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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고후 1:23 -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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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고후 1:23 - 2:11)

  '손주 사랑'은 '자식 사랑'과는 또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이라고 세상의 모든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는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자기 핏줄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 싱싱한 생명으로 자라는 것을 특히 자신의 육신은 점점 더 노쇠해지는 가운데 보게 되니까 그것을 귀여워하고 아끼는 마음이 각별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같은 손주 사랑에는 한 가지 약점이 따라오게 되는데, 바로 그런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들은 버릇이 나쁘게 되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야단이나 매를 전혀 맞지 않고 그저 귀여움만 받으면서 자라게 되면 백이면 백 다 버릇없게 될 것이 뻔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또 어쩔 수 없는 일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것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여전히 자기 손자 손녀들을 차마 엄하게 대하지 못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제 아버지께서도 당신 입으로는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자란 애들이 버릇이 없지."라고 말씀하시면서도, 정작 당신의 손자인 영은이를 두고서는 "아(아이) 절대로 때리믄(때리면) 안 덴다이(안 된다)."고 제게 걸핏하면 압력(?)을 넣곤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과는 질이 다른 까닭에, 저도 영은이를 키우면서 꼭 세 번 매를 든 적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무절제하신(?) 사랑보다는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는 성경 말씀대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한 사랑이 바로 그랬습니다.
  비록 말썽 부리는 교인들이 많은 문제 교회이기는 했지만, 그 교회에 속한 영혼 하나하나를 아끼는 마음은 실로 지극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할아버지 식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아버지 식의 사랑'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바로 그런 사도 바울의 증거를 통하여, 오늘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말씀을 통해 훈계(訓戒)받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껴 주시고 계시는 증거입니다.

  1장 23절과 24절에 기록하기를 "23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24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고린도후서를 쓰기 조금 전에 고린도교회를 직접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원래 계획은 고린도교회를 두 번 방문하는 것이었지만 한 번밖에 가지 못했는데, 여기 23절에서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이라는 말이 바로 그 두 번째 방문 계획이 취소된 경위를 이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해명해 주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두고 사도 바울은 "너희를 아끼려 함" 때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끼다(spare)'란 말은 '지극히 소중히 여기다'란 뜻입니다.
  비록 아무리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라 해도, 가뜩이나 기독교인들이 소수에 불과한 상태에서는 어쨌든 호랑이 새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낙심하거나 탈선하지 않도록 세세하게 마음을 써서 키워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그런 자세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더 자세히 밝혀집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하고 있는 대로, 그는 어떤 지배자 같은 자세로 교인들 위에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 즉 참된 신앙생활에서 오는 기쁨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신자가 되도록 그들을 양육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는 말대로, 사도 바울은 일단 신앙고백하고 세례받은 교인들에 대해서는 그 개인 신앙양심을 함부로 의심하거나 판단하지 아니하고 그 믿음을 인정하면서 대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가만히 버려 둔 것이 아니라, 그런 신자들을 신앙 공동체인 교회생활 중심으로 기쁨과 화평 중에 계속해서 신앙생활 더 잘 하도록 이끌어가려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한 영혼을 아끼고 그로 하여금 신앙생활의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이어지는 2장 1절 이하 4절에 그것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1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 2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 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3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4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근심"이란 문맥상 '마음 아프게 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첫 번째 방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책망해야 할 것만을 생각하면서 가야 했으니 자연히 자기 자신에게도 마음 아프고 발걸음 무겁고 고통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근심하게 한 자"란 말은 그런 바울의 책망을 듣고 마음 상하게 된 교인을 뜻하며, 그러므로 "나의 근심하게 한 자 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라는 말은, 다시 말해서 '내가 너희들을 근심하게만 하면 나를 기쁘게 해 줄 사람도 없어지는 셈인데, 그렇다면 내가 그런 방문을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느냐?'라는 뜻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신앙생활의 '기쁨을 돕는 것'이 그의 방문의 목적인데, 그런 기쁨을 나눌 수 없을 것이 뻔한 '근심의 방문'을 바울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며 바로 그 까닭에 그 두 번째 방문을 취소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그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그냥 포기하고 내버려 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3절에 "내가 이같이 쓴 것," 그리고 4절에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라고 밝히고 있는 대로, 그는 직접 방문하는 대신에 편지를 한 장 써서 보내었습니다.
  이 '근심케 한 편지' 혹은 '아픔과 눈물의 편지'란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에 또 한 번 보낸 어떤 편지를 가리키는 것인데, 그 편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져 있지는 않습니다.

  하여튼 그 편지의 내용은 대부분이 고린도교회 내의 죄에 대한 책망, 그리고 회개와 권징의 촉구 등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고린도전서와 바울의 1차 방문을 통해서 책망했던 것들을 고린도교회가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보내었던 편지였으니 그 책망의 강도가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 스스로도 그 편지를 가리켜 '내가 너희들을 근심케(아프게) 한 편지'라고 부르고 있을 만큼, 받은 쪽에서는 마음이 찔리고 아프게 되는 내용들로 가득 찼던 편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편지 보내는 바울 쪽에서도 그 아픔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근심의 편지'를 써 보낼 때 사도 바울의 심정은 자신이 고린도교회 교인들로부터 당하는 오해, 사도적 권위를 무시당하는 아픔, 또 그들의 회개하지 않는 완고한 자세에 대한 안타까움,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니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라고 고백하고 있는 대로 그런 상황에서 편지를 보내는 것은 바울 자신에게도 정말 괴로웠던 것입니다.

