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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더 큰 비전을 품고 달려갑시다 (창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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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비전을 품고 달려갑시다 (창 12:1-9)

지난 11일 정오에 서울 남대문로 상의회관에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와 전국상의 회장단이 신년 인사회로 만났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이명박 당선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올해 첫날 해가 유난히 밝고 빛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수십억 년을 지나면서 해 크기가 줄었으면 줄었지 커질 리가 있습니까?  모두 사람이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좋은 말이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자세히 보면 인간사에서의 행복도 불행도 관점입니다.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문제를 보는 방식이 문제입니다.  사물을 보는 방식에는 공식이 없습니다.  불행한 사람은 불행의 관점에 빠졌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준비하신 대안을 보지 못하고 이 불행한 관점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본연에 대해서 평화와 만족을 느끼지 못할 때 사람들은 좌절하기 쉽습니다.  강퍅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좌절과 강퍅함은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좌절과 강퍅함은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고 겸손한 자는 하늘을 움직인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붙잡혀 내 영혼에 먼저 풍요로움을 회복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하늘의 태양은 어제 떠올랐던 바로 그 태양이었습니다.  하늘의 태양은 수십억년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빛의 강도가 조금이라도 약해졌으면 약해졌지 더 강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늘의 저 태양을 보면서 '오늘 태양은 유난히 밝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눈을 뜨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찾으십시오.  아직도 길은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길이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믿음의 길은 항상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음의 사람은 어떤 절망적인 순간에라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결국 세상을 보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갑자기 환경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뜨거워지고 내 안에 성령님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는 거룩한 체험을 했다고 해서 환경이 확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합니다.  환경을 바라보는 내 시각은 바뀌어집니다.  그 환경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바뀌어집니다.  어떻게요?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으로 보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헌신적인 삶을 살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애 속에 어떻게 간섭하셨는가 하는 생명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고난은 있어도 실패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위임받은 사람들에게는 패배란 없습니다.  다만 믿음의 상실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함께 하심을 믿어야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언제 어디에서나 하나님이 나를 신뢰하고 있고,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국이란 어쩌다가 하루아침에 일어난 나라가 아닙니다.  제국이 되어 보지 못한 나라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무수한 잠재된 비밀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 개인도 그렇고 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그저 복을 받은 일은 없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엄청난 잠재된 비밀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강력한 비밀이 무엇일까?  그 나라의 지도자들이나 백성들이나 그 국가가 이루려고 하는 거룩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국가나 개인에게 있어서 비전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해를 시작하면서 더 큰 비전을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내 가정과 내 교회를 향한 더 큰 비전을 품고 주 앞에서 사명자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따라가는 데에는 때로는 고통이 따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는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인간적인 특권을 버려야 했습니다.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버리고 왕궁을 버리고 나와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끝없이 불평과 원망만 하는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사막 한 가운데에 너무 너무 힘들어서 얼마나 자주 이 모든 짐을 벗어버리고 싶다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까?  차라리 나를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는 고통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 가는 길은 언제나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부여잡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이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세는 어느 상황, 어느 때에든지 하나님을 더 강하게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음의 신화를 줄기차게 계속해서 만들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금년 한 해, 나와 내 가정은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신화를 만들어갈 것이다.
우리 교회는 믿음의 신화를 만들어갈 것이다"
끊임없이 자기 선언을 하고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맡을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간증을 준비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한 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붙잡고 세상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아름다운 간증자가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만일 누가 저에게 "인생이 무엇이냐고?" 라고 묻는다면 저는 서슴치 않고 "그것은 비전을 찾아가는 나그네의 길이다"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 부모님이나 주변 어른들에게서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 있다면, "너는 커서 이 다음에 뭐가 될래?"라는 그런 물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의사가 되고 싶어요, 사업가 또는 훌륭한 과학자가 되고 싶어요, 대통령이 되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이런 대답은 마치 하나의 작은 불꽃처럼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처음으로 내 인생의 미래에 대한 어떤 그림을 갖게 되는 그런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림들을 어렸을 때 간직하면서 그것을 그대로 어른이 되어서 실현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여러 차례 우리의 성장 과정에서 이 그림을 조금씩 조금씩 수정해 가면서 우리의 인생에 궁극적인 소명의 자리 혹은 비전의 땅을 찾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인생이라는 것은 비전을 찾아가는 나그네의 길이라고 다시 한번 정의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브람이 그의 비전의 땅을 찾아가는 나그네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람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실수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느 날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곧장 찾아갔던 사건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람이 처음에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구체적으로 그 땅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다만 부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아브람은 그 땅을 향해서 나아갔다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비전을 찾아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걸어갔던 삶, 그것이 아브람이 비전을 안고 찾아갔던 나그네의 길이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아브람의 인생 여정을 통해서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나아갈 수가 있었던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이 시작되기 직전인 창세기 11장 31절을 보면 성경은 아브람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여기에서 거류하였다는 말은 잠시 머물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이 본래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그곳에서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중간에 하란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아버지가 데라였는데,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또 하란의 아들이요 손자인 롯과 데라의 자부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아브람의 큰 형님이 있었는데 그가 하란이 아니었는가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하란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롯입니다.  그런데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난 것을 보면 하란은 일찍 죽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24장 2절을 보면 그때에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와 아브람, 그리고 또 하나의 아들 나홀이라는 아들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의 형제 가운데 하란이라는 형제와 또 다른 형제 나홀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이 아들들을 데리고 강 저편에 거하면서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가 아브람을 가리켜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 아닙니다.  한때는 불신앙의 가정이었고 미신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브람은 거기서 갑자기 하나님의 소명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사도행전 7장 2절과 3절에 보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이렇게 기록이 시작됩니다.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던 한 지역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아브람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람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느 날 갑자기 아브람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간섭이었습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람은 이 주권적인 하나님의 임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는 약속의 땅을 향해서 나아가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서 나아가라.  내가 그 땅을 너와 너의 후손과 그리고 인류에게 미칠 축복을 위해서 준비했다"

