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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교회 (요 1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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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교회 (요 10:7-16)

새해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금년 우리 교회는 2008년 표어를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받은 것이요, 우리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신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신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각오와 결심 속에 출발하였습니다.  “두고 봐, 올해는 반드시 해 낼 거야”라고 하신 것들이 있습니까?  비장한 각오로 연말까지 밀고 나가기를 바랍니다.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는다고 하셨습니까?  일 년만 죽었다고 실천하시면 그는 연말이 되면 52권의 책을 읽고, 정말 정서적으로 충만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죽어도 금년에는 담배를 끊는다고 결단하셨습니까?  1년 후에 가면 가슴이 뚫어지고, 호흡이 평안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금년은 죽기로 마음먹고 다이어트 한다고 하셨습니까?  1년 후에 가보면 발걸음이 가볍고, 대인관계가 달라지고 생각하는 것도 훨씬 좋아질 것입니다.  금년 일 년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실하게 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1독 한다고 다짐하셨습니까?  구약성경은 929장, 신약은 260장 합해서 1189장입니다.  하루에 성경을 읽는데 10장씩 읽는다고 하면 시간은 40분 정도 걸리는데, 결심하고 10장 씩 읽으면 4개월이면 1독하고요, 일 년이면 3독을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착실하게 앉아서 1시간을 보내면 15장을 읽을 수 있는데, 2개월 반이면 1독 할 수 있습니다.  잘하면 5독은 가능할 것입니다.  20장만 읽을 수 있다면 6번을 읽을 수 있습니다.

결심이란 작심삼일이라고 해도 결심하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합니다.  작심삼일이라고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작심삼일이라고 나쁘게 평하는데, 그렇게라도 결심하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합니다.  아무런 결심도 각오도 없이 허송세월하는 것보다 작은 결심이라도 결심한 사람이 성공합니다.  결심은 여러분을 성공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조엘 오스틴이 “긍정의 힘”이란 그의 저서에서 “하나님은 기대한 만큼의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조엘은 말합니다.  “기대하지 않은 좋은 일이 일어날 확률은 영(0)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기대하지 않으면 상황은 결코 나아지지 않습니다.  늘 똑같은 수준을 기대하는 사람은 영원히 제자리를 맴돌고 맙니다.  기대가 삶의 한계를 긋습니다.  기대가 크면 큰 것을 이루고 살아갑니다.  큰물에서 놀려고 하면 크게 됩니다.  목표를 높이 잡아야, 그 목표가 우리를 높이 이끌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네 믿음이 기대한 만큼 주겠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조엘 오스틴이 최근에 새로 낸 책 “잘되는 나”라는 책에는 1부 ‘잘되는 마음’의 제5장에 “과거의 실수에서 벗어나라”라는 글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남에게 공개하고 싶지 않은 약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나쁜 습관이나 부정적인 태도, 중독, 그릇된 사고방식 같은 것은 자손들에게 전해주고, 후대까지 오염시키게 됩니다.  우리 집에 내려오는 나쁜 습관과 못된 정신도 내 대에서 끊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난이 지긋지긋해서 더 이상 내 자식들에게는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애쓰고 있습니까?  가난은 물려주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르나, 더 부정적인 것을 물려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게으르고 무절제하다면 변명은 답이 아닙니다.  그의 게으름과 무절제함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걸핏하면 화를 내거나 남들에게 무례하게 굴면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면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다면 그는 언제까지나 그렇게 화를 내고 무례하게 굴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해야 해결의 실마리가 드러납니다.  실수를 감추려고 하지 말고, 가까운 식구나 친구들에게 말하고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혼자서 해결하는 것보다는 두세 사람이 함께 노력하면 자신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건축가로 잘 알려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라는 분은 아름다운 집과 건축물을 수없이 설계하였습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라는 사람은 세계적인 건축가입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집이란 독립된 구조물이 아니라, 풍경을 이루는 필수요소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건축물을 자연이라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자연과, 환경을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는 생각하는 방식을 한번 바꿔보라고 주문하는 사람입니다.  라이트가 은퇴할 무렵에 한 기자가 물었답니다.  “근사한 건축물을 많이 설계하셨는데 어떤 건축물이 가장 마음에 드세요”라고 하였더니, 라이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야, 다음 번 건축물이죠”라고 말했습니다.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진하려는 굳은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잠재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독일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에서 승용차가 달립니다.  이 고속도로에는 제한 속도가 없습니다.  달리고 싶은 대로 달릴 수 있는 도로입니다.  한국에서 달리던 대로 한 120km 놓고 달려봅니다.  친구가 옆에서 좀 더 속력을 내보라고 합니다.  140km, 좀 더 밟으니 180km가 올라갑니다.  은근히 겁이 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80km를 달려본 적이 없습니다.  140km 정도만 달려도 가슴이 떨려서 두근거립니다.  그런데 그 때에 옆으로 ‘쌩’ 하면서 지나가는 차가 있는 데 자기와 같은 차인데,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270km는 달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차의 최고 시속 270km를 다 달릴 수 있는 차였습니다. 

