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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의 이유 (살전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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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이유 (살전 1:1~4)

부모의 눈에 비쳐지는 어린 자녀들의 모습은 항상 아슬아슬합니다. 천방지축 뛰어다니다가 어느 순간 아이가 엎어지기라도 하면 혹 다치지나 않았을까 해서 화들짝 놀래서 쫓아가 아이를 일으키는 그 모습 속에는 물론 아이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그런 아이들이 점차 자라면서 어느 사이엔가 품안에 있던 자녀들이 부모의 품을 벗어나기 시작할 때 세월의 무상함과 더불어 아 나도 그만 늙어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도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녀에 대한 염려하는 마음이 사라졌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져도 여전히 부모에게 있어서 자녀란 염려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부모의 마음이 아픈 때는 언젠가 하면 자녀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싶을 때입니다. 형편이 좋지 않아 자녀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부모의 마음은 더욱 아플 것입니다. 혹 자녀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이게 다 내가 바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라고 하며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잘 가르쳤다고 해서 다 좋은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것만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내가 못난 탓에 가난에 찌든 삶에 허덕이다 보니까 아이들도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하고 남들처럼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고 뭐 하면서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는 부모의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교회를 바라보는 목회자의 마음이 바로 그렇습니다. 아니 교회 안에 성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목회자의 마음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제 막 믿음 안에서 걸음마를 시작하는 초신자들을 지켜보는 목회자의 마음은 항상 조마조마합니다. 그것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할 때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언제나 큰 믿음의 사람으로 자랄 수 있을까? 언제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까 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초신자뿐 아니라 이미 믿음 안에서 살아온 세월들이 오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약한 믿음의 성도들을 바라보는 마음은 더욱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가 약 3주 동안 전도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워낙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짧았습니다. 그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생각하면 항상 염려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형편을 알아보았더니 놀랍게도 믿음 안에 크게 성장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너무나도 고마워서 너무나도 기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바울이 편지를 써서 다시금 그들을 격려하며 그들을 더욱 믿음 안에 든든히 서서 살아가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첫머리에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렇게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감사하는 첫째 이유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믿음으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농부가 풍성한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먼저 봄에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씨를 뿌렸다 해도 풍성한 추수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가 김을 맬 필요도 없을 것이고 비료를 줄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풍성한 추수를 거두기를 원하기에 또한 반드시 풍성한 추수를 거두게 될 줄로 믿기에 봄부터 가을까지 땀 흘려 수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혹시 비바람이라도 몰아친다면 그로 인해서 혹 잘못될까 싶어 마음 졸이며 물꼬를 터주고 혹 가물기라도 하면 양수기를 동원해서라도 물을 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수고가 얼마나 대단한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얼굴이 그냥 시꺼멓게 변하도록 그들은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암만 수고해도 아무 것도 거두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렇게 수고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삶의 구주로 고백하고 마음에 모셔 들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천국 백성이 된 것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으신 것은 단지 우리를 천국 백성삼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나라와 네 친척과 네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를 큰 나라로 만들어 주고, 너에게 복을 주어, 너의 이름을 빛나게 할 것이다.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주는 사람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을 내가 저주하겠다.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이 약속의 말씀은 그렇게 믿고 따를 때 “네게 복을 주어 너의 이름을 빛나게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될 것이라”고 하심으로 단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으로 삼겠다고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복을 누리도록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땅에서 우리가 바라는 바 모든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믿는다면 그렇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신 말씀을 따라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한 것 자체가 믿음의 역사 즉 믿음으로 행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으로 믿는다고 하여도 입을 열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지 못한다면 이는 구원에 이룰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고백이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믿는다면 주신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 또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산으로 데리고 가서 제물로 드리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그 말씀대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까지 사흘 길을 가서 제물로 드리려고 했던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그 아들을 통하여 후손이 이 땅에 헤아릴 수 없이 많게 해 주시겠다고 또한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삭을 제물로 드려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조금도 흔들림 없이 모리아 산까지 가서 이삭을 제물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게도냐 교회들이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예물을 드릴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잠언서에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흩어 구제하여도 오히려 부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약속을 믿었기에 그들은 찢어질 듯이 가난하지만 오히려 가뭄으로 고생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더 풍성하게 예물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요 말씀을 배우는 자들은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으로 함께 하라고 하며 거기에 더하여 너희의 심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신 갈라디아서 6장에서 주신 말씀을 따라 빌립보 교회가 자기들의 형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역시 풍성한 예물로 바울을 섬겼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주님께 드리는 이유도 역시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대로 “너희는 창고에 너희가 거둔 것의 십일조를 가져와 나의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여라.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라.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가 쌓을 공간이 넘치도록 너희에게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하신 약속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복을 주실 줄로 믿기에 그렇게 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는 나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더하여 이런 귀한 약속이 주어져 있음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복을 받아 누리기를 원하지만 또 그렇게 될 줄로 믿지만 막상 하나님 앞에 그렇게 행하지 못하면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말라기서에서 약속의 말씀을 주시기 바로 직전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내게서 훔친 것은 십일조와 예물이다. 온 나라가 나의 것을 훔쳤으므로 너희에게 저주가 내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부분 인용하셨던 말씀들은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신명기의 말씀은 한 마디로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복을 받고 순종치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이라는 것은 하늘의 복과 땅의 복과 가정의 복과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범사의 복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감사하다고 합니다. 당시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때입니다. 