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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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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빌 4:4-7)

문제에 봉착했을 때 우리는 당황하지 말고 차분히 대처해가야 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숙고하고 검토하는 것은 정말 필요하고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꼬리 무는 불안과 걱정에 얽매여버리는 염려라는 정서는 우리에게 백해무익입니다.

Mayo Clinic은 전 세계 저명인사들이나 부호들이 정기 검진 받기 위해 줄 설 정도의 세계적인 병원입니다. 이 Mayo Clinic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습니다. “우리 병원이 다룬 임상 사례 가운데 80%는 환자 편에서의 염려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이 통계는 우리가 염려하는 것을 중단할 수만 있다면 질병 발병률도 낮아지고, 치료율도 상당히 높일 수 있다고 시사해줍니다.

어디 질병뿐이겠습니까? 염려는 사회생활에도 지장을 줍니다. 생기 잃은 내 얼굴과 쳐진 내 입 꼬리로 인해 상대는 불편해지고 불안해집니다. 사람 사이의 활력소와 윤활유가 한순간에 제거되고 맙니다. 더욱이 염려는 상대를 배려하는 여력을 순식간에 파괴해버립니다. 염려하는 동안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겠습니까? 내 코가 석자이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영적인 삶에도 지장을 줍니다. 염려하는 데 시간을 쓰면 하나님과 우리 향한 하나님 뜻에 초점 두지 못합니다. 말씀 묵상이 아주 어려워집니다. 예배드릴 때도 설교 말씀에 집중하기보다 여러 가지 생각에 휘둘립니다. 기도 생활이 어려워집니다. 어렵사리 기도를 시작해도 떠오르는 염려 걱정으로 사방팔방으로 끌려 다닙니다. 결국 기도가 집중되지 못하고 방해받습니다. 복음 전도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염려에 휩싸인 분이 열심히 전도하는 것 보셨나요?   

염려가 해롭다는 것 알고 있지만, 우리는 자주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흔히는 상황과 여건이 우리의 통제력을 벗어날 때, 염려가 덤벼옵니다. 우리의 뜻과 우리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치료 불능의 질병에 걸린 가족, 운영자금 조달 불가 상태에 빠진 사업체, 범법행동을 저지른 가출 자녀 등은 그 몇 가지 예에 불과합니다. 

교회적으로도 새해벽두에 매우 염려스런 일이 터졌습니다. 학과 신설에 따른 공간 재배치의 필요 때문에 우리 교회는 2008년 12월까지만 학교 시설을 사용할 있다는 공문을 학교가 보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강당의 지속적인 사용을 주장할 수 있는 아무런 법적 권한이 없습니다. 학교의 요구는 우리의 한계와 통제를 벗어난 사건입니다. 우리는 한 5년 정도,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에 온 힘을 기울이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제 겨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 외에 우리들의 예배 처소에 대해서는 힘을 쓸 수도 없고 힘을 써서도 안 되는 처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겨야 하는 우리 교회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를 사랑한다면 누구나 염려하게 됩니다.

염려는 마치 안개와 같습니다. 광화문 일대를 30미터 두께로 짙게 덮을 수 있는 안개는 사실 한잔의 물이 600억 개의 물방울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잔의 물처럼 대수롭지 않은 염려지만 그대로 방치하면 우리의 내면세계를 온통 가릴 수 있는 안개로 돌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문자 그대로 오리무중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약속도, 응답의 손길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때문에 이 염려야말로 우리가 싸워 이겨야할 대상 중 하나입니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 홀로 갇힌 신세입니다. 선교사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 보입니다. 사람에게 자유롭게 전도할 수 없고, 가르칠 수도 없으며, 설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사역자들에게 영향을 줄 수도 없습니다. 선교 상황은 그의 통제력을 완전히 벗어나 있습니다. 복음 전파의 행진은 중단되고 퇴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도리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옥에까지 갇혀 한계에 봉착한 신세인데 염려를 넉넉히 극복한 모습입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6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길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종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순종할 뿐입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안식년을 떠나시자 많은 성도님들이 저를 걱정해주시곤 하셨습니다. “담임목사님 안식년 중에 어깨가 무척 무거우시죠?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바쁘시죠? 설교 준비에 스트레스가 많으시죠? 성도님들께서 여러 가지를 요구하고 지적하시지요?” 따뜻하고 정확한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기도 가운데 그 모든 짐을 우리 교회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맡기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 있습니다. 학교로부터 공문을 접수한 최근 들어와서는 명치 바로 아래 부분에 통증이 생기고, 신물이 자주 올라옵니다. 한의사 말로는 하늘이 내려준 위장을 가졌다고 했는데도 말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는데, 제 몸은 저의 염려를 완전히 맡기지 못했음을 드려내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하셨는데, 아! 내가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고 참 많이 염려하고 있구나.” 

