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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同伴者와 同反者 (욥 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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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2;7-10                                                                              同伴者와 同反者



도입

6세기 무렵에 맹위를 떨치던 페르시아의 큐로스 대왕이 포로로 잡은 적장에게 물었습니다.  “너에게 자유를 준다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주겠느냐?”  “재산의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만일 네 자식들에게도 자유를 준다면?”  “나머지 재산의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네 아내도 풀어 준다면 무엇을 주겠느냐?”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차라리 나를 죽이십시오”  농담이고요, 그는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기꺼이 제 생명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많은 문학 작품을 통해서 사랑의 이야기들을 보고 듣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합니다.  나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참 사랑을 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사랑을 나누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겨울이면 우리는 수많은 철새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봄이 되면 겨울을 나기 위해서 찾아온 수만, 수십만 마리의 철새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사라집니다.  돌아갈 고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돌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돌아가는 길이 멀고 험하지만 그들의 본능은 그들에게 돌아갈 것을 명령합니다.

우리가 흔히 귀소본능이라고 말하는 그것이 단지 짐승뿐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있습니다.  사람들도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점점 고향의 의미가 쇠퇴해가는 이 시대에는 가정이 바로 고향이 됩니다.

직장생활이 힘들어도, 상사에게 아무리 혼쭐이 났어도 돌아갈 가정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공급받을 수 있는 곳, 그곳은 바로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가정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로받고자 하는 사람은 많은데 위로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픔을 호소하는 우리의 동반자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해 주고 있습니까?  무엇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있습니까?  아니, 오히려 그들에게 더 큰 아픔과 고통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욥에게 또 다른 고난이 다가옵니다.  그 고난의 하나는 육체의 질병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고난은 아내의 독설입니다.

고통의 세계

욥은 갑자기 다가온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의 믿음을 굳게 유지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담대한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사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을 향한 하나님의 칭찬을 들은 사탄은 다시 한 번 욥을 고발합니다.  사탄은 아직도 아무런 이유 없이 하나님을 섬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4-5절을 읽겠습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꾼다는 것은 철저하게 짓밟으면 하나님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상 자신과 관계없는 재물이나 자식들이 아니라 그 몸을 직접 괴롭게 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저주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자 하나님은 한 번 더 사탄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욥의 목숨에는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믿음과 고난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은 고난을 감소시켜 줍니까?  아니면 증가시켜 줍니까? 

욥의 경우에서 우리는 믿음이 오히려 고난을 증가시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차라리 욥이 첫 번째 고난에서 하나님을 저주했다면, 그의 순전함을 버렸다면 사탄은 더 이상 그를 공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그나마 자신의 건강은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욥의 믿음은 그를 오히려 더 큰 어려움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결코 우리의 고난을 감소시켜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고통을 당합니다.  믿음 때문에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혔습니다.  믿음 때문에 바울은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믿음 때문에 주기철 목사님은 목숨을 잃었고, 믿음 때문에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하는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히 믿음 때문에 사업이 번창하고, 회사에서 승진하며, 온 가족이 건강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믿음 때문에 모든 일에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믿음 때문에 우리가 더 큰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이 그랬던 것 처럼~



돕는 배필

욥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오직 남은 것은 자신이 육체와 사랑하는 아내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육체도 더 이상 자기의 편이 아닙니다.  몸에 악창이 난 것입니다.  얼마나 괴로운지 그는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를 가지고 자신의 몸을 긁습니다.  재에 앉았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쓰레기 소각장에 거처를 마련했다는 뜻입니다.  악창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격리된 것입니다.

그는 아내를 바라봅니다.  적어도 수십 년을 함께 동고동락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다면 그래도 아직은 견딜만하다고 그는 생각합니다.  욥의 아픔을 이해하고 달래줄 유일한 사람, 그것은 바로 그의 아내였습니다.

