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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막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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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막 1:9-15)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께서 물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 계셨는데, 거기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 함께 흘러가면서
새해 첫 주일 아침 주님 앞에 나온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主顯節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앞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습을 드러내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또 그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광야에 나타나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던 세례자 요한을 소개한 후에, 예수님도 그에게 나와 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내용도 간결하고 문체도 건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9)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예수님이 지금까지 갈릴리 나사렛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이고, 요한이 세례를 준 곳이 요단강이었다는 사실 뿐입니다. 나중에 마태는 이 단순한 이야기에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대화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마3:14, 15)

마태가 이런 이야기를 덧붙인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초기의 교회가 세례 요한을 따르는 이들과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건을 들어 요한의 우월성을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기에, 마태는 앞에서 본 문답을 통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더 큰 영적 스승으로 여겼고, 세례를 받으신 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태의 심정을 모르지는 않지만 나는 마태보다는 마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더 큰 감동을 받습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높으냐’가 아닙니다. 주님은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으로 나가는 이들의 마음을 읽으셨습니다. 로마의 압제를 받는 처지에서 희망의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던 시절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 말입니다. 요단강 물속으로 들어감을 통해 주님은 어쩌면 민중들의 염원속에 뛰어들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요? 돌아가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은 어느 날 당신을 찾아온 이에게 물으셨습니다.

“큰비가 오는 바람에 강이 흙탕물이 됐다고 하자. 그 물, 그 흙탕물을 다시 맑은 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 젊은이가 대답을 못하자 그는 스스로 대답했습니다. “세 가지 부류가 있겠지. 한 부류는 강둑에 서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들이고, 또 한 부류는 둑을 쌓는 사람들이다. 둑을 쌓고 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거야. 그런데 나라면 물속에 들어가 물과 함께 흘러가겠어. 흘러가며 맑아지는 거지.”(최성현 엮음, <<좁쌀 한 알>>, 224-5쪽)

바로 이 마음입니다.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이기적이고, 음란하고,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당파심에 사로잡힌 채 살아갑니다. 주님은 흙탕물 같은 그 마음속에 풍덩 뛰어들어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흘러가면서 우리를 맑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개문류하(開門流下), 문을 열고 아래로 흘러가는 것, 바로 이게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의미이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까닭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에, 그리고 삶의 자리에 풍덩 뛰어들고 계십니다.

• 하늘과 통하는 마음
마가는 주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일어난 일도 건조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내용은 간결하지만 그 의미는 간단치가 않습니다. 하늘이 갈라졌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통의 문이 열렸음을 암시합니다. 본문의 동사는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숨겨져 있기는 하지만 하늘을 가르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이제 하늘에서 땅으로, 또 땅에서 하늘로 통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찢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우리는 비둘기 같이 내려오는 성령이란 표현에서 올리브 잎을 물고 노아의 방주로 돌아온 비둘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비둘기는 그러니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진 예수를 통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임을 마가는 그림언어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비전과 더불어 예수님은 하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마음에 들려온 소리일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인정받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의 임재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아들로서의 삶, 곧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하는 이로서의 삶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생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영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knizomai)인데, 이 동사의 명사형인 ‘스플랑크논’(splanknon)은 ‘내장, 창자’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고통당하는 사람을 보고 애가 끓는 사람입니다. 배고픈 사람을 보면 먹이지 않으면 못 견디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입히지 않으면 못 견디고, 이런저런 재난으로 마음이 꺼먼 숯처럼 변한 이들을 보면 달려가 도와주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이고, 그 마음이 곧 하늘과 통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가진 이 안에서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말은 ‘내가 네 안에서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은 다른 것 없습니다. 愛隣의 마음으로 이웃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 다시 광야에서
그런데 마가는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 끝에 놀랍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장면의 전환이 너무 갑작스러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감미로운 봄 노래가 끝나자 돌연 천둥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부드럽게 번역되기는 했지만 ‘내보내셨다’고 번역된 동사 ‘에크발로’(ekballo)는 실은 강제로 ‘몰아냈다’는 뜻입니다. 애린의 마음을 갖게 하시는 성령이 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낸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직면하게 될 모든 어려움을 대신 해결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아이일 때는 부모님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결해주시지만, 우리가 성인이 되면 우리 스스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독립의 신앙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독립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독립 말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광야로 내모신 것입니다.

광야는 사단의 시험을 받는 곳이고, 들짐승들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광야는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다고 전하고 있지만 그것은 평화로운 공존이라기보다는 매우 위험스런 공존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40일 동안이나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시험은 40일간의 금식 직후에 일어난 일로 보도되고 있지만 마가복음에는 시험은 40일 내내 계속된 것으로 나옵니다. 주님은 과연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셨나요? 우리는 얼른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어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시험을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복음서들은 한결같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을 물리치셨다고 전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가는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멋진 승리를 전하고 있지 있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광야는 어쩌면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된 예수님이 직면해야 했던 수많은 적대 세력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내내 사단 혹은 짐승들과 대결하셔야 했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주님은 악한 영들과 맞서야 했고,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던 유대교 체제와 맞서야 했고, 사람들의 헛된 기대 혹은 적대감과 맞서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광야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 우리의 생 자체가 어쩌면 광야살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단과 짐승들에만 둘러싸여 있던 것은 아닙니다. 마가는 “천사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광야는 사단과 짐승들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천사들의 도움을 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벼랑 끝에 내몰린 듯 삶이 암담할 때에도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뒤에는 애굽의 병거가 따라오고, 앞에는 넘실거리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이라 해도, 길은 있습니다. 시리아의 왕이 엘리사를 잡으려고 군대를 보냈을 때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엘리사의 시종이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강한 군대가 말과 병거로 성읍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큰일났다고 두려워하는 시종에게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의 편에 있는 사람들보다 우리의 편에 있는 사람이 더 많다”(왕하6:16)고 말하고는, 시종의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눈이 열린 시종은 온 언덕에 불 말과 불 수레가 가득하여 엘리사를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이진 않아도 주의 사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현실이 사단과 짐승의 영역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 때가 찼다
마가는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때는 ‘요한이 잡힌 뒤’입니다. 즉 요한에게 희망을 걸었던 이들의 마음에 절망의 어둠이 찾아든 때였습니다. 주님이 복음 선포를 시작하신 곳은 ‘갈릴리’입니다. 중심이 아니라 변방입니다. 세상의 변혁은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서 일어난다는 뜻일까요? 주님의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15)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저 먼 곳에 있는 미래적 실체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 눈 앞에 와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에 그 나라에 들어갈 자는 누구입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향하여 선다는 말일 겁니다.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평화와 생명을 위해 일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고, 상처받은 영혼들을 보듬어 안고, 분열된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땀 흘리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걸작품인 창조세계가 파괴되고 신음하는 것을 보면서도 여전히 풍요와 편리만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지금 우리를 광야로 내몰고 계십니다. 아픔의 땅, 눈물의 땅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 수행되어야 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 다르푸르에서, 파키스탄에서, 미얀마에서, 이라크에서, 북한에서, 태안에서, 그리고 일자리를 달라며 천막을 치고 농성하는 이들 곁에서 땀을 흘리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신의 손과 발이 되어줄 사람들을 찾고 계시는 주님을 외롭게 하지 않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종 노릇을 하다보면 남는 것은 씁쓸함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갈 때 어려움도 많지만 우리 영혼의 그릇에는 평화와 기쁨이 고입니다.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철저한 낙관주의자로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미 이기신 싸움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올 한 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음성에 붙들려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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