이때 처음으로 아브람은 약속의 땅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본문 12장 1절은 그때 받았던 하나님의 그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래서 아브람이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는 아브람에게 있어서 첫 비전을 잉태하게 되는 계절이었습니다.  이제 아브람은 이 비전을 품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하란은 갈대아 우르에서 서북쪽으로 약 960km 길이가 됩니다.  그런데 갈대아 우르에서 이곳 하란 땅에 와서 아브람은 그곳에서 그의 가족들과 상당히 오래 지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아버지 데라가 죽습니다.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 비로소 아브람은 다시 가나안 땅을 향하여 출발하게 됩니다.

저는 이 하란 땅에서 머물렀던 시기가 아브람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을 합니다.  아브람의 비전이 흔들리고 주저했었던 시기였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이 아브람의 가족으로 말미암아 생긴 문제가 아니었을까 추정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되어 있지만, 사도행전 7장 3절에 보면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친척까지도 떠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를 모시고, 또 조카까지 데리고 떠나갔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하란 땅에 와서 병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가나안까지 바로 갈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조카 롯을 비롯한 많은 가족이 아브람의 발목을 잡았을 것입니다.  어떤 가족은 고생을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그냥 가나안이고 뭐고 여기서 살자고 제안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란 땅은 그의 꿈이 지체되고 그의 꿈이 꺾일 수도 있었던 중요한 하나의 시련의 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주셨던 비전을 다시 붙잡습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품고 가나안을 향해서 출발을 합니다.  이때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본문 4절을 다시 한번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은 마침내 떠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우리가 5절에 보면 제일 마지막 부분에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성경은 이렇게 간단하게 기록하지만 "마침내"라는 단어를 성경의 기자가 썼을 때 우리는 아브람이 겪어야 했었던 과정의 험난함을 짐작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마침내 오셨군요,  마침내 들어갔더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란에서 가나안까지는 약 400마일입니다.  그러면 고향에서 가나안까지는 모두 몇 마일을 여행한 것입니까?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가 600마일입니다.  하란에서 가나안까지가 400마일이라고 했습니다.  도합 얼마입니까?  계산이 잘 안되십니까?  600+400 이런 것이 잘 안되십니까?  얼마입니까?  1,000마일입니다.  약 1,000마일의 거리 4,000리를 여행한 것입니다.  교통이 발달된 오늘날에야 4,000리 길이 힘들지 않지만 교통이 발달되지 않는 당시에는 결코 쉽지 않는 험난한 과정이었습니다.  그 험난한 과정을 지나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십시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가나안땅이 저절로 아브람에게 행복을 약속해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여기서도 시련을 경험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기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서 이어지는 12장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참으로 이상한 하나님이십니다.  약속의 땅이면 약속의 땅에 아름다움이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인데, 들어가자마자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다시 애굽으로 내려가야만 했었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한동안 방황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아브람은 마침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하나님을 행해서 온전한 믿음이 세워지는 어느 한 순간, 하나님께서 별이 빛나는 밤에 아브라함을 바깥뜰로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아!"
"네, 하나님"
"오늘 밤 별이 많지?"
"그러네요"
"별을 좀 세어 보아라"
"별 하나, 별 둘, 별 셋…  하나님, 별이 너무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어요"

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아, 네 자손이 저 하늘의 별처럼 무수하게 될 것이다.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질 것이다"
이때 성경은 기록하기를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를 의로 여기셨다, 기뻐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순간이 아브람이 그 땅에서의 비전이 확고해지는 그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람의 뜻은 본래 '높으신 아버지, 위대하신 아버지"입니다.  이것도 좋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 주어졌던 새로운 이름, 비전과 함께 주어졌던 새로운 이름은 아브라함, 이것은 민족들의 아버지, 열방들의 아버지였습니다.