하나님은 하와를 돕는 배필로 주셨습니다.  아담이 하와의 돕는 배필이 아니고, 하와가 아담의 돕는 배필입니다.  아내의 역할은 그런 것입니다.  쓰러져 가는 남편을 일으키고, 죽어가는 남편을 회생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여자입니다.  가정마다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여자는 분명히 남자보다 강합니다.  그것은 성경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지으실 때 부드러운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여자를 만드실 때는 단단한 뼈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와를 일컬어 뼈 중의 뼈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왕뼈, 용가리 통뼈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돕는 배필이 어찌 반드시 여자만의 문제이겠습니까?  때로는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를 위로하고 함께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남편이 아내의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지요.  지금 욥에게는 아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이해하고 격려하며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그런 아내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것을 바로 이런 목적입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메우고,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가정을 허락하셨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라고 가정을 허락하셨습니다.  밖에서 상처받고 들어온 가족 구성원이 편히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가정이 안식처가 아니라 분쟁의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노숙자 생활을 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말합니다.  남편의 무책임, 아내의 잔소리 때문에 살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더 이상의 희생과 봉사는 사라지고, 자신의 권리만을 내세우는 그런 가정이 되었습니다.  사탄이 바라던 것입니다.

욥의 아내를 보십시오.  사탄은 그녀를 도구로 하여 욥을 공격합니다.  위로와 평화의 도구여야 할 사랑하는 아내가 오히려 욥의 마음에 더 큰 낙담과 절망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돕는 배필이 오히려 방해하고 훼방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잘못된 접근

우리는 욥의 아내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자녀 열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욥의 고통스런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기와로 몸을 긁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가슴을 쳐야 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이 땅에서 가장 사랑하는 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도저히 믿음을 가진 여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욥의 아내를 일컬어 사탄의 도구라고 말했고, 어거스틴은 그녀를 악마의 옹호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탄이 일차 재앙에서 욥의 아내를 살려둔 것은 바로 이 때를 위하여, 즉 욥의 믿음을 흔들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욥의 아내는 불신앙의 대표자요, 배교자의 표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 진지하게 욥의 아내에게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 역시 하나님을 신뢰하던 여인이 아니었습니까?  욥과 더불어 제사를 드리던 하나님의 딸이 아니었습니까?  그녀가 말한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이 단순한 배교적인 표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욥의 아내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원망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그녀도 모든 재산을 거둬 가신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열 자녀를 모두 데려가신 하나님을 그나마 아직은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심합니다.  솔직히 그런 엄청난 고통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켰다면 살 길을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피할 길을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죠, 만일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마땅히 그렇게 하셔야 한다고 욥의 아내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더 심한 고난이 다가옵니다.  마치 욥의 순전함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도저히 출구가 없는 암흑 속으로 그들 부부는 던져지고 맙니다. 

사랑하는 남편의 신음소리, 그의 몸과 입에서 나는 악취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고름이 줄줄 흐르는 남편의 몸을 볼 때 그녀는 생각합니다.  “그래, 반드시 사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야.  때론 죽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라”  그러나 욥은 마음대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욥의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욥의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믿음을 지키는 것도 좋아요.  하지만 그 믿음이라는 것이 이제는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 보았잖아요.  이제는 그만 하나님에 대한 미련을 버리세요.  하나님이 다시 당신을 축복하시고, 당신을 고치실 것이라는 그 소망을 놓으세요.  그리고 차라리 죽음을 택하세요.”


생각해 보세요.  욥의 아내는 지금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욥의 아내는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그러니 욕하고 죽으라는 것이지요.  있지도 않는 존재를 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녀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녀의 문제는 무신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문제입니다.  엄청난 고난을 당하며 그녀는 두 가지 생각 가운데 하나를 선택합니다.

그 첫 번째는 이런 생각입니다.  “그래, 하나님은 분명히 계셔.  그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어.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선한 분은 아니야.  만일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내 사랑하는 남편, 저 신실한 욥에게 저런 고통을 주실 리가 없어“

그리고 두 번째는 이런 생각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선한 마음을 품고는 계시다고 해도 그 분은 전능한 존재가 아니야.  만일 그가 전능하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마땅히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막아 주셨어야지.”

욥의 아내는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그녀는 지극히 논리적인 여인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성과 논리가 고난에 대한 길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같은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더 잘 견디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 더 잘 견디겠습니까? 

고난은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만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겪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땅이 철저한 우연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맞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재수 더럽게 없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난제입니다.  우리는 이 우주에 우연한 사고란 없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한 이 엄청난 고난의 배후에도 분명히 하나님은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올무가 됩니다.

