “샬롬”의 번역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뜻은 ‘안식, 평온, 안전, 염려 없음, 믿음직스러움’ 등의 광범위한 뜻에서부터,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 인간끼리 서로 화목한 관계, 나아가 어떠한 종류의 질병이나 악이나 불화가 없는 상태까지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한 사람의 마음과 그의 삶의 밖, 모든 인간관계나, 그가 하는 모든 일에 관련된 평안을 뜻하는 것이 이 화평입니다. 이러한 화평이야말로 ‘평안 종합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말씀드린 성령의 열매 가운데 첫 번째 분류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❷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성령의 열매의 두 번째 부류는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입니다. 여기서 “오래 참음”은 ‘인내’라는 뜻과 함께, ‘목적에 도달할 때까지 참음'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이 알아주실 때까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자신에게 해를 가하거나 괴롭히는 대상을 향해 분노를 표시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상대방의 잘못이나 이유 없는 불리함을 참을성 있게 견디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자비”는 ‘친절을 보이다’라는 뜻인데요. 이 단어 역시 세속 헬라 문헌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기독교 문헌에만 나오는 말입니다. 이 자비는 친절하고 온화하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음은 “양선”입니다. 이 양선은 '선함', '착함'이라는 개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덕을 행하고 선을 행한다는 뜻입니다. 즉 그 내면이 착하고 선할 뿐 아니라 실제로 착하고 덕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을 양선이라고 합니다.

이상에서 말씀드린 성령의 열매의 두 번째 부류인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은 성도가 다른 사람을 향해 나타내는 행동을 말합니다.

❸ 충성, 온유, 절제

성령의 세 번째 부류는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충성”은 '신뢰, 확신, 확실성'을 의미합니다. 즉 충성은 언제나 변함없는 성품이지요. 감정이나 신앙의 기복이 심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가서는 이렇게 살고, 저기 가서는 저렇게 사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언제나, 누가 보아도 믿음직스러운 삶을 충성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충성은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뢰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데, 바로 여기서 '보증‘이라는 의미가 나왔습니다. 즉 어떤 계약이나 약정을 맺음에 있어서 그 보장, 보증이 되는 것을 충성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충성이란 성령 충만한 성도와 성도의 삶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래서 하나의 보증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온유”는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는 것으로 상대가 비굴함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그에게 겸손하고 그에게 친절한 것을 말합니다.

“절제”는 자신의 본성과 감성 등을 자제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내적이며 외적인 자기 조절을 의미하는 것이죠. 성령이 없으면 육체의 소욕을 그대로 따르고, 그렇게 살면 결국 스스로를 망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에 이끌린다면, 변함없이 일정하고,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자신을 잘 다스리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의 세 번째 부류인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자신을 향해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먼저 하나님을 향하여 나타나는 것, 둘째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나타나는 것, 세 번째는 자신 스스로에게 나타나는 것 등 세 가지 부류로 나뉘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곧 성숙한 성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은사의 사람이기 전에, 능력의 사람이기 전에, 무엇보다 성숙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즉 성령의 사람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이러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곧 성숙을 나타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많은 문제는 미숙함에서 생깁니다. 미숙하면 쉽게 화를 냅니다. 미숙하면 감정의 기복이 심합니다. 너무 가볍게 말하고 서둘러 결정합니다. 미숙하면 요동하는 파도처럼 너무 자주 요동합니다.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고 쉽게 오해합니다. 전체를 보는 안목이 없어 작은 문제만 생겨도 안절부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다릅니다. 성숙한 사람은 깊이가 있습니다. 말에 무게가 있습니다. 전체를 보는 안목이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사람 뿐 만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그들을 용납하며, 자신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변화에 잘 적응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남을 배려할 줄 압니다. 상대방을 늘 존중합니다. 무엇보다 성숙의 극치는 자신을 내어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바로 성숙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성숙한 인격, 예수님의 깊이 있는 언어, 그리고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희생을 통해 우리는 성숙의 절정을 배웁니다. 바로 이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곧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우리의 인격과 삶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숙이 여러분의 인격이 되고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아홉이 아니라 하나

만일 여러분이 지금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으며, 성령 충만하다면, 지금 살펴본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가 여러분의 인격과 삶에서 그대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가 각각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오직 성령의 열매"라고 할 때, 이 “열매”는 복수로써 '열매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수로써 '열매'를 의미합니다. 즉 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는 모두 하나로 연결된 열매로서, 사랑이나 자비의 열매는 맺었는데, 충성이나 온유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온유하지 못하면, 온유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나 희락에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즉 온유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가 전체적으로 아직 여물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에 대해 ‘전체적으로 좋다’든지, 아니면 ‘아직 익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있으나, ‘사랑의 열매는 없고 충성의 열매는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의 시험이나 승진이나 진급 시험에 “과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과락이라는 것은 다른 과목을 다 잘 쳐도 그 중에서 하나가 기본 점수에 미치지 못하면 합격하지 못하고 진급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홉 모두 다 갖추어야 하는 것이지, 그 중 몇 개가 잘 되고 몇이 안 된다는 것은 결국 모두 다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맺고 있는 성령의 열매는 어떻습니까?

