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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라 (창 13: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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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창13 : 14 - 18절               
제  목 :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라

영어에 보다 라는 말에는 See 와 Look이 있습니다. 
See는 그냥 보는 것, 보이는 데로 보는 것을 뜻하지마는 
Look는 목적을 가지고 보는 것, 의미를 생각하며 보는 것,
    찾으며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눈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냥 보지 않습니다. 눈을 들어 봅니다.

오늘 본문말씀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즉 Look 이라 말씀하십니다.
목적을 가지고 즉 하나님의 비전에 맞추어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본다는 것을 하나님의 눈 맞춤이라고 정의합니다.
2008년도에는 본문 말씀의 아브람같이
눈을 들어 하나님의 눈 맞춤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아브람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며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합니까?

1. 지금 아브람의 심경이 어떠할까요?(참조/창13:1-13절)

창13:1절 이하에 보면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애굽 왕 바로에게 아내 사라를 잃어버릴 뻔한 사건을 만났지마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아내 사라를 도로 찾게 됩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3-4절에 보면 벧엘과 아이 사이 그가 처음 장막을 쳤던 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고 합니다.
아브람이 그가 처음에 단을 쌓았던 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은혜가 떨어져 잘못하여 넘어질 수 있으나
      하나님을 만났던 처음의 장소로 돌아와 신앙을 회복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조카 롯과 사이에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아브람은 소유가 많았습니다.
2절 [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
화란에서 모은 소유와 애굽에서 바로에게 받은 예물을 더하였기 때문에
  아브람은 한마디로 부유한 족장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유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브람과 룻의 목자들이 다투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은 목자끼리 다투게 되는 것을 보고 
      조카 롯에게 다투지 말고 대안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8.-9절에
[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
[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
조카 봐라~!
우리 다투지 말자 네 앞에 넓은 땅이 있으니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합니다.
아마 아브람도 조카 롯의 신앙 수준 같으면
    기득권을 주장하여 자기가 결정을 해서 롯에게 택하라 하거나
          설득을 하려고 할건데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먼저 양보를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양보를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한 친족(골육)이라  - 한 골육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남이라 생각되니 너 언제 볼거라고? 이렇게 되니
                      피가 나도록 싸웁니다.
그러나 가족이 되면 다투기는 해도 자고 일어나면 그만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 치리한 번 못한 것  -
              결정적인 순간에 가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을 항상 골육이라고 생각하고 사랑합니다.         
롯은 떠나가면 아브람을 잊어버리지마는
  아브람은 끝까지 조카 롯을 잊지 못하고 끝까지 돌봐줍니다.
  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 그돌라오멜 왕에게 붙들려갔을 때
                    사병 318명을 데리고 구하러 갑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산도 좋고 물도 좋고 하듯이
    외관상 우선적인 것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신앙적인 선택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좇아 하나님의 주신 비전을 선택해야 합니다.
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 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
롯이 신앙적인 인물 같았더면
    삼촌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고 삼촌의 보살핌 덕분인데
    삼촌이 먼저 선택하이소, 이럴건데
벌써 안목의 정욕으로 바라보니
    요단들을 바라보고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니
    물이 넉넉하니 목초가 풍부할 것이고 그래서 요단들을 선택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지 환경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요단들이 물이 넉넉하여 목축하기에 적합한 땅이지만
13절에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영적으로 어두우니 죄악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롯은 요단들판에 야심을 품고 소돔 성으로 떠나갑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지 아니하고
  자기의 안목에 좋은 것을 선택합니까? 바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일은                       
항상 가짜가 더 빛난다는 것입니다.
악은 위장하고 속이며 겉은 항상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럽습니다.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같더라 - 얼마나 매혹적인 말입니까?
      에덴동산 같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 눈이 오면 동네 큰 형들 따라 꿩 잡으러 갑니다.
콩알 속으 파내고 그 속에다 사이나를 넣어 놓으면
  눈이 와 먹이를 못 구한 꿩이 콩알을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까?
콩 먹었다고 당장 죽습니까?
  그러나 조금 있어면 비실비실 하다가 쓰러집니다.
세상이 주는 것들 대부분은 그 속에 독이 들어 있습니다.
세상이 준다고 해서 주는 대로 다 먹는 사람, 영적으로 곧 쓰러지고 맙니다.
    세상이 주는 정보, 세상이 주는 사교와 즐거운
    세상이 주는 여가 문화, 세상이 주는 사상 학문,
이 속에는 마귀란 녀석이 다 독을 넣어 놓은 것 있지요.
신앙이 없는 사람은
    죄의 독소가 있던 없든 우선 안목에 차는 것이 우선이지만
신앙의 사람은 그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느냐? 가 행동의 기준입니다.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양보한데는
첫째는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12:7절에 이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땅 때문에 다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큰 것을 바라보는 성도는 작은 것 때문에 다투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것 때문에 다투는 것은
    하늘에 신령한 것에 눈이 뜨여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는 더 큰 것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이 땅의 것 때문에 다투지 맙시다. 비굴하지 맙시다.
누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까?
시37:11절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마5:5절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것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온유한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성도가 그래야만이 하나님의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식 같은 룻을 떠나보내고 나니 아브람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마음 한 구석이 뻥 뚫어진 것 같았겠지요.
그때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무어라고 말하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14절)

