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년] 행복의 나무 (시 1:1~6)

  • 잡초 잡초
  • 474
  • 0

첨부 1


행복의 나무 (시 1:1~6)

2008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첫 주일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여러분과 가정 위에 주의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크고 작은 소원들을 갖게 됩니다. 혹은 무엇을 갖고 싶다든지, 혹은 무엇을 하고 싶다든지 ... 이런 저런 소원이 있습니다. 대통령 당선자는 새해 희망을 담은 ‘시화연풍’(時和年豊)이란 사자성어 휘호를 발표했습니다. “나라가 태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는 뜻으로 경제 활성화에 대한 소원을 담고 있습니다. 또 ‘교수신문’에서는 새해 희망의 사자성어로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말을 선정 발표했습니다. “비가 갠 후 바람과 달처럼 상쾌하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산뜻한 새해를 바라는 소원의 표현입니다.

모두 다 좋은 소원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새해에 어떤 소원을 갖고 시작하셨습니까? 혹시 특별한 소원을 정하지 않은 분이 계시면 제가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미 새해의 소원을 갖고 계신 분도 추가로 가지십사 하고 제가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행복의 나무’(Tree of Happiness)가 되고 싶다는 소원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편에 소개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런 저런 소원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게 하나하나 축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행복의 나무’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고 근본적인 축복입니다.

빗대서 말씀드리자면 이런 겁니다. 예> 과일 한 바구니 vs. 과일 나무 한 그루 심는 것

이렇게 말씀드려도 혹시 이런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아, 그래도 나는 당장 과일이 더 급하단 말이야.” 정 그런 분들은 할 수 없지만, 두고두고 풍성한 복을 얻기 원하신다면 제가 추천하는 소원을 함께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금년 한 해 동안, 아니 더 나아가 일평생 복된 인생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먼저 행복의 나무가 과연 무엇인가 말씀드립니다. 시편 1편 1절에 ‘복 있는 사람’이란 말이 나오고 5절과 6절에는 ‘의인’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 두 가지 말은 표현만 다를 뿐 같은 겁니다. 또 3절 보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는 비유가 나오는데, 이것도 같은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인’이 곧 ‘복 있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을 가리켜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모든 말은 종합해서 ‘행복의 나무’ 이렇게 이름을 붙여봅니다.

[1] 의인, 복 있는 사람 : 행복의 나무

시편은 잘 아시는 대로 150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자도 각각 다르고, 시의 종류도 각각 다르고, 구체적인 내용도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시편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의인의 인생길과 악인의 인생길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편의 주제도 바로 이겁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극명하게 대조되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편 1편은 150편 전체에 대한 ‘서시’(序詩)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인과 악인이라고 말할 때 한 가지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도덕적인 차원에서 보면 곤란하다는 사실입니다.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라, 영적인 혹은 존재론적인 면에서 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보면 사람들이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이고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사람들끼리 비교하면 의인과 악인이 구분되지만,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숫자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은 100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가요? 기껏해야 70점, 80점이라는 겁니다. 물론 30점, 40점짜리와 비교하면 월등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기준 미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하면 펄쩍 뜁니다. 그러나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흠이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다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죄인인 인간 스스로 획득할 수 없습니다. 다만 에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곧 ‘의’(義)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과 축복이 단절되고 만 것입니다. 속죄가 전제되어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다시 회복됩니다. 생명과 축복도 회복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양으로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불화합니다. 아버지가 화가 나서 매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어머니가 말리며 끼어듭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내려친 매를 어머니가 대신 맞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죠? 그것으로 아버지의 화가 풀리고 아들과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 대속의 복음입니다. 그것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겁니다.

이런 원리를 갈2:16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인간 스스로의 행위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겁니다. 기독교 교리 중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핵심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인정된다는 의미로 흔히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교리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해서 의인이 된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얼른 생각해 보면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착하고 바르게 살아야 복을 받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교 사상이고, 기독교는 그게 아닙니다. 인간들끼리 비교해서 조금 착하게 보인다고 복을 받고, 조금 덜 착하면 복을 못 받고 그런 게 아니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복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므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이 곧 복 있는 사람이고, 비유하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인 겁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것처럼 하나님께 연결되어야 복 있는 사람, 행복의 나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도덕 이전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지 못한 사람, 즉 불신자는 악인이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왜 복을 받지 못하느냐 하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지 못하고 단절된 상태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런 인생을 가리켜 ‘바람에 나는 겨’(쭉정이)라고 비유합니다. 겨나 쭉정이를 겉으로 보면 어엿한 열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헛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휘~ 하고 날아가 버립니다. 겉으로 볼 때 이것저것 걸치고 있고 가진 것 같지만, 허탕이라는 겁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섭리주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의인과 악인 딱 두 종류로 나눠집니다. 인간이 인정하든 말든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단언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행복의 나무가 될 것인가? 바람이 나는 겨가 될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행복의 나무를 선택해야죠. 만일 선택을 유보하면 자동으로 바람에 나는 겨가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모두 행복의 나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2] 행복의 나무로 살아가는 법 : 신앙, 성결, 묵상

그러면 어떻게 하면 행복의 나무가 될 수 있는 걸까요? 신앙, 성결, 그리고 묵상의 삶입니다.

