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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아버지의 마음으로 (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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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마음으로 (눅 15:11~32)

우리나라도 그렇고 이스라엘 나라도 그런데 누군가와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곧 그 사람과 같은 무리가 됨을 의미하고 한 가족 됨을 의미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어떤 가난한 죄인의 집에 들어가서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성경에는 그 집이 누구의 집이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리새인들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 집은 죄인의 집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저 사람은 죄인들과 함께 들어가서 죄인의 집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저 사람은 율법을 무시하거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인가?” 라고 불평불만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들의 속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잘못된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세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하나는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또 하나는 드라크마 비유입니다. 그리고 또 마지막 하나가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두가지 비유를 통해 주님은 당신이 왜 오셨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본문에서의 주인공은 탕자가 아닙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탕자의 아버지입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시고자 하신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탕자는 부모의 그늘 아래서 이제는 스스로 독립하여 마음대로 원하는 데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버지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씀 합니다.
“아버지 어차피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재산 중에 일부는 나에게 주어질 텐데 미리 앞당겨서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라고 하자 아버지는 고민을 하다가 각각 큰아들, 작은 아들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둘째 아들은 며칠이 못되어 재산을 다 팔아 먼 나라로 이민을 가버립니다. 한번 멋지게 성공해 보려고 나갔지만 결과는 허랑방탕하다가 몇 개월이 쫄땅 망하고 말았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 나라에 기근이 닥쳐 거지 노릇도 힘들어 남의 집에 돼지를 기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결국 거지가 되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돼지의 밥을 얻어 먹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확수고대하며 밤마다 대문을 열어놓았습니다. 혹시나 대문을 걸어 잠그면 아들이 들어오지 못 할까 봐 대문을 열어놓고 밤늦게 대문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이런 모습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탕자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먼 발치에서 아들인 것을 알아보고 달려갑니다. 그 더러운 거지꼴의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좋아합니다. 아들은 품꾼의 하나로 봐달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너무 기뻐서 잔치를 벌입니다. 그리고는 새 옷과 새 신발과 금반지를 끼워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탕자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유산을 받았으나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집에서 아버지를 묵묵히 섬기던 큰 아들, 그는 참 효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오면서 본색이 들어 났습니다. 그는 동생을 받아주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아버지를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심지어는 “내게는 염소새끼 한 마리도 주시지 않았다”며 원망 불평이 대단합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잃어버린 사람입니까? 형식적으로 보면 집나갔다 다 날리고 돌아온 둘째가 탕자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집안에 있는 큰아들이 탕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으로 바래새인들, 서기관들에게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겉으로는 효자처럼 큰소리치나 실제로는 너희가 탕자다.” “여기 내가 식사를 같이 하는 이 죄인들은 자기 죄를 깨닫고 돌아온 용서받은 탕자다”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이 주는 의미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2008년도 표어로 “아버지의 마음으로..” 라고 정했습니다.
여러분이 2008년도 한 해 동안 주님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할 때 성공하는 신앙생활이 되려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마음을 갖기를 원하느냐? 그것을 알려면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성도를 섬기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웃을 축복하는 한해가 되길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늘 아버지가 우리를 향해 갖고 있는 그 마음은 어떤 것을 일까요?

1.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가 올바른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조금 깊이 생각해 보세요.
왜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의 재산분할 요구를 수락했을까요? 그것을 안주었으면 나가지도 안았을 것이고 그러면 허랑방탕할 일도 없었을 텐데..... 왜 재산을 나누어 주었을까요? 재산을 나누어 주면 “누가 아냐? 혹시 성공해서 돌아올지도 모르지 않냐?” 해서 준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21장17절에 따르면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상속할 때에 장자는 2/3를, 그리고 차자에게는 1/3을 주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버지가 유언장을 써서 재산을 상속인에게 물려줄 수도 있었으며, 또한 생전에 재산을 선물 형식으로 나누어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아버지가 생전에 유산을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해도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는 그 재산을 임의로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어도 재산을 임의로 처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며칠이 못되어 다 정리해서 이민을 가버립니다. 아주 못된 아들이었습니다. 분명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재산의 처분권이 아버지에게 있었는데 욕심에 사로잡힌 아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다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재산을 분할할 때부터 그 아들이 집을 나갈 것을 알고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재산을 다 잃더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재산을 다 버려서라도 아들이 사람이 되어 돌아오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하겠다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사람을 얻기 위해 참 비싼 대가를 치르시는 분이십니다.
나를 살리고 나를 자녀 삼기 위해 엄청난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순교를 당하게 했습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혀 보내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많은 시간을 기다리시고 많은 비용을 낭비하셨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를 방치하시시기도 하셨습니다. 때로는 엄청난 고난의 대가를 치루고 있는데도 그냥 모르는 척 하고 기다리시고 계시기도 하셨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손댈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고 얼마든지 못하게 하실 수 있었으나 그러면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 여러분!
내 뜻대로 할 수 있다고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게 맘에 안들었습니디. 그래서 하나님 명령을 거부하고 항구 도시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 배를 배 삯을 내고 올라탔습니다. 타면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거 봐라, 니느웨가 아니야, 다시스로 가는게 하나님의 뜻이야”
그러나 얼마 못가 하나님이 만든 대풍을 만나 고생 고생하다가 결국 물고기 배속까지 들어갑니다. 거기서 비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돌아와 니느웨로 갑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올바로 세우시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지불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임을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올 2008년도 한해, 우리도 이런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깨닫고 돌아오기만 하면 어떤 것도 다 용서 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탕자 아버지는 탕자가 집을 나간 순간 돌아올 것을 알고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이제나저제나 돌아오기를 기다리느라 동구밖 언덕에 나가서 목을 빼고 돌아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고생을 하기는 하겠으나 반드시 돌아 올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왜요? 그 아버지는 탕자를 나무도 잘 알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성격도 습관도, 능력도 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돌아올 것도 알았습니다.