우리는 생각할 때에 아니, 죽으려고 빨리 달리느냐고 할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잠재력을 사장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안에 무한한 가능성을 심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든지, 사용하지 못하고 사장시키든지, 우리 안에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빠져나가지 않는 잠재력,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믿음으로 전진기어를 넣고 나아가기만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잠재력은 슬슬 발동하기 시작합니다.  점점 더 날아오르기 시작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말고, 우리의 생애에 있어 최종 결정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장단에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있어 가장 최고의 해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한 해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풍성한 생명과 그의 생애와 그의 인격과 그의 말씀과 그의 가치관과 그의 사역을 온전히 통째로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지난해까지 제가 살아온 것은 다 묻어버리고 새로 태어났다는 생각으로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요한10장에서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친숙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있습니다.  목자와 양의 비유입니다.  목자들은 하루 종일 양에게 풀을 뜯기다가 저녁이 되면 자기 양 떼를 데리고, 공동 우리 안에 넣어두게 됩니다.  이 집, 저 집의 양들이 함께 뒤섞이게 되는데, 다음 날 아침에 목자가 문에 서서 특이한 소리를 내어 양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러면 한 마리도 어김없이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나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7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나는 ....이다”라고 말씀하신 7번 말씀에 하나입니다.  “나는 ...이다”  이런 말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시는 표현입니다.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 부활이요 생명, 길과 진리와 생명, 참포도나무 이렇게 7번이나 “나는 ...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는 “나는 양우리의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약의 빛 가운데 이 말씀을 해석하면 양은 성도들을 말씀하고 있으며, 막사 곧 우리는 교회를 가리키며, 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양은 담을 뛰어넘어 들어가지 못합니다.  반드시 문으로만 들어가고 나가야 됩니다. 

우리 주님은 양의 문이요, 양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꼴이 되셨습니다. 9절 말씀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문이 되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문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은 하루하루의 생활을 말합니다.  매일 같이 우리는 들어가며 나오고 있습니다.  매일 같이 신령한 꼴을 얻으며,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까? 

집을 나간 탕자와 같이 한탄하시는 것을 아닙니까?  탕자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아버지의 집에 있기만 하면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는 생명을 소유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누려야 합니다. 

옛날 아브라함은 복에 넘치는 복을 누렸습니다.  그와 그의 가정이 살아갈 수 있는 정도의 복이 아니라, 많은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이끌어갈 수 있는 넉넉한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이 그의 12아들을 축복할 때에 요셉에게는 특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 49:22)라고 하셨습니다.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었는데, 그 가지가 담을 넘어갔습니다.  우리 집안에 있는 가지는 우리 집에서 따 먹고, 담을 넘어 길가로 뻗은 것은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겨우 내 가정이나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풍성한 꼴, 넘치는 열매로 다른 사람에게까지 도움을 주고 유익을 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0절 말씀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문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예수를 통하여 들어가고 나가면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풍성한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 주님만이 선한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삯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자기 몸을 사리고,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지만, 오직 예수님만이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아시는 것처럼 우리 주님은 우리를 알아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도함을 받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양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십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누리라고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5:1)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 구원의 감격이 떨어지고 보니, 모든 관계가 어려워지고 삐거덕거립니다.  예수님으로 충만한 은혜, 예수님의 전인격, 예수님의 가치관, 예수님의 생애를 통째로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생명이라고 해서 다 같은 생명은 아닙니다.  생명에도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병석에서 고생하는 환자들을 보면 겨우 숨만 쉬지 않습니까?  아무런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왕성한 젊은이들이 지칠 줄 모릅니다.  밤을 꼬박 새워도 끄덕 하지 않습니다. 왕성한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칠 줄 모르는 젊음이 있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도 주 안에서 누리는 왕성한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과 함께 생명을 누려야 합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 세상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과 함께 그 생명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겨우 숨만 쉬다가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주님의 영광,  주님의 나라,  주님의 사역을 위하여 마음껏 일하는 풍성한 생명을 누려야 합니다.  풍성한 생명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겨우 주일만 할 수 없어 나오는 그런 신앙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한 달 내내, 일 년 내내, 우리의 일생을 다하도록 주님을 위하여 지칠 줄 모르게 헌신하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우리 앞에 어떠한 고통과 핍박이 닥쳐와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주의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몸 바쳐 충성할 것입니다.  생명력이 있어야 합니다.  살아 있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내려놓음”이란 책을 쓰신 이용규선교사님이 새로운 책 “더 내려놓음”이란 책을 보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내려놓음이란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몽골국제대학으로 가서 선교사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2:20의 말씀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내 자아가 죽은 것 바로 그것이 내려놓음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갈2:20의 말씀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려놓을 때에 채워지는 은혜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안에서 죽을 때에 주님은 내 안에서 살아나신다는 것입니다.  풍성한 생명을 누리려고 하십니까?  내려놓으세요, 더 내려놓으세요, 완전히 죽으십시오.  그러면 우리 주님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기애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 의를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결정을 주님에게 맡기며, 전적인 의존을 위하여 내려놓고, 온전히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온전히 순종하십시오.  저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려고 합니다.  저는 태안에 기름 방제작업을 하는데 있어 늦어도 한참 늦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렇게 늦었는데, 이제 참여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에 그만 두려고 하였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기도하는데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늦었다고 생각되는 시간이 가장 빠른 시간이라는 말도 모르느냐”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습니까?  온전히 순종할 때에, 우리 안에는 주님의 풍성한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금년 일 년 동안 우리 주님으로 구원받은 감격을 새롭게 가지며, 나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생명의 능력을 체험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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