14절 [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
롯으로 말하면 아들 같은 조카입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위고 삼촌 가정에서 자라난 조카입니다.
섭섭하기도 하고 괘심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열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4. [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보라 ]
15. [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는 은혜 받은 성도는
      세상이 캄캄해지면 하늘 문 열린다는 것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것 포기하고 나면 하나님의 영원한 것으로 채워진다는 것 기억,
아브라함 얼마나 허전해겠습니까? 마는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위로합니다.
아브라함아 잃은 것 같지만 잃은 것이 아니야~!
[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직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한 편을 잃었지마는
        나는 네게 동서남북을 다 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하나님을 위해 신앙을 위해 얼마나 포기하느냐?
붙들려고 할 때는 더 큰 문제가 일어났지만
포기할 때는 더 큰 것으로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소돔을 포기할 때 가나안을 주었습니다.
    이스마엘을 포기할 때 이삭을 주었습니다.
    이삭을 포기할 때 - 예수 그리스도를 주었습니다.
위대한 포기 위대한 승리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성공의 비결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남동서를 보라 고 합니다.
여기에 눈을 들어 하는 말은
    하나님의 눈높이에 맞추어 -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눈높이에 맞춥니까?
    믿음으로 - 즉 믿음의 눈을 떠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눈 바꾸는 운동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너 있는 자리에서 바라보라고 합니다.
    높은데 올라가서 바라보라고 한 것이 아니라
    너 있는 곳에서 바라보라고 합니다.
지금 나의 형편 환경 안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의 비전이 내게도 보일 줄 믿습니다.

영국의 어느 마을에 부모를 일찍 여윈 채
    할아버지의 손에 자라난 에드워드 윌리암 보크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너무 너무 가난해서 살아가기가 힘들었던 보크는
  큰 꿈을 안고 미국으로 이민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할아버지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고 배를 타려 할 때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에게 한 마디 유언같은 부탁을 하였습니다. 
  `너 있는 곳을 언제나 좋게 만들어라`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소년은 할아버지 말씀을 가슴깊이 새기고
    이 말씀대로 살 것을 굳게 다짐하면서 영국을 떠났습니다. 
소년 보크는 미국 북부인 보스톤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거리에서 신문 가판대를 만들어 놓고 신문팔이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른 새벽, 남보다 먼저 나와서 신문을 파는 가판대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다른 사람보다 한발 앞서 조간신문을 받아다가 손님들에게 팔았습니다. 
석간신문도 남보다 먼저 가져다가 팔면서
        주변을 늘 깨끗하게 정리하고 유지했습니다. 
이 가판대에서 조간신문을 종종 사서 보던
  커티스 출판사 사장은 부지런하고 주변정리를 늘 깨끗하게 해 놓는
  그 소년이 마음에 들어서 그를 커티스 출판사의 청소부로 채용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의 성실성에 출판사 임원들은 그를 정식사원으로 채용을 했습니다. 
보크는 그곳에서 다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판매부장으로 승진하였습니다. 
그곳을 언제나 좋게 만들리라는 정신으로 일하는 보크는
다음에 경리부장이 승진되었고,
그의 신실성과 근면성에 반한 커티스 출판사 사장은 그를 사위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편집국장과 총 지배인을 거쳐
    마침내 커티스 출판사 사장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커티스 출판사를 미국내의 유명한 출판사로 키웠습니다. 
가난뱅이 보크가 기업의 사장이 된 겁니다.

그는 오직 한가지 할아버지가 준 교훈
    `너 있는 곳을 항상 복되게 하라`는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날마다 임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가지 면에서 우리의 있는 곳을 복되게 해야 합니다. 
1) 인간관계에서입니다. 
  아브람은 롯과 아름다운 관계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눈 먼 시각장애자가 등불을 켜 들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느 사람이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앞을 보지 못하는데 등불을 켜 드셨군요?` 
`그렇습니다. 나는 앞을 볼 수 없지만
          상대방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엔 언제나 화목이 중시되어야 합니다. 
    화목을 깨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2) 물질관계에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물질 관계가 깨끗하고 정직해서
  갈수록 더 많은 풍요의 복을 누려야 합니다. 물질관계가 아름답지 못하면
끝이 항상 부끄럽습니다.