① 신앙 :

이것은 행복의 나무가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3절 보면 그 나무가 어디에 심겨져 있습니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 ” 시냇가에 심겨져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겨졌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의 지리적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아주 척박한 땅입니다. 메마른 광야와 험한 산지가 대부분입니다. 연간 강수량도 600mm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의 절반수준이 될까 말까합니다. 그런 가운데 시냇물은 물이 흐르는 관개수로와 같은 곳이니 얼마나 놀라운 겁니까? 이것은 신앙으로 하나님과 연결된 관계를 의미합니다.

나무가 그 수종도 중요하지만 어느 곳에 심겨졌느냐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시92:12~13 “12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13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의 집 성전에 심겨진 나무와 같고, 그래서 번성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없으면 일단은 행복의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똑똑하고, 노력을 많이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나무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땅에 심겨지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좋은 땅에 심겨져야 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역시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때 나무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내 인생의 주관자이심을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속해주신 구세주로 믿습니까? 그러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로 믿습니다. 동시에 행복의 나무가 이미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의 시작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시작됩니다. 그 이전까지는 겉으로 아무리 화려해도 아직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참 만족이 없습니다. 결국은 허무한 것입니다.

② 성결 :

행복의 나무가 열매를 맺으려면 또한 성결해야 합니다. 1절 말씀 보면, 의인, 복 있는 사람의 특징을 뭐라고 설명합니까? 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이 말씀을 잘 보면 점층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악인, 죄인, 오만한 자는 모두 불신자를 가리키고, 죄악된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과 한데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데, 세 가지 동사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따르다’(walk) → ‘서다’(stand) → ‘앉다’(sit) 등입니다. 이것은 죄악의 점진성을 의미합니다. 죄악에 점점 깊이 물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나무에 벌레가 끼고 지저분한 것들이 끼면 잘 자라지 못합니다. 열매를 제대로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지치기도 하고 구충도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보면 예수님이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말씀하면서 비슷한 원리를 지적하십니다. 요15: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깨끗하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품고서는 결코 행복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없습니다. 이미 신앙으로 행복의 나무가 되었다고 해도,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참 행복을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이겨야 합니다. 성결을 유지해야 합니다. 죄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어물어물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죄에 물들어 헤어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나쁜 습관 같은 경우 고치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새해가 되면 많은 분들이 금주 금연을 결심합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포기하고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도박이나 죄악의 습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동을 한다든지 새벽기도를 한다든지 좋은 습관을 결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입니다. 그러나 행복의 열매를 풍성히 맺기를 진정 원한다면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작심삼일이면 3일마다 또 다시 결심하고 결심하면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성공하기 위해 얼마나 단호하게 결단을 내립니까? 옛날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화랑 시절 어쩌다 ‘천관’ (天官)이란 기생을 알게 됩니다. 사랑에 빠진 그는 기생집 출입하게 되는데, 그 소문이 퍼져 어머니 ‘만명’(萬明) 부인 귀에 들어갑니다. 어머니가 당장 호출했고, 호되게 질책을 당합니다. 화랑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하는가,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 책망을 합니다. 결국 그는 기생과 절교하기로 결단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말 위에서 잠시 조는 사이에 깨어보니 기생집 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말을 칼로 베어버리고 다시는 기생집 출입을 삼갔다는 일화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도 자기 의지로 이렇게 단호하게 결단을 하는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이 도와주시니 얼마나 유리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결단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어찌하든 죄악된 것은 끊어버리고 좋은 것은 체득함으로 성결한 새 사람의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풍성한 열매를 맺는 행복의 나무가 될 줄로 믿습니다.

③ 묵상 :

행복의 나무로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또한 묵상의 삶이 필요합니다. 2절 말씀을 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원문에는 히브리어로 ‘하페츠’(/xp]j,)라는 명사로 되어 있는데, 마음이 온통 쏠려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에게 마음이 쏠린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또 묵상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가’(hG<h]y<)인데, 본래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대 신학자 어거스틴(Augustine)은 새가 지저귀는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골몰하면 중얼거리죠. 그런 것을 가리킨다고 보시면 됩니다. 또 쉽게 이해하려면 짐승의 되새김질을 연상하면 됩니다. 먹이를 먹고 그냥 소화시키는 게 아니라 꺼내서 되새김질을 하고, 또 다시 꺼내서 되새김질을 하고 그런 겁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까이 하는 방법이 여럿입니다. ‘말씀의 손’(Word Hand)으로 설명해봅니다. 다섯 개 손가락으로 성경책을 쥐듯이 5 가지 방법으로 성경 말씀을 섭취합니다. 듣기, 읽기, 공부, 암송, 그리고 암송입니다. 엄지손가락에 해당되는 게 바로 묵상인데 가증 중요합니다. 엄지손가락이 없으면 성경책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것처럼 들을 때도 묵상, 읽을 때도 묵상, 공부할 때도 암송할 때도 묵상해야 합니다.