그래서 저는 더욱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려 합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 제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저는 종일뿐입니다. 주인 되셔서 저를 돌봐주시는 하나님께 저의 모든 염려를 드립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우리 하나님, 이 세상보다 더 크시죠? 제가 생각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보다 더 크게 응답하실 것을 믿습니다. 제가 저를 위해 계획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계획을 하나님께서 갖고 계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 빌 4:19 말씀처럼 꼭 필요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당연히 주실 줄 믿습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그 어느 때보다 2008년도에는 염려할 시간에 하나님께 더욱 기도하는 성도님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바울은 주 안에서 주어지는 기쁨으로 염려를 극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4장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염려를 이기기 위한 기쁨은 우리가 <주 안에> 있을 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바울이 체득하였습니다. 끝없는 진정한 기쁨은 <주 안에서> 주어집니다. 우리 각자가 육신의 길을 도모하면 재미는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참 기쁨과 영적 담대함은 사라집니다. 사소한 난관에 부딪혀도 우왕좌왕 좌충우돌 흔들려버리고 쉽게 염려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 안에> 있을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 높은 뜻을 따르면 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면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담대함과 평강이 생겨나기 때문에 염려를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가르쳐주신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4장 34절을 통해 하나님 뜻을 행하고 하나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야말로 당신 자신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수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의 마음은 부족함 없이 천국 기쁨으로 가득 차오른다는 뜻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도 로마서 12장 2절에서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을 하나님 뜻으로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치려함에는 지금처럼 옥에 갇혀 결박당하는 일 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가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옥중에서도 염려는커녕 도리어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 구하고, 그 뜻 이 땅에 이루어가는 자들은 담대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주 안에서의 기쁨과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도중에 혹 환난과 시련이 닥쳐와도 먹고 사는 문제로 염려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필요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져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을 우선적으로 완수해가는 것이 하나님의 높은 뜻입니다. 담임목사님께서 미국으로 떠나시면서 교회 홈페이지 사랑방에 기도문을 올리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을 마치려함에는 목숨까지도 바치시려는 각오가 절절이 배어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부탁하신 대로 100번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십시다. 오늘 주보 사이에 배부된 기도책자에 매번 표시하여 100번 기도를 마치신 분들은 교회에 제출해주시기 바랍니다. 100번 기도하신 분들은 200번에 도전하시고, 200번 기도하신 분들은 300번에도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염려하지 않고 주님의 뜻 따르는 것을 기뻐하신 성도님들,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순수하고 뜨거운 성도님들, 주 안에 살아가기를 힘쓰는 성도님들의 흔적들을 우리 교회는 후대에 전수해갈 것입니다.

끝으로 바울은 <마지막에 대한 소망>으로 염려를 극복한 사람이었습니다. 4절 말씀에 주께서 가까우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신앙 여정의 끝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약속의 땅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갈 바 알지 못하고 떠난 아브라함에게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주어졌습니다. 모든 족속이 복 받도록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 진입해가기 위한 여정은 고달프고 척박할 수 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청사진 하나 없이 끝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여 답답하고 불안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도착할 것이니 지금은 힘들지만 견디어 갑시다. 과거 일로 원통해하거나 보복하지 말고, 도리어 다른 사람들을 후대하고 관용하십시다.

교회 홈페이지 사랑방에 올려진 손석일 전도사님의 “눈 오는 날”이란 시가 참 좋습니다. 이렇게 노래됩니다.

<눈 오는 날>

아침부터 함박눈이 내렸다.
눈 오는 날을 좋아하는 나는
근심거리하나로 즐겁지 않았다.
하늘도 내 마음을 아는지 흐렸다.

오후에도 눈은 계속 내렸다.
창 너머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눈은 원래 흐린 날 내리지!”

내가 좋아하던 눈 오는 날은
모두 흐린 날이었던 것이다.
흐린 날 내리는 하얀 눈처럼
내 마음에도 눈이 내리길 기도했다.

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는 것처럼
내 마음의 근심도 하얗게 덮어버리도록...
기도에 응원이라도 하려는 듯
눈은 온 종일 내렸다.

흐린 날 내리는 눈을 통해, 곧 다가올 축복에 대한 소망으로 지금의 침울한 염려를 이겨나가자는 관점이 가슴 깊이 와 닿습니다. 과연 궂은 날은 새하얀 눈의 전조일 뿐입니다. 비록 우리 각자나 우리 교회가 궂은 날을 당하고 있지만, 곧 다가올 축복의 하얀 눈을 분명히 소망하기에 염려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필요 때문에 염려하지는 마십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모든 것을 맡겨드리십시다.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주의 뜻을 분별하고 주님 뜻 행함으로써 주어지는 기쁨으로 매 순간을 승리하십시다. 하나님의 오묘한 뜻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 소망하며 미리 감사하는 가운데 지금의 염려를 물리치십시다.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장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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