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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감사와 평안으로 든든히 서가는 공동체 (행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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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평안으로 든든히 서가는 공동체 (행 9:31)

2008년 새해 첫 주일입니다. 2007년과 2008년을 우리가 현상적으로 비교해 볼 때, 별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교회생활이나 가정생활,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우리는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합니다. 예배당도 그대로이고, 설교자도 동일합니다. 분명히 역사는 새롭게 진행되었지만, 모든 것은 예전 그대로입니다. 작년과 별다른 변화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외부적인 변화는 실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는 분명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결심입니다. 새로운 각오와 자세입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에게는 작년과 다른 새로운 목표가 생겼습니다. 그 목표를 바라보며, 그 목표를 방향 삼아 이 한해를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2008년을 맞으면서 새로운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함께 바라보며, 함께 기도하고, 함께 헌신하며, 함께 이루어 가야할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말씀 속에 있습니다. 행9:31절에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저는 2008년도 목회를 계획하면서 기도하는 중에,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교회가 든든히 서 가고, 점점 수가 더 많아지는, 이 흥분된 말씀의 환상에 붙들렸습니다. 그리고 금년으로부터 시작되는 담임사역 10년째의 자리에서 이 말씀을 붙들고 거절할 수 없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흥분가운데 이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2008년 한 해 동안 우리 공동체가 함께 붙잡고 기도하며 나아갈 방향과 목표를 이 말씀에서 찾으며, 금년 표어도 "감사와 평안으로 든든히 서가는 공동체"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오늘 말씀을 함께 살피며 우리의 가슴에 담으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본 본문은 초대 교회에 있어서 대단한 사건입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세워지면서 엄청난 부흥을 경험하는 가운데 어느 날 한 순간 엄청난 핍박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보통 환난의 바람이 분 것이 아닙니다. 당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부딪힌 핍박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들이 평생 모았던 재산을 몰수당합니다. 형제가 끌려나가 비참하게 죽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고, 야고보가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사도들이 나가서 억울하게 매를 맞고 쓰러지며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옵니다. 왜 이런 고난이 옵니까? 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라는 그 한 가지의 이유 때문에 그들은 핍박을 당하며 죽어야했고, 옮겨 다니는 도망자로 방랑의 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를 믿으면 잘 살 줄 알았고, 복 받을 줄 알았지, 예수 믿어서 이렇게 된다면야 그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데 저 예루살렘 초대 교인들은 복 받는 것은 두고라도 예수를 믿자마자 이렇게 엄청난 핍박을 맞게 된 것입니다.

이 핍박의 한복판에 누가 있었느냐 하면 훗날 바울이 된 사울입니다. 사울이 초대교회에게 고통을 안겨 준 것은 상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행8:2절에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리고 9장에서도 1-2절에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이로 인해 교회는 요즘말로 하면 한 순간에 폭탄을 맞은 것처럼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핍박의 장본인이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그의 삶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핍박자가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의 증인 자로 바뀝니다.

이는 어떻게 표현 할 수가 없는 엄청난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어떤 학자는 사도행전의 두 가지 큰 사건이 있다면 하나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요 다른 하나는 사울이 예수님 만나 회심한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오순절 사건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 사마리아 땅을 복음으로 흔들어 놓은 사건이라면 사울의 회심은 이방세계, 저 로마 세계를 복음으로 변화시킨 놀라운 일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변화를 한 신학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울을 바울로 바꾸셨다! 그리고 바울은 세계 역사를 바꾸었다!'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지금 바울, 이 한 사람의 회심을 통해 핍박받은 교회는 다시 안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행9:31절에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그리하여'란 말은 바울의 회심이 일어난 후라는 말입니다. 한 사람의 가치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번 태안반도에 가서 우리가 그 현장을 실감나게 보지 않았습니까? 실상은 뉴스를 보면서 안타까움만 있었는데 막상 우리 성도들과 함께 그 현장을 가보니까 가슴이 매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로마서 8장의 말씀처럼 인간의 잘못 때문에 만물이 탄식하는 것을 실감한 현장이었습니다. 마치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온 인류가 죄의 고통을 짊어졌듯이, 몇 사람들의 부주의로 인하여 천혜의 환경을 자랑하던 자연이 검은 기름을 뒤집어 쓴 채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서식하고 있는 철새들도 영문도 모르는 채 새까만 기름을 뒤집어쓰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야 이유를 알고 당한 일이지만, 조개들이나 굴들, 또 바다의 생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숨을 쉬지 못한 채 대책 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꺼멓게 타 버린 듯한 바위하나를 붙잡고 서너 시간 닦아 보지만, 별 소득이 없어 보입니다. 이런 생각이 어디 저 혼자의 생각이겠습니까?

