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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믿음으로 삽니다(2) : 가나안 여인이 받은 큰 믿음 (마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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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믿음으로 삽니다(2) : 가나안 여인이 받은 큰 믿음 (마 15:21~28)

선이나 악을 포함해서 믿음 역시 단어적인 의미는 추상적이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히 11:1). 실상은 실체라는 의미입니다. 신앙은 실체 혹은 실상을 붙잡은 것과 같은 가치를 가졌기 때문에 그것을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얻어질 직접적인 대상물에 머물지 아니하고 궁극적인 대상이 되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보는 실상이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내적 심리 작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엡 2:8). 그래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살후 3:2). 믿음의 대상을 보이는 사물에 집중시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라고 했습니다.

인간 스스로 믿음을 만들고 그 믿음의 결과를 조작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어사전에 믿음에 대한 정의는 ① 마음으로 의지하다 ② 신앙하다라고 했는데 이쯤 되면 믿음에 관한한 사전적 기능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 기록된 믿음에 대한 정의는 사전적 기능 이상입니다.
토마스 브록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믿음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만 그 요구를 이룰 수 있도록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조건을 요구하시지만 동시에 그 조건을 우리 안에서 친히 이루어 가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의 선물이다"라고 했습니다.

믿음과 구원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로마서 10장 9-10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에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9절에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윌리암 저널은 "믿음은 최고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예수께서 유대 지도자들의 핍박을 피하여 이방 땅 두로와 시돈으로 들어가셨습니다(15:21). 예수님께서 어느 곳에 가셨다는 사실에 상당한 의미를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곳에 들어가실 때는 무의미한 유희적 걸음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예수께서 가시는 곳에는 예정된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중풍병자를 고쳐주실 때도 마가복음 2장 1절에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절에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라고 했습니다.

바다를 잔잔케 하실 때도 마가복음 4장 35절에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도,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를 고치실 때도 마가복음 5장 21절에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의 종을 고치실 때도 누가복음 7장 1절에 『예수께서…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고 했습니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실 때도 누가복음 7장 11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라고 했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병자를 고치실 때도 요한복음 5장 1절에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고 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요한복음 11장 7절에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1절에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만날 때도 누가복음 19장 1절에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고 했습니다.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께 가나안 여자 하나가 소리를 지르면서 흉악한 귀신들린 자기의 딸을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땅을 통과하는 의도가 이 가나안 여자를 만나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곳에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나안 여자가 예수를 찾아 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 가나안 여자를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가나안 여자에게 큰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리챠드 스톡은 말하기를 "우리는 인격을 보고 믿음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믿음을 보면 인격이 증명된다."라고 했습니다.

Ⅰ. 예수가 메시야임을 고백하는 믿음 입니다.

본문 15장 22절에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라고 했습니다.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린 가나안 여자 하나가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질렀습니다. 그녀가 여기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의 메시야적 대망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지 못하고 거부했으나 오히려 이방인인 이 여인은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딸의 고통에 대한 모성애를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한 것은 첫째, 당사자인 딸의 고통보다 자신의 고통이 더 크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딸이 이렇게 된 것이 혹시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한 말은 소경과 벙어리를 고치실 때도 그들이 본문과 동일하게 고백했습니다.
마태복음 9장 27절에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의 중심사상은

1) 예수 그리스도가 언약의 후손임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창세기 22장 18절에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시편 89편 29절에 『또 그 후손을 영구케 하여 그 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 권위를 가지신 이상적인 왕임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창세기 12장 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사랑의 주라는 고백입니다.
다윗이란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란 의미인 것을 감안할 때 그녀의 고백은 최선의 선택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8장 18절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4장 3절에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의 주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는 세상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녀는 예수를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계시록 5장 5절에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Ⅱ.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는 믿음입니다.