3)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입니다.
  사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복되면
      사람과 물질은 절로 붙여 줄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눈을 들어 바라 보라고 하시며
        결국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3. 결국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15-16절)

15-16절 [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
      [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과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데 네 자손도 세리라 ]

왜 하나님께서는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명령을 하셨을까?
이것에 대한 해답은 다음에 나오는 것이다.
[ 네가 보는 그 땅을 다 너희 자손에게 주시겠다 ] 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미래를 보장해 주시겠다` 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미래를 믿음의 눈을 뜨고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역사하실 하나님 자신의 손길을 네가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 영안이 뜨여지면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약속한 약속을 이루기 위한 그 손길을 눈을 뜨고서 바라보라는 것이다.
롯이 가졌던 눈은 안목의 눈, 육신의 눈, 물욕의 눈이지만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는 눈,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손길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하겠다는 것이다.

민14: 가데스 바네아 사건
    여호수아 갈렙은 믿음의 눈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민14:9절에
[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 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17절)

17절 [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구체적으로 지경을 넓히기 위해 움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움직이는 대로 하나님은 지경을 넓혀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있습니다. 
광야를 걸은들 샘이 터지겠는가?
    걸어보아야 사막인데, 이렇게 했다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을 때 가만있어도 주시겠지,
    하고 지경을 넓히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는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롯에게 양보했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하니까 그렇게 했습니다.
바로 발바닥 사건입니다.
    발바닥 사건의 원조는 아브라함입니다.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전도 해야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발바닥 사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을 누리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 있습니다. 
복의 약속은 받았는데, 복 받기 위해,
    자신의 지경을 넓히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에 나가지 않습니다. 
    말씀의 자리에 나가지 않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복 주신다고 했으니까?
      아마 이렇게 있어도 잘못되지는 않을거야. 
종과 행으로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더 이상 일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과 횡으로 우리가 행하기 시작할 때 일하시지,
      행하지도 않는데 직접 일하시지는 않습니다.
막연한 생각이
    우리의 복과 삶의 영향력을 가로막을 수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70인의 제자들에게 2명씩 짝지어 주시고
    가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좇고,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 말 한마디 듣고 2명씩 짝지어 동네동네 다녔습니다. 
종과 횡으로 행하여 가라는 말씀대로 순종하여 갔더니,
가는 곳에서 귀신이 나가고, 병든자가 일어나고,
    복음이 전해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순종하여 믿음의 운동을 하니 영향력이 확대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넓은 영향력을 얻기를 원하십니까?
믿음의 운동을 계속 하십시오.

이제 아브람은 나아갑니다.


5. 아브람이 하나님이 보여주신 비전을 실현하기 위하여 무엇부터 합니까?(18절)

18절 [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은
바로 아브람의 삶의 중심지로서 오늘날 교회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즉 아브람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한 것은 행동으로 시작하는 실천력의 결핍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과감히 일어납니다.
그가 한 일은 1)  장막을 헤브론으로 옯겼습니다.
        2) 거기서 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믿고 구체적, 실천적으로 행하는 삶은
      예배를 앞세우며 나아갑니다.
이것이 행동하는 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을 믿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대개 행동하는 사람은 예배를 잊고 삽니다.
  기도하는 것도 잊고 삽니다.
  그런 행동은 하나님의 비전을 성취하는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세상의 것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롯처럼
    예배 없이 기도 없이 행동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비전을 실현하려는 자들입니다.
나와 내 자손들이 영원히 거주할
    영적 공간, 하늘의 공간, 신령한 자리를 얻으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 속에는 하나님을 향하는 단이 세워져야 합니다.

악성『하이든』이 죽기 꼭 1년 전
    그의 오라토리오 `창조`가 연주되었습니다.
늙고 쇠약한 하이든은 휠체어에 앉아서 있었는데 감격스런 연주가 끝나자
    연주자 일동과 청중들은 모두 하이든을 행해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때 하이든은 `내가 아니오 내가 아니오. 창조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오.
          내가 아니오` 그는 아니오 라고 하면서 일어서려다 쓰러져
병원으로 갔는데도 계속 내가 아니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예술의 세계에 정진하는 하이든은 단을 쌓을 줄 알았기에
    진정한 약속의 땅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바라보는 큰 꿈이 있으면서도
    은혜의 단을 쌓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지내오면서 내게 주신 약속의 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아브라함과 같은
    예배의 자세 감사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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