하루 종일 수많은 사람들이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해변을 부산에서, 강원도에서, 서울에서, 이곳저곳에서 온 사람들로 꾸역꾸역 해안가를 메꾸고 있었습니다. 새까맣게 덮인 태안반도에 뒤덮인 기름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몸에서 몸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봉사자들을 보며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차라리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있었습니다. 비록 모든 것을 잃어버린 허탈감 때문에 주변 가게마다 우리 가게는 "지금부터 무기한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라는 비통한 프랑카드도 이곳 저것 붙어 있었지만, 우리 일행은 이 민족이 또 다시 절망을 딛고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 교회 역시 절망으로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었지만,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킨 인내의 결과가 교회의 평안이 찾아 온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enjoyed peace',라고 나오는데 이는 성도들이 평화를 누리며 즐겼다는 표현입니다. 상상이 가지 않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당시 초대 교회가 누리는 이 평안은 보통 평안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이요,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이제 고난이 와도, 아픔이 밀려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평안이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이란 이 세상에서의 무사안일이나 천하태평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14:27절에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이 언제 제자들에게 들려집니까? 이제 불과 몇 시간 후면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야말로 비통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 평안을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곧 처참하게 십자가 위에서 찢겨 죽어야 할 그 분이 어찌 참된 평안을 이야기 할 수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평안과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다릅니다. 세상의 평안은 가진 것이 있어야 평안한데 하나님의 평안은 다 빼앗기고도 주시는 평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된 평안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도 가질 수 있는 평안이 참된 평안입니다. 이 평안 가운데 교회는 든든히 서가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여기 31절에 보면 '든든히 서 간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에 우리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맞추었습니다. '든든히 서 가는 공동체',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것이 이 한해 동안 우리 공동체가 함께 바라보며, 함께 기도하고, 함께 헌신하며, 함께 이루어 가야할 분명한 목표요 방향입니다. 여기 표현되어진 이 말, '든든히 서 간다'(오이코도무네메)라는 말은 건설되어지다''세워지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건설하다', 혹은 '세우다'라는 말을 듣게 되면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만,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건설'이나 '세워짐'은 외형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면적인 건설, 'being built up', 내면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모처럼 자신들에게 다가온 주님의 이 평안을 즐기면서 그들이 더욱 더 힘을 썼던 것이 있습니다. 본문에 두 가지가 나오는데 우리 역시 이 말씀을 동일하게 사모해야합니다.

첫째는 예배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를 경외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31절에 "주를 경외함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경외'라는 단어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삶의 모습을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을 경외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당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고난 속에서도 그들이 포기하지 않은 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 밤낮으로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 거룩하신 보좌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순간, 순간 끓어올랐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도들의 모습은 예배하는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비록 세상은 저들을 흩어 놓았지만, 그들은 어떤 자리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만큼 예배가 중요합니다.
위대한 영적 거인이라 할 수 있는 요한 웨슬레는 이런 찬송을 작사했습니다.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입이 만 개라면 만 개의 입을 다 벌려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주님의 은총을 찬송하고 싶다고 노래합니다. 얼마나 그 마음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싶어 열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는 지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예배의 심정이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일을 지키고, 주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이 주일 예배를 통해서 기독교가 이어져왔고, 이 세상을 바꾸어 왔습니다.

우리는 이 예배 시간 동안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인해 실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얼마나 큰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영혼이 기뻐 춤을 춥니다. 우리 영혼의 세포가 기뻐 춤을 춥니다. 우리가 제대로만 예배를 드리며 이러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 해 계시는데 어떻게 은혜를 받지 못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는데, 그 영광 앞에 어떻게 춤을 추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예배의 성공자가 인생의 성공자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가 분명히 이 자리에 있음을 우리 모두가 믿어야 됩니다.

둘째는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그 위로는 여러분이 보시는 성경 밑에 바로 '후원'이라고도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요즘은 후원의 시대가 아닙니까? 특별히 스포츠 세계를 보면 이 후원이 회사의 경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엄청난 투자를 합니다. 요즘 스포츠 마켓에 열을 올리는 위나라 전자 업체를 보십시오. 한국의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각각 첼시와 풀럼의 유니폼에 자사 로고를 넣었습니다. 삼성전자는 5년 동안 5천만 파운드(약 931억 원)에 첼시와 우원 업체로 계약했습니다. LG전자도 설기현이 뛰는 풀럼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는 후원 메인 스폰서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후원은 자기의 이익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익이 안 되면 계약을 해지하고 오히려 손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후원 방식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후원자인데 한번 내 모습을 보십시오. 내가, 나를 보아도 부족한 게 투성이인데 내가 어디가 예뻐서 만 왕의 왕이신 그분이 아들을 내어주기 까 하시면서 나를 후원자로 삼으셨습니까? 그 성령이 후원자가 되어 그들을 붙잡고 계시니까 엄청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교회에 거하시고, 성령이 내 안에 임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안주하면 안됩니다. 평안에만 안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충만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바울이 성령 충만하여 가로되', 스데반을 놓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모두가 충만한 대명사가 있습니다. 이 충만의 역사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충만해야 됩니다.

