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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제 허락하라 (사 42:1-9, 행 10:34-43, 마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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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허락하라 (사 42:1-9, 행 10:34-43, 마 3:13-17)

1. 미국 드류대학교의 Heather Elkins교수는 한국 전쟁 때 공병대로 참전한 일까지 있었던 분인데 그가 어렸을 때 강물에서 침례를 받았는데, 그때 겪었던 엄청난 경험을 평생 잊을 수 없다고 간증했습니다. 자신이 속했던 교회에서 세례성례전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교인들이 근처에 있는 강가로 나가서 세례성례전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그 세례성례전을 집례한 담임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설교하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어느 시골교회에서 2월 달에 차가운 강물에서 세례를 베풀게 되었는데 무릎까지 오는 물에서 세례 가운(Gown)만 걸친 수세자를 세 번 물에 담그는데 한번은 성부의 이름으로, 또 한번은 성자의 이름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령의 이름으로 물이 담그며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너무 추웠고 물은 말로 할 수 없이 차가웠기 때문에 세례를 베풀던 목사님의 손이 얼어 굳어버려 그만 실수로 수세자를 물속에 놓치고 말았습니다. 수세자는 물에 둥둥 떠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주신 이도 주님이시요, 취하여 가신 이도 주님이시니 주님을 찬양합시다. 다음 사람 들어오세요.”

  이 말을 들은 당시 10살 되었던 엘킨스는 그만 얼어붙다시피 경직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세례를 받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진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 저를 붙잡아 주세요!”

  우리는 지난 12월 25일 성탄절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1월 6일은 「주현절」로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멀고 먼 길을 와서 아기 예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예물을 드리고 경배한 날입니다. 이어서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세례 받으신 주님 수세일로 지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다 세례를 받습니다. 이미 세례를 받으신 분도 있고, 앞으로 세례 받을 실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 유아세례를 받으신 분도 있고, 어떤 분은 나이 들어 믿고 스스로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 받으신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침례교와 같이 온 몸을 물에 잠그는 세례를 받으신 분도 있는가 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 교회에서처럼 집례하는 목사가 손을 물에 적셔 머리에 안수하는 약식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형식이나 시기에 다소 차이는 있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다 세례를 받습니다. 그만큼 세례는 필수적인 예식일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가 성찬성례전과 함께 지키는 두 성례전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알고 받았건 의미도 모른 채 받았건 그세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새롭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 죄도 없는 우리 주님, 죄인으로가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도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시면서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주님과 일체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 주님과 운명공동체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만 해도 세례 받았다는 자체가 우리 생애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친구들 사이에 의형제 맺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때 행한 의식이 있었습니다. 실에 먹물을 묻혀 바늘로 두 사람의 팔목 살갗을 같이 꿰뚫습니다. 그러면 시커먼 점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두 사람이 형제가 되었다고 하는 표지가 됩니다. 피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피를 나눈 형제와 다름없다는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함께 세례를 받게 되고, 또 우리는 모두 같은 예수님의 이름(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거기다 성찬성례전을 통하여 같은 몸에 참여하고, 같은 피를 마시게 됩니다. 이런 예식은 주님을 향한 우리 충성의 맹세요, 우리 서로 간에 끊으래야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묶여져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요 우리 서로는 그 몸의 지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놀라운 신비입니다. 


2. 우리가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간간이 세례의 형식 때문에 서로 논쟁을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세례를 베풀 때 물은 어느 정도 사용해야 하느냐?” 또는 “침례냐 세례냐?”등의 논란이 그것이었습니다. 만일 굳이 형식을 고집한다면 장소 이야기도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제대로 세례 받으려면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던 그 요단강에 가야할 것이 아니냐는 문제도 나올 수 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성지를 다녀오면서 요단강 물을 병에 담아 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 세례식 때 그 물로 세례를 베풀기도 했었습니다. 그렇다고 요단강 물로 받은 그 세례가 다른 물로 베푼 세례보다 어떤 특별한 효과가 있느냐 하면 똑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례의 의미입니다.