왜 아버지가 기다리죠? 돌아오기만 하면 두들겨 패주려고 그럴까요? 아닙니다. 아버지는 이미 그 아들을 용서한 것입니다. 돌아오면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이미 집을 나가기 전, 재산을 나누어 줄 그때 용서를 한 것입니다.
날마다 기다리는 그 마음은 이미 용서를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탕자도 그렇고 현세의 탕자인 우리도 그렇고 왜 타락하지요? 왜 그 좋으신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요? 우리가 잘 알잖아요.
우리의 경험으로 몇 가지를 추축하면

1)첫째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너무 멋있어 보입니다. 아버지와 아버지 집은 너무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데 세상은 아주 재미있어 보입니다. 오늘 우리로 보면 교회도 재미없고 하나님도 재미없고 설교도 재미없는데 세상은 너무 즐겁고 흥미진진합니다. 노래방도 재밌고 영화관도 재미있고 도박도, 경마도 재미있습니다. 내가 뛰어들면 한건 할 것 같습니다. 내가 가면 한가닥하고 내노라 하게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품을 떠납니다.
 
2)둘째는 헛된 자유를 갈망합니다.
아버지 품에 있으면 고생만 죽으라 하는 것 같습니다. 주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생고생하고 힘들어 죽겠는데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목사님도 칭찬 격려도 안 해 줍니다. 그러니 해방되고 싶습니다.
 
3)셋째는 부귀영화가 보이는 듯합니다.
그것이 그리 어렵지 않게 보입니다. 한순간 눈감으면 나도 세상에서 한 몫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큰소리치고 비까번쩍하게 살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게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게 실수하는 것입니다.
왜요? 그것이 진정한 자유도 아닙니다. 물고기가 물 안에 있을 때 자유지 물 밖으로 나가면 곧 죽음입니다. 성도는 주안에 있을 때가 자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그리 만만한 것도 아닙니다. 자유를 즐것처럼 우리를 속이고 유혹하나 막상 나가며 죄의 종으로 노예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몰라서 탕자처럼 한번 해보셨습니까?
그래서 폭삭 망해 보셨습니까? 아니면 아직 망하지는 않고 그럭저럭 버틸만 하십니까? 즉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돌아오면 심판이 기다릴 것 같다고요? 천만에요. 주님은 지금도 눈 빠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이미 다 용서하시고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십니다. 주저하지 마세요. 망설이지 마세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완전 거지꼴 됩니다. 심판이 무섭다고요? 아닙니다.

봉독한 본문의 아버지의 용서를 보세요.
그분은 돌아온 자에게는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원상회복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세상은 과거를 많이 따집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과거를 따지지 않습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과거는 한마디도 묻지 않습니다. 우리 같으면 “너 이놈, 내 재산 다 어찌했노?” 하든지 아니면 “거봐라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말똥 싸다” 하던지.... 하시며 속이라도 상해 하실텐데 그런말 한마디 없습니다.

그냥 원상회복입니다. 어떻게요? 아버지는 너무 기뻐서 잔치를 벌입니다. 그리고는 새 옷과 새 신발과 금반지를 끼워줍니다. 이것은 신분회복이고 상속권 회복입니다. 할렐루야! 
참된 용서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사야1:18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그러기에 우리도 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용서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절대로 너 두고 보자가 아닙니다. 


3.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품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좋아서 난리인데 첫째 아들은 그것이 못마땅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는 짓이 전혀 맘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기 질투 속에 잔치에 나와 보지도 않습니다. 일종의 시험든 것입니다. 요즘말로 상처 받은 것입니다.

왜요? 이 첫째 아들의 시험은 왜 생긴 것인가요?
1)그는 아버지 마음을 일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 그 자체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동생이 가지고나간 재물을 보았습니다. 
2)그리고 그는 자기와 동생을 비교했습니다.
혼자 있을 땐 문제가 없었습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재산 말아 먹은 둘째가 돌아오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저놈은 저렇게 사랑 받는데 나는 뭐야? 여기서 시험이 생깁니다.
그동안 첫째는 자기는 아버지의 뜻대로 충실하게 살았다, 나는 옳게 살았다는 義(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가 동생이 돌아왔을 때 상급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오히려 동생이 의롭게 되는 꼴을 본 것입니다.
그러니 확 돌아버린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첫째 아들이 이해가 되나요? 솔직히 첫째가 시험 든 것 당연한 것 아닌가요?

그러나 그는 하나를 놓쳤습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아버지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죽은자를 살리는 그것입니다. 그 둘째 탕자는 죽었다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생명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긍휼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절대로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교회 신앙생활을 은혜롭게 하기 어렵습니다.

출 33:19에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했으며
롬 9:16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우리가 우리 노력이나 수고의 댓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아버지의 마음을 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붓고 있습니다.
스승이나 통치자의 마음을 붓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부어서 우리에게 사역을 하고 감당하길 원하십니다. 그 마음이 저와 여러분들 속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한 없는 사랑과 용서로 우리를 품으십니다. 그 마음을 우리가 품고 살 때 우리가 행복하고 그 마음을 품고 살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2008년도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승리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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