3) 변화와 성숙을 위한 결단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이 “성령의 열매”는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말 그대로 이것이 성령의 열매이지 나의 열매, 나의 노력의 열매가 아니라는 것 때문입니다. 즉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면 이러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이죠. 성도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육체보다는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게 있다는 뜻도 됩니다. 그런데요, 이렇게 말하면 말할수록 더욱 강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만일 우리의 육체가 이미 죽었다면, 왜 아직도 육체의 본능과 욕구가 우리를 이렇게 괴롭히는가?’ ‘왜 성령님은 아주 강력하게 우리의 내면과 생활을 주도하시지 않는 것인가?’ ‘왜 성도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갈등 가운데 결국은 육체의 소욕을 따르고 마는 것인가?’ 여기서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육신을 입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여전히 본성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입니까?

여기에 대해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을 쫓아 행하라”는 것입니다(16,25). 즉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가만있으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듯이, 성령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코미디언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사실 자신은 낯을 조금 가리는 사람으로서 처음 만나는 사람과 있으면 때로는 서먹서먹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상대방에게 마치 화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많이 오해한다고 했습니다. 성령님과 성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쫓아 살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우리 자신을 그대로 버려두면,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지배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무방비 상태, 혹 중립의 상태란 성도에게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런 노력 없이 살면 그것은 곧 스스로를 육체의 소욕에 그대로 내어주는 행동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아무 노력도 없이 가만있어서는 안되고 성령을 쫓아, 성령의 인도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지 않으면 십중팔구 본능에 의하여 스스로에게와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경고의 말씀을 받아 성령에 이끌리기를 노력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성숙을 위하여 변화를 결단하십시오!

어느 교회에 정말 열심히 충성 봉사하는 한 여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집사님의 남편과 자녀들이 교회에 한 번도 온 적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하루는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그 가정을 심방했다가, 뜻하지 않게 그 분의 남편을 만나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습니다. 목사님은 “이때다” 싶어서 그 남편에게 ‘예수님을 믿어 부부와 가정이 믿음으로 하나 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 아내가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제 아내는 정말 아주 고약하고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에서 한 번 화를 내면 아이들과 저는 숨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저는 이러한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 아내 때문에 교회 나가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왜 그 집사님의 남편이 교회 나오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아내가 교회 가고 없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남편의 말도 떠올랐습니다. 그 집사님의 남편을 만난 후, 목사님은 곧바로 그 여집사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들은 남편의 말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참 놀라운 것은 그 여집사는 남편이나 자녀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성자인 줄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남편이나 부인이 교회 나오지 않는 분들, 제가 여러분의 배우자들을 한 번 만나 볼까요? 어쩌면 그분들이 여러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여러분과 너무나 다른 것들은 아닐는지요?


목사님으로부터 이 말을 들은 그 여집사는 정말 진실하게 뉘우치면서 “앞으로는 잘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렇게 결심하는 여집사를 위하여 기도해 주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바로 며칠 후였습니다. 남편이 토요일을 맞아 낚시를 갔다가 밤에 집으로 들어오다가 낚싯대로 새로 사다 달아 놓은 예쁜 전등을 산산조각 내어버렸습니다. 당황한 남편은 아내의 불같은 성질에 날벼락이 떨어질 줄 알고 그 순간 얼음기둥처럼 그 자리에 멈추어 서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아내는 평소와는 달리 말 한 마디 없었습니다.
그 대신에 빗자루를 가져 와서 깨어진 유리 조각을 쓸어 담으면서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보, 괜찮아요."
그 다음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바로 다음날 아침, 주일 오전 예배에 그 남편이 그 여집사와 함께 나란히 교회에 나왔으며, 몇 주일 후에는 그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바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변화의 힘입니다. 아내를 바꾸려고 하지 마십시오. 남편이 바뀌어야 가정이 변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자녀들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주변 사람들이나 환경이 바뀌어야 한다고도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변해야 합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변할 때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속사람, 여러분의 내면과 영혼, 인격과 삶 전체, 여러분의 말 한 마디와 손짓 하나, 발짓 하나가 변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새해를 맞은 여러분을 향한 우리 주님의 요구이고, 세상이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올 해는 다른 해보다 이러한 거룩한 변화를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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