물론 오늘날도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때는 아주 목숨이 왔다 갔다 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목숨 걸고 그렇게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바로 뒤 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을 받는 중에도 성령이 주는 기쁨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역에 사는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고난을 받는 가운데서도 주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행했으며 그것도 기쁨으로 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성령이 주시는 기쁨을 통해서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가 믿음으로 행할 수 있는 비결은 성령의 능력으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뜨겁게 기도해야 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말씀과 기도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믿음으로 행한 것이 그러므로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날마다 비록 짧은 기간 배웠지만 그 배우고 들은 말씀을 되새김질하면서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힘써 기도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고난을 받는 중에도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들이 결코 자신의 환경을 보지 않고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대로 성령의 감동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지 않고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올해 우리가 가서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약속을 믿기에 가능한 것이요 그럴 때 또한 우리들에게 주시는 크신 상급이 있음을 믿기에 또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도 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떤 직분을 맡기실 때는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신다고 했고 믿음으로 감당하며 충성을 다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또한 놀라운 은혜와 복을 더하시리라고 하셨으니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말씀을 지키며 우리들에게 주신 모든 직분들을 감당해 나가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둘째 이유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사랑으로 수고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에는 수고가 따릅니다. 수고가 따른다는 것은 곧 내가 먼저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주기 전에 먼저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심으로 생명 바쳐 사랑해 주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말씀대로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주신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을 우리 역시 친구를 위해서 베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가장 소중한 사람 가장 친한 친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그들을 더 힘들게 할 때가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면서도 그들을 기쁘게 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더 힘들게 하고 속상하게 만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따뜻한 말 한 마디 해주지 못하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고맙다는 말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 하는 게 그렇게도 힘이 듭니까?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가 무어 그리 힘이 듭니까? 오히려 그보다는 상대방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 말만 늘어놓은 우리들은 아니었습니까? 내가 듣기 싫은 소리는 상대방도 듣기 싫은 법입니다. 나는 듣기 싫어하면서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줄기차기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이유는 또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로인해 상대방의 마음이 상할 수 있다면 그냥 참는 것이 더 좋을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해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을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는 이유는 또 어디 있습니까? 오히려 그럴 때 그 사람을 위해서 조용히 뒤에서 기도해주며 안 좋은 말보다는 좋은 말로 격려하기를 더 힘쓰게 되면 지금 당장은 아닌 것 같아도 바로 거기서부터 상대방이 변해나가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속이 터지겠죠. 그것을 참고 이기며 나가기에 수고라는 것입니다. 나도 힘들지만 먼저 상대방을 생각하자니 그게 수고입니다. 나도 살고 봐야 한다고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틀린 얘깁니다. 먼저 상대방을 위해서 나를 희생할 때 나만 손해 같지만 아닙니다. 그게 바로 나도 사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거꾸로 말합니다. 나부터 살고 봐야하는 것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먼저 다른 사람을 위해 나를 죽이면 그로 인해 상대방도 살고 나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에게 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힘들기에 귀찮기에 속상하기에 더 사랑을 베푸는 자요 이를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셋째 이유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히 소망을 지켜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고하여도 결국에 남는 것은 파멸뿐이라고 한다면 누구라서 수고하겠고 누구라서 열심을 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들 앞에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예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날이건 아니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건 간에 반드시 우리가 가게 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는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러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연약해져 있을 때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때로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마지막 말씀이 무엇입니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내가 자신 있게 믿음 안에서 살아갈 때 뿐 아니라 내가 흔들리고 있는 그런 때에조차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무엇하기 위해서 함께 계시겠습니까? 우리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시면서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또한 믿습니다. 그 예수님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어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 앞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주님의 사랑 때문이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점에서 우리들의 귀한 본보기입니다.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그들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늘나라를 분명히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늘나라가 바로 우리들이 나아가야 할 푯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믿음은 여기서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가 참고 견딜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소망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누구는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기 위해 사는 것이다 그래서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을 했습니다마는 아닙니다. 우리는 죽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을 소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로의 부르심 하늘나라로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죽음은 끝이 아닌 하늘나라에서의 새 삶의 시작입니다. 이것을 믿기에 우리가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훈련소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견딜 수 있는 것은 결국 그 훈련을 마칠 때가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훈련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면 그 훈련을 힘든 훈련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요 우리 인생길이 아무리 고달프다고 해도 결국에는 끝날 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승리의 행진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날을 바라보고 오늘 모든 수고에 우리가 힘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그날에는 단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비된 크신 상급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될 것입니다. 이왕이면 그날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 대상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최우수상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소망 안에 굳게 서서 흔들림 없이 오늘을 살아가며 주어진 모든 일에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은 항상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에는 행함이 따릅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릅니다. 소망에는 굳건하게 서서 흔들림이 없는 인내가 따릅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바로 성도들이 믿음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수고하며 소망 가운데 굳건하게 서서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목회자가 그것을 기뻐할 때 하나님은 또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바울 사도는 바로 이런 이유로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야말로 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과 비교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분들이라고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기에 항상 감사합니다. 저의 모든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을 모든 증거를 통해 분명히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누구 하나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누구만 빼놓고 라는 말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대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힘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며 영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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