  어느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수도원장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하루 중 언제까지가 밤 시간이고, 언제부터가 낮 시간입니까? 별이 보이지 않을 때입니까?” 그러자 원장은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나무나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을 때입니까?” 그러나 이번에도 원장은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수도사는 애가 달아서 채근을 했습니다. “그럼 언제입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원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이 사랑하는 형제로 보여 지기 전까지가 밤이고, 다른 사람의 얼굴이 사랑하는 형제로 보여 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낮이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시간상의 밤낮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밤낮이라는 말입니다.

  세례도 형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세례는 아무나, 어디서나, 아무 때나 베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 같으면 당회의 결의로 목사가 공중 예배석상에서 베풀어야 합니다. 만 부득이 할 경우 병상 세례를 베풀 수도 있기는 하나 죽음을 앞둔 경우가 아니면 시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까 엘킨스 교수의 어릴 때 일화처럼 세례를 죽음과 관련시키지 않는다면 세례로서의 의미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신 것을 기점으로 해서 공생애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서약과도 같은 성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나중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시는 길에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크냐?”고 하는 문제로 다툼이 있었던 일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왕이 되시거든 자기의 두 아들을 오른쪽 왼쪽 자리에 앉혀달라고 청탁하기 까지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다른 제자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분이 나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바로 십자가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세례 속에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이 있습니다. 세례 속에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는 결의가 있습니다. 이미 세례 받은 우리는 주님의 수세주일을 맞으면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은총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도 역시 주님을 위하여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결심을 새롭게 다짐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세례의 형식 문제는 결코 절대적인 이야기꺼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옛날 로마 군인들이 입대하거나 전쟁에 나갈 때 반드시 황제의 동상 앞에서 치루는 충성서약이 있었습니다. “황제를 위하여 이 한 목숨 초개같이 바치겠나이다.”라고 하는 서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직 황제를 위하여 자신들을 바쳐서 충성했습니다. 이것이 로마군대라고 하는 가장 막강한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오늘 세례 받은 우리들은 주님을 어떻게 섬기며, 주님을 향한 충성의 다짐은 어느 정도입니까?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오늘은 우리 주님이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주님의 은총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하여 여러분 자신을 새롭게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3. 오늘 구약 이사야서 본문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첫 번째 “여호와의 종의 노래”입니다. 대체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심판하는 왕으로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적국을 일거에 쳐부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모세나 다윗과 같은 그런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는 종으로 오셔서 자신을 대속물로 주심으로 그 사역을 감당하시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정서와 정반대되는 예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대와 다르기 때문에 결국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자주자주 “주의 뜻을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구약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택하시고, 기뻐하시고, 붙드시는 하나님의 종은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53:의 말씀처럼 “고운 모양도,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어서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고, 버리고,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찔리고, 매 맞고, 상하고, 채찍에 맞았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해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며, 그  때문에 우리는 나음을 입게 되었고, 평화를 얻게 되었고,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인간의 상상이나, 요구를 초월한 순전히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구약 본문 9절에는 이것을 일컬어 “보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의 상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대로 보고, 믿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그 놀랍고 새로운 구원의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듯이 신앙이란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순종하며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은 최초의 예루살렘 오순절 후 소위 가이사랴의 오순절이라 일컫는 고넬료의 집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기독교 최초의 설교였던 오순절의 설교와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설교가 그 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 모든 설교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강조한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들 멋대로 판단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정죄하고 재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였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오순절 날 베드로의 이 단순한 설교가 거기 모인 수 천 명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에 엄청나게 신령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가슴을 치면서 부르짖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말씀과 성령으로 인한 놀라운 감동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이 말씀을 듣고 그날 회개하고 세례 받은 사람이 3천명이었습니다. 그들이 최초의 그리스도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오늘 사도행전 본문 고넬료 집에서의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이 임하셨고 빋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렇게 말씀과 성령의 역사, 그리고 세례로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과 세례를 받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교회도 긜스도인도 세례가 그 출발점이 됩니다.

  우리는 일생에 단 한번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세례의 효과는 단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두고두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확인해 줍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늘 새롭게 역사하시고, 우리는 주를 위한 충성을 새롭게 다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한 몸의 지체라는 사실을 확인하므로 이것을 통해서 주시는 주님의 은총을 더욱 충만하게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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