앞으로 아브라함의 인생은 자기 민족뿐만 아니라 민족의 영역을 넘어서는 역량을 끼칠 것이다.  수많은 민족들에게, 수많은 열방들에게 영향을 끼지는 조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비로소 그 땅에 온전히 정착하여 인생을 그 땅에서 투자하고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인생의 바톤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아브라함이 비전의 땅을 찾아가는 나그네의 길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전을 찾아가는 나그네의 길은 아브라함 개인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발자취를 쫓아가는 믿음의 공동체도 동일하게 혹은 유사하게 경험해 가는 그런 과정이라고 봅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 교회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건강한 교회, 행복한 교회,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왔습니다.  솔직히 우리 교회는 어느 교회처럼 쉴 공간도 없습니다.  부족한 것이 훨씬 더 많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전에 함께 모였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교회를 통하여 이 땅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보다 건강한 교회, 행복한 교회, 정말로 좋은 교회를 만들어서 주 앞에 드리고자 하는 소중한 믿음의 꿈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부족해도 기쁨으로 모였습니다.  어떤 때는 개척교회를 섬기는 것이 힘들고 지칠 때도 있었지만 좋은 교회를 만들리라는 벅찬 가슴을 안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이러한 믿음의 꿈이 실현되기 위하여 더 많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뜨거운 헌신으로 주 앞에 좋은 교회를 만들어 드리기 위해 더 몸부림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꿈을 이루기 위한 여러분의 기도와 몸부림이 있는 한, 어느 날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시고 크게 축복해 주실 것을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별들을 바라보게 하시면서 축복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축복하실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여러분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믿음의 꿈이 실현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으로 헌신해야 합니까?

우리는 무엇보다 아브라함에게서 그 헌신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비전을 보여 주셨을 때 아브라함의 반응은 세 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첫째 믿었습니다.  둘째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희생을 감당했습니다.

본문 4절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가 순종하고 고향과 친척을 떠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 때문이었습니다.  그 비전의 한 부분은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붙들림을 받아 이웃들에게 축복이 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축복한다.  너는 위대한 민족이 된다.  그리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천하 만민은 너를 복되다고 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비전을 바라보았던 아브라함은 기꺼이 고향을 떠나는 모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희생해야 하는 아픔도 감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험난한 과정의 고통도 기쁨으로 견딜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희생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에는 축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저와 여러분의 헌신의 결과는 우리보다도 다음 세대가 더 커다란 유익과 영향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유, 존재하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삶의 영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께서 보여주셨던 삶의 모본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요?
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미도록 뜨거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님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십자가가 구체적으로 느껴지던 그 무렵, 다가오는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말이야, 영광을 얻을 때가 가까웠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는 분명히 고통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내가 고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영광을 얻을 때가 가까웠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예수님께서 이런 고백을 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십자가는 분명히 고통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희생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피 흘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고통과 희생을 통해서 구원받을 무수한 영혼들의 환상, 구원받아야 할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을 때에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이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나의 영광이야!"

사랑하는 여러분, 이분을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주인으로, 구주로 믿고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라면 우리가 교회의 부흥을 위한 일련의 과정에서 느끼는 힘들고 어려운 모든 일들에 대해서 부담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개척교회를 섬긴다는 것은 세상적으로 본다면 분명히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기쁨으로, 이것을 감사의 사건으로,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 누릴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우리가 이 일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광스러운 기회라고…" 이렇게 고백하는 우리 교회는 분명히 뜨겁게 부흥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믿음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기회가 가까웠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거니와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교회를 통하여 구원받게 될 무수한 영혼들을 바라보며, 주님이 주신 이 기회 앞에 믿음으로, 그리고 순종함으로 희생함으로 기쁨으로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금년 한 해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금년 한 해에 두 영혼을 세우면서 재생산의 사역을 감당하는 거룩한 비전을 품고 힘차게 달려가십시다.
재생산의 역사, 이것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이요, 거룩한 명령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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