묵상은 기도와 함께 이뤄집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생각하고 또 생각할 때 하나님이 깨달음을 줍니다. 말하자면 영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말씀을 실천하게 됩니다. 이럴 때 비로소 축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만 하는 하나님 친화적 존재입니다. 우리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므로 인간 친화적이어야 하고, 육적인 존재이므로 자연 친화적이어야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이 자연을 찾아가고, 하다못해 황토방까지 만들고 그러는 게 아닙니까? 그러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므로 영이신 한님을 가까이하는 하나님 친화적 존재(God-friendly Being)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묵상을 통해 하나님 친화적일 때 진정한 축복의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 행복의 나무로 사는 축복 : 기쁨, 형통

우리가 이와 같이 행복의 나무로 살아갈 때 구체적으로 어떤 축복의 역사가 나타납니까? 크게 두 가지입니다. 기쁨과 형통의 복입니다.

① 기쁨 :

3절 말씀을 다시 봅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 ”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이유는 시냇가에 심겨져서 계속 물이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연결됨으로 계속 영적인 은혜가 공급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곧 ‘영생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 들어가 영생하지만, 그 이전에 예수님을 모시면 이 세상에서 미리 영생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요4:13~14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기쁨은 우리 영혼 깊은 데서 솟아나는 기쁨이므로 환경을 초월하는 기쁨입니다. 반면 세상의 기쁨은 환경 조건에 의한 일시적이고 외면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쉬이 사라지고 싫증이 납니다.

영생의 기쁨이 있으면 환경을 초월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 같은 사람은 감옥에 갇혀서도 매를 맺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행복이 별 겁니까? 기쁨이 곧 행복 아닙니까? 이런 기쁨이 있으면 억만금이 부럽겠습니까? 대권이 부럽겠습니까? 부디 행복의 나무가 되어서 이와 같은 영생의 기쁨을 날마다 맛보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② 형통 :

3절을 또 봅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듯이 형통한다는 겁니다.

이런 형통의 원리는 신명기 28장 말씀에 그대로 나옵니다. 신28:1~2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여기 보면 모든 복이 네게 임한다고 했는데, 영어 성경을 보면 ‘위로 덮친다’(NIV → come upon you)는 뜻입니다. 또 복이 네게 이른다고 했는데, 이 말은 ‘끝까지 따라와 붙잡는다’(NIV → accompany you, KJV → overtake thee)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악인들은 어떻게 됩니까? 4절 보십시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바람에 나는 겨 ...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잠시 좋아보였지만 결국은 허망하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의 형통은 일시적인 것이므로 그런 것을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시37:1~2 참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형통이란 게 일사천리로, 무조건, 항상 잘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상 살다보면 고난이 다 있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이기고 승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경적 형통의 모델로 요셉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고난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초지일관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창39:2~3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무엇이 제일 중요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니까 사람 자체가 형통한 자로 변화되는 겁니다. 그 후에는 시간이 가면서 고난도 있지만 결국은 승리합니다. 인간관계도 잘되고, 물질관계도 잘 되고 ... 이게 바로 3통(三通)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과 소통(神通)하니까 사람과 소통(人通)하고, 더 나아가 물질과 소통(物通)하게 됩니다. 요삼2 말씀 그대로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그러므로 행복의 나무는 고난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뿌리를 깊이 시냇물 속으로 내립니다. 남아프리카 사막의 어떤 나무는 뿌리를 땅 속으로 무려 35 미터나 깊이 내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수분을 빨아들이고 생존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가뭄이 와도 괜찮습니다. 끄떡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행복의 나무는 외부 환경이 어려워져도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면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승리합니다. 시37:24에 보면,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하고 말씀합니다. 또 롬8:28에는 뭐라고 되어 있나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인생 살면서 고난과 역경이 있을지라도 결국은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형통은 궁극적인 형통이요, 인생의 종합 우승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년 벽두에 어떤 소원을 갖고 출발하셨습니까? 무엇보다 행복의 나무가 되는 소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냇가에 심겨져 잎사귀가 늘 푸르고 철을 따라 풍성한 열매 맺는 행복의 나무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