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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눈 (요 1: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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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눈 (요 1:43-51)

그리스도의 눈은 어떤 눈일까요? 생김새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눈으로 어떻게 보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눈이었습니다. 천지창조하실 때 무엇을 보았나요?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큰 세상, 더 앞의 것을 보았습니다. 빛을 보고 그 빛을 불러냅니다. 보아야 할 것을 보고 있게 만드는 능력의 눈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현재 보이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나요? 그러면 상황에 복종해야 합니다. 거기 맞추어 경험이 만들어집니다. 그 경험은 별로 자비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볼 것을 봅니다. 그래서 볼 것을 보이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눈입니다.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능동적입니다. 보는 것을 바꾸는 능력의 눈입니다.

나다나엘은 경험으로 봅니다. 나사렛은 시골 마을입니다. 거기서 잘 난 사람이 난 적이 없습니다. 빌립이 예수를 소개하자 거절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눈을 열어줍니다. 자기 칭찬하는 말을 듣고 나다나엘이 묻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요?”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 무화과 그늘에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거기서 명상하는 그의 진실함을 봅니다. 그가 복음의 사자로 크게 사용될 것을 봅니다. 결국 하나님의 천사들 볼 것을 내다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눈은 초월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볼 것을 믿음으로 보고 거기에 생기를 줍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듭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눈을 가지라 하나님은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1. 볼 것을 보라

세상 사람들의 눈은 수동적입니다. 좋은 것 행복한 것을 보고 싶어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자기가 보려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세상이 보여주는 대로 봅니다. 그래서 거기 반응합니다. 합격자 명단에 있는 내 이름을 보고 싶어 합니다. 세상에서 대접 받고 잘 사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냉정합니다. 모두 좋은 것을 주지 않아요.

모든 게 다 잘 되지 않아요. 사업 잘 되는 내 모습 보는가 싶었더니 무서운 병에 걸린 나를 봅니다. 배우자와 사이 나쁜 나를 봅니다. 자녀가 말 안 들어 술 마시는 나를 봅니다. 다른 이성과 재미 보는 나를 보는가 싶더니 모든 불행 속에 있는 나를 봅니다. 어쩔 수 없어요. 당하는 나입니다. 약합니다. 마음도 의지도 건강도 약해 헤매는 나를 봅니다.

예수는 어떻게 합니까? 나다나엘이 옵니다. 반신반의 하면서 의심하면서 억지로 만나러 옵니다. 자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기분 나쁘고 싫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는 보이는 대로 받지 않습니다. 볼 것을 봅니다. 무엇이 볼 것입니까? 나다나엘이 하나님 사람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빛나는 모습입니다. 천사들의 수종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담대하게 그에게 말합니다. “너는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구나.” 그에게 진실함만 있었나요? 아니요, 의심이 더 많았습니다. 선입관으로 예수를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속에 있는 진실함을 봅니다. 그것을 크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선하게 이끌립니다. 복음을 받아 위대한 삶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삶에서 무엇을 봅니까? 회사가 너무 힘드나요? 돈은 없고 경쟁은 심하고 경기는 나쁘나요? 낙심되고 짜증만 납니까? 그것이 내가 볼 것입니까? 아니요, 멋지게 성공한 인생의 내 모습입니다. 가정도 아이들도 잘 됩니다. 복음으로 마음도 성격도 넉넉해지고 삶이 여유롭고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보나요?

천지창조하실 때 하나님 눈앞에는 혼돈과 공허뿐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볼 것을 보십니다. 완성된 천지만물입니다. 그리고 명령하십니다. “빛이 있으라.” 단지 빛뿐이지만 그는 여전히 완성된 세상을 봅니다. 둘째 날 셋째 날 아직 원하는 것이 안 나와도 여전히 하나님은 볼 것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수동적이지 않아요. 능동적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 속에 계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처럼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소매치기는 어느 주머니에 얼마의 돈이 있는지 보입니다. 훈련된 도둑은 들어가서 정확하게 돈과 귀금속을 집어내오는데 10분도 안 걸립니다. 신자는 영의 눈이 열렸습니다. 훈련하면 볼 것을 봅니다.

지금 나의 인생에서 무엇을 보나요? 힘든가요? 그게 마음으로 보는 내용입니다. 상대하는 사람 구제불능인가요? 여기서 내가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요? 보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볼 것을 보세요. 그러면 보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보세요. 능동적으로 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서로 격려해 보세요. 정말 볼 것을 보세요.

2. 믿음으로 보라

믿음으로 보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무조건 내가 원하는 것을 욕심 부려서 주장하는 것인가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요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인가요? 내 욕심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있나요? 그러면 믿음으로 볼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우상이 되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원하는 것이 됩니다. 계명을 거슬러가면서 하나님에게 사람에게 피해를 줍니다.