엉성한 믿음, 설익은 믿음은 오히려 고난을 당할 때에 독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믿음이 우리의 고난을 이기는 무기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선하심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전제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욥의 아내는 이미 실패를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순전함

우리는 욥의 아내가 가진 아픔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도 도와줄 수 없는 그 끝없는 고통을 겪는 욥이 정말 가련하고 불쌍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욥의 고난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정말 사랑하기에 차라리 죽음을 택하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도우라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배우자, 평생을 함께하라고 맺어주신 동반자입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 가서는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나약함을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가 남편이나 아내에게 짐이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일 욥이 아내의 말대로 모든 소망의 끈을 놓아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성경에서 욥기가 빠졌을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65권이 되었겠지요.  그리고 그 두 사람의 관계는 거기서 영원히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그 답답한 순전함을 굳게 지켰습니다.  비록 이론적으로는, 그리고 상황을 보아서는 아내의 말이 옳기도 하지만 욥은 상황과 이성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순전함을 신뢰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10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은 고통 가운데서도 아내를 책망합니다.  그리고 위로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제까지 복을 받았으면 재앙을 받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욥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재앙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욥은 형식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거룩한 척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뜻이기에 능히 다 감당할 수 있는 것 처럼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보, 하나님의 뜻을 인정합시다.  지금 이 고난은 분명히 우리에게 복이 될꺼요.  우리가 당한 고난은 재앙이 아니라 복이오”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웃을 필요는 없습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담대한 척 할 필요도 없습니다.  고름이 철철 흐르는 상처를 우아하게 긁으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고통스러우면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속이 상하면 우는 겁니다.  때론 신세 한탄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입술을 지켜야 합니다.  입술의 순전함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마지막 마지노선이 바로 입술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쓰러뜨리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우리의 혈기를 이용합니다.  우리의 탐욕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종종 우리의 시기와 교만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를 성적인 타락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알콜이나 마약 같은 것으로 우리를 중독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탄이 이 모든 일들로 이해서 얻고자 하는 결론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의 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을 열어 하나님을 부정하고 저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죽음의 세계로 이끄는 것입니다.

사탄이 원한 것은 소나 나귀가 아닙니다.  양이나 낙타가 아닙니다.  열 자녀들의 목숨도 아닙니다.  사탄은 오직 한 가지, 욥의 영혼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욥의 입술에서 터져 나올 하나님에 대한 저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만이 사탄의 관심사였습니다.  나머지는 단지 도구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온갖 죄가 있습니다.  성적인 죄, 마음의 죄, 물질적인 죄,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죄, 부도덕의 죄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죄를 지고 살아가는 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입술이 하나님을 욕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부인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여전히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욥의 순전함은 결국 그가 다시 일어서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던 그의 믿음은 결국 그를 위대한 승리자로 이끌었습니다.

욥기 42장에 보면 후에 욥이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여 열 자녀를 생산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아마도 욥이 이전의 아내에게서 다시 자녀를 낳았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전승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바르게 선 결과입니다.  비록 아내의 부족함이 있었지만 욥의 믿음은 그 부족함을 능히 메우고도 남았습니다.  둘 다 바르게 서 있으면 얼만 좋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을 보아도 그런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부부가 함께 신실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한 사람은 바르게 서 있어야 합니다.  끝까지 고멜을 사랑했던 호세아도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결론

우리는 아내와 남편, 남편과 아내를 同伴者라고 부릅니다.  함께 짝이 되었단느 뜻입니다.  함께 길을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한 번 되돌아 보십시오.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동반자입니까?  아니, 오히려 우리는 너무 자주 서로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만을 고집하는 同反者는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욥과 같이 당신과 함께 하는 동반자가 되어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아내와 남편은 우리를 향하여 같이 고민하고, 같이 아파하며 위로하는 동반자가 되어줄 것을 호소합니다.

입술을 지키십시오.  하나님과 동반자가 되는 것도, 배우자와 동반자가 되는 것도 우리의 입술이 순전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좋은 동반자가 되십시오.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이 귀한 동반자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힘든 고난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에게 감사의 찬송을 드리십시오.  힘들어하는 동반자에게 사랑과 위로를 전하십시오.

그 감사의 찬송이, 그 위로의 목소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아내와 남편에게 큰 힘을 더해 줄 것입니다.  어리석은 욥의 아내와 같이 불신과 저주의 입술이 아니라 욥과 같은 믿음과 위로의 입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복한교회    김 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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