여러분,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몇 가지 특징을 말씀드릴 것입니다. 마음에 잘 담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본인이 성령 충만한 지 안 한지를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만약 성령 충만하지 못하다면 충만하기를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첫번째로 성령 충만하면 입이 열립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임한 성령은 제일 먼저 120명의 입을 열어 놓았습니다. 꼭 다물고 있던 사람들의 입을 열어 하나님의 큰 일,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온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날 정도로 소리를 지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을 옆에 두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합니다. '아, 저 영혼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 사람에게 복음을 좀 전할 수 있을까?' 어쩌다가 입을 열지 않고 피곤해서 입을 다물고 전할 기회를 놓쳐버리면 집에 돌아와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여러분, 가 우리 안에 충만한 것입니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니까 그런 감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성령 충만하면 담대해집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겁쟁이 베드로가 성령충만하자 얼마나 담대해졌는지 사도행전을 열기만 하면 금방 나옵니다. 전도라는 것은 사탄을 향해 선전포고하는 것입니다. 내가 벌써 전도지 들고 나간다는 것은 사탄을 향해 선전포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일컬어 전투하는 종교라고 합니다. 지금도 사탄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기독교가 반대 세력에 의해 엄청난 핍박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 아프칸 피랍 사건을 기점으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거대한 안티 그룹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기도교가 사회에 보여준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엄청난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세습문제라든지, 또 목회자의 비리문제를 건드리는 차원을 넘어서서 이제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 마져 흔드는 무서운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희대의 사기꾼이다','기독교도 없는 세상을 꿈꾸다'는 말을 가지고 자기 세력을 키워 나가는데 한 인터넷 사이트에 보면 안티 기독교 성향을 가지는 단체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중에 '클럽 안티 기독교' 까페 회원은 6000명에 달하는 열혈 조직이 되어서 반 기독교 운동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들은, 예전 기독교를 '교회에서 상처받았다'는 단순 비난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많은 토론과 세미나를 통해서, 제법 논리성을 갖춘 비판을 하고 있다. 몇몇 유명 지성인들을 내세워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서 직접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고, '안티 기독 조직론'라는 것까지 만들어, 그 강도를 더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초등학생들을 위한 '초등학생용 안티 기독교' 싸이트까지 운영되고 있으니,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혹독하게 교회를 핍박하는지 모릅니다. 전도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못살게 구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데이빗 바렛(David B. Barrett)이라고 하는 유명한 통계학자가 있습니다. 그의 통계에 의하면 1900년대 복음을 전하다가 끌려가 죽은 순교자들, 그 다음에 예수 믿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다가 죽은 순교자들이 1년에 15만 명이 된다고 합니다. 즉 하루에 약 400명이 지구 도처에서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는 말입니다. 북한에 있는 참혹한 핍박까지 포함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요즈음도 지하 교인을 ?아내기 위해 공산당 간부를 위장 교인으로 등록시켜 예배 처소를 ?아내어 공개처형을 하거나 수용소에 보내는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만큼 사탄은 오늘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집요하게 갖은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핍박하고,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을 못살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사탄이 아우성을 쳐도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이 사탄의 역사를 짓밟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그 고난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을 따라 담대히 전하는 삶이 일어납니다. 이는 우리가 성령 충만할 때 가능합니다. 여러분, 그 당시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은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 회개란 결코 쉬운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놓고 무릎을 꿇으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일을 누가 감히 강조할 수 있습니까? C. S. 루이스의 말처럼 '회개하라'는 말은 그 사람을 향해 죽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즉 일종의 죽음을 각오하라는 말인데, 누가 감히 가서 사람들에게 '너 칼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죽으라.'고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1장부터 28장까지의 기간을 보통 약 30년으로 잡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제일 처음 등장한 교회의 교인 수는 몇 명입니까? 120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약 30년이 지난 후, 사도행전의 기간동안 예수 믿고 돌아온 모든 성도들의 숫자를 학자들은 10만 명으로 어림잡습니다. 30년 사이에 120명의 갈릴리 촌놈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는데,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사마리아를 넘어 헬라권에 이르기까지 수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 믿고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누구의 역사입니까?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입증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그 능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입증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이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과 사도들과 초대교회 사람들이 마신 우물물을 똑같이 마셔야 됩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의 원천인 성령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성령은 이미 교회에 임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성령은 우리 모두에게 임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주님을 향해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기대해야합니다. 우리 교회가 올해 "감사와 평안으로 든든히 세워지는 공동체"로 아름답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한해 우리 모두가 예배에 생명을 겁시다. 예배 때마다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함으로 뜨거운 구원 감격 속에 날마다 감격이 넘치며 예수 믿는 게 이렇게 좋은가를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오게 전도에 힘을 쓰십시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삶이 놀랍도록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사람들로 교회가 가득가득 채워지는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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