1) 예수님의 침묵에도 인내했습니다.
본문 15장 23절에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의 엄청난 고백을 듣고 침묵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얻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침묵 속에는 우리의 진정한 신앙을 시험하는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침묵은 단순히 거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2) 제자들의 냉대에도 인내했습니다.
본문 15장 23절에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빨리 내 보내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최소한의 측은지심도 없는 살인적인 극한의 이기주의자들입니다.

3) 예수님의 직접적인 거절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아니했습니다.
본문 15장 24-2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했습니다.

4) 예수님으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포기하지 아니했습니다.
본문 15장 26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을 개라고 한 것은 최대의 모욕입니다. 개는 포악의 상징입니다. 개는 불결의 상징입니다. 개는 비윤리적 상징입니다. 개는 비양심의 상징입니다. 개는 탐욕의 상징입니다. 개는 이방인, 이단자를 상징합니다. 또한 무례한 자를 개라고 했습니다(신 23:18; 삼상 17:43; 왕하 8:13; 시22:16; 렘 15:3; 사 56:10; 삼하 9:8; 마 7:6; 눅 16:21; 빌 3:2; 벧후 2:22; 계 22:15).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의 침묵과 제자들의 냉대에도 인내했습니다. 예수님의 직접적인 거절에도 굴하지 않고 인내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모욕적인 말을 할 때도 포기하지 아니했습니다.
여기 『절하다』(프로세퀴네이, )는 미완료형으로 그녀가 본문 15장 22절과 관련하여 한 번 절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하여 절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더욱 간절하게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딸을 고쳐줄 이는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 딸을 고쳐줄 수 없고 오직 예수의 무한하신 능력만이 이 일을 가능케 한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Ⅲ. 목적 성취를 위한 겸손한 믿음입니다.

본문 15장 26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엎드려 절하는 그녀에게 개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더욱이 여자에게는 참을 수 없는 가장 더러운 모욕입니다.

1) 주님만이 최고 최선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본문 15장 27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무엇이든지 다 옳다는 말입니다. 그녀는 예수께서 자신에게 개라고 하는 것도 맞다고 시인했습니다.

2) 땅에 떨어져 버린 부스러기만이라도 좋다는 고백입니다.
본문 15장 27절에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표현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겸손한 태도에서 나오는 보화같이 값진 것입니다. 인간들은 부스러기를 좋아하지 아니합니다. 무엇이든지 좋은 것만 달라고 합니다.
시편 84편 10절에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이방인으로서 메시야적 구원과 은혜는 감히 받을 수 없다고 해도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의 일부분은 얻겠다고 끈질긴 강청을 하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시험해 볼 것은 다 해본 셈이 됩니다. 더 이상 이 여자에게 요구할 것은 사실상 없는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그녀가 간절히 소망하던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본문 15장 28절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했을 때 그녀는 하늘과 땅을 다시 얻는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가 그렇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딸을 살리기 위해 애원하는 끈질긴 강청에 못 이겨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녀의 믿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한 그녀의 고백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녀를 시험한 것은 유대인들이 거부한 축복이 이방인들에게로 간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 『소원대로』(호스델레이스, )란 말을 직역하면 '네가 원했던 것', '네가 원하는 것만큼'이란 뜻입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이 말씀에 예수님의 만족이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 예수님의 시원함이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 예수님의 통쾌함이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 예수님의 긍휼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토마스 아담스는 말하기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 믿음의 임무라면 우리가 믿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은 믿음의 상급이다."라고 했습니다.
토마스 왓슨은 말하기를 "이성이 걸어갈 수 없는 곳에서 믿음은 헤엄을 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소원이 없는 사람은 유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소원이 없다면 신앙도 없습니다. 소원이 있는 곳에 기도가 있고, 감격이 있고, 소원이 있는 곳에 뜨거운 찬송과 진정과 신령으로 하는 거룩한 예배가 있습니다.
큰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큰 믿음은 우리 모두가 받은 것입니다. 다만 그 믿음은 소원이 있을 때 그 믿음이 소원과 함께 좋은 우정관계로 발휘가 되는 것입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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