믿음으로 보려면 하나님만 사랑하고 원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래야 하는 줄은 알아도 어느새 다른 게 마음을 차지합니다. 자동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사라지고 어둠이 지배합니다. 문제에 눌립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중심에 모시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배, 전도 좋은 줄 알지만 하기 싫습니다. 그래서 기쁘게 원하는 마음 달라 기도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보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신자들의 선배들입니다. 믿음으로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래서 보는 그것을 받고 상을 더 받습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그대로 보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 말씀대로 보기를 중단하지 않는 이는 복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자신도 아내도 완전히 늙었지만 볼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입니다. 욕심으로 그 나이에 나오나요? 아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봅니다. 그래서 하늘을 별을 보고 땅의 모래를 볼 때 자손들을 봅니다. 세월은 계속 흘러 25년이나 되었습니다. 결국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보는 25년 동안 이미 아들을 가진 셈입니다.

그리스도는 나다나엘과 다른 제자들이 온전하게 사용되는 날들을 보고 있습니다. 숫자도 적고 머리도 나쁩니다. 성질이 급하고 싸우고 준비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믿음으로 볼 것을 봅니다. 그 믿음이 그들을 영적으로 세웁니다. 믿음은 영적세상을 움직입니다. 머리가 아니고 웅변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힘도 아닙니다. 하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새롭게 하신 내가 보입니까? 아니면 병들고 위기에 있는 내가 보입니까? 내가 보는 내가, 내가 경험하는 나입니다. 결심하고 믿음으로 보세요. 예수를 만나면 십자가에 못 박혀서도 낙원을 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동행하는 내가 보아야 할 것을 못 보겠습니까? 믿음을 일으키세요. 그리고 보세요. 건강한 나, 잘 되는 나, 영광의 나입니다.

금년과 내 년 사이에 이 자리가 처음 믿는 신자로 채워지는 것을 봅니다. 믿음의 눈은 봅니다. 우리 교우들이 위대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여기 요셉이 있고 모세가 있고 다윗이 있습니다. 다니엘이 있고 바울과 베드로가 있습니다. 세상을 밝히고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들을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그러기 위해 문제와 고통보다 볼 것을 보세요.

3. 생명으로 보라

어떻게 생명으로 봅니까? 열정을 일으켜야 합니다. 열정은 목표를 끌어 다닙니다. 처녀와 총각이 서로 사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걸 어느 날 알게 됩니다.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은 달라집니다. 하늘도 땅도 나무도 사람들도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그대로가 아닙니다. 모두가 생기가 넘칩니다. 무생물 바위도 살아있어요.

하나님을 진정으로 소유한 사람은 이 정도가 아닙니다. 사랑과 열정이 넘쳐납니다. 하나님만 사랑한다면 모든 힘이 다 나오는 데 그러려고 해도 금새 다른 것이 마음을 지배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이마에 써 붙이고 옷술에 적어두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열정입니다. 어두움도 빛입니다. 병도 실패도 없습니다. 하나님만 원하게 기도하세요.

“주 안에서 기뻐하라.” 예수 믿고 예수 의지해 열정을 일으키세요. 찬송과 기도를 구원의 기쁨으로 하세요. 감옥에서도 기쁨과 감사를 일으킬 능력을 받았습니다. 기뻐하며 감사하며 볼 것을 믿음으로 보세요. 할수록 강해지고 신비한 세상이 열립니다. 만세반석 열리고 들어가게 됩니다. 믿음으로 보는 사람은 얼굴이 굳어있지 않습니다. 빛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합3:19)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데 사슴처럼 빠르게 높은 곳에 강하게 서게 하십니다. 요셉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믿음의 눈은 또 다른 세계를 보고 그 세계가 내려오게 만듭니다. 내가 지금 보는 세계가 나의 세계입니다.

힘들고 망하는 것 같지만 조지 워싱턴은 미국이 독립하는 것을 봅니다. 전투마다 패배해도 링컨은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미국이 통일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힘들 때마다 유머를 말합니다. 우리도 그럽시다. 적어도 감사라도 하세요. 그리스도의 눈으로 승리를 보는 여유입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참고 극복할 힘이 옵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억압 받는 흑인이었어요. 백인과의 평등한 지위를 봅니다. “내게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 예전에 노예였던 부모의 자식과 그 노예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을 봅니다.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을 봅니다.”

믿음의 눈 열어 볼 것을 봅시다. 감히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 주가 주시는 승리를 미리 보세요. 완전한 건강과 풍요로움을 보세요. 마음이 어두우면 믿음의 눈은 감겨집니다. 감정을 말씀대로 맞추어야 영의 눈이 밝아집니다. 날마다 스스로 확인해 보세요. 나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내 운명을 보는가? 어떤 눈으로? 그리스도의 눈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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