  이처럼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는 아픔을 줄 '근심의 편지'요 자기 자신에게도 고통스러운 '눈물의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그런 편지를 보낸 이유는, 여기서 밝히고 있는 그대로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넘쳐흐를 정도로 많은 사랑'이 있었던 까닭에 그는 그 사랑하는, 그 아끼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책망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말이지 목사가 야단치는 것이 재미있어서, 훈계함으로써 교인을 마음대로 '주관'하는 권위를 누리고 싶어서 교인을 책망하는 것이겠습니까?
  솔직히 저도 설교 시간에 책망 따위는 전혀 하지 않고 그저 좋은 말만 하고 목사 노릇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분명히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스스로 꺼내기도 참 거북하고 괴로운 말인데, 그런 말일랑 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지내면 피차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하지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넘치는 사랑'이 분명히 있는 목사라면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목사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책망, 진정한 사랑이 없는 책망이라면 당연히 아픈 상처만 생기게 만드는 독(毒)이 될 뿐이겠지만, 진정 영혼을 아끼는 마음에서 나오는 훈계와 교훈과 책망은 그것을 받는 교인의 믿음을 바로 세우고 그 신앙생활의 기쁨을 회복시키는 양약(良藥)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험한 데로 가까이 가고 있는 자녀를 보고 부모가 "얘야, 그리 가면 안 된다."고 경고해 주는 것이 어떻게 쓸데없는 간섭이나 미움의 발로가 되겠습니까?
  밤늦게 돌아다니는 자녀를 보고 걱정하고 야단치는 것은 적어도 그 자녀를 버린 자식 취급하지 아니하고 진정 아끼고 있는 부모라면 당연히 해야만 할 말 아닙니까?
  그것은 오직 그 소중한 자녀를 악한 것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그 생명을 지키기 위한 사랑의 책망일 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얄팍한 사랑의 노래'나 불러주는 목사와 그처럼 '자기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는 아양'에 익숙한 교인들이 오늘날 현대교회 안에서 점점 더 늘어가고 있습니다.
  양이 곁길로 빠지고 있는데, 사나운 짐승 앞에 밥이 될 것이 뻔한데 목자의 양심이 있는 교역자라면 어떻게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서 그저 '평안하십시오. 사랑합니다.'라는 따위의 듣기 좋은 소리만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엄히 책망해 주고 여러분의 양심을 아프게 해 줄 줄 아는 교역자를 배나 존경해야 합니다.
  그런 목사, 강도사, 전도사야말로 정말 여러분을 아끼고 있는 진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연휴 주말이라고 주일 빼먹으면 안 됩니다," "물질 축복 받으려면 십일조 생활부터 시작하셔야지요," "자녀가 정말 잘 되기 원하시면 주일예배와 SFC성경공부에 꼭 참석시켜야 합니다." - '사랑'이라는 '사' 자 한 번도 안 해도, 그런 따끔한 말 한 마디 속에 이 세상에서 여러분의 영혼을 제일 아끼고 있는 한 목자의 사랑이 얼마나 충만하게 담겨 있는지를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책망 받게 될 때 비록 그것이 당장은 내 마음에 괴로움을 주는 것이라 해도, 그 책망에 적시어 있는 '많은 눈물'을 생각하고 그 뒤에 있는 '넘치는 사랑'을 꼭 깨닫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회를 통해 치리(治理)받게 되는 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해 주신다는 증거입니다.

  5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에 "5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 7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근심하게 한 자"란 바로 바울이 보낸 '근심의 편지'를 받고 고린도교회가 권징을 실시한 교인들, 즉 범죄한 사실에 대하여 교회로부터 공적으로 징계를 받게 된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런 자들의 범죄는 비단 사도 바울만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내가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는 말은, '내 말이 너무 심하게 들리지 않게 하려고 이런 정도로만 말한다.'는 뜻입니다.
  즉 한 교인이 공적으로 범죄할 때 그것은 목회자에게 개인적 아픔도 되지만 그보다 공동체 전체에게 큰 고통을 주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결코 과언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전 교회에 근심을 끼친 범죄자라고 해서 용서해 주어야 할 것을 잊으면 또한 아니 된다고 사도 바울은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라는 말에서 '많은 사람'이란 그와 같은 권징이 교회의 공권에 따라 합법적으로 행해졌음을 가리키며, '족하다'라는 말은 그렇게 공적으로 징계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더 이상 거기에 대하여 뒷말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저를 용서하고 위로해야" 할 때,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어야" 할 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죄를 드러내어 처리해야 할 때가 있으면 이제 죄를 감싸고 덮어 주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즉 벌할 때가 있으면 용서해 줄 때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아니하면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징은 교회의 진리와 순결을 지키기 위해 꼭 실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 그 목적 중에 하나가 '범죄자의 영적 유익을 도모함'인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범죄한 교인을 교회나 다른 성도들로부터 '단절'시키는 것이 권징의 목적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정죄하고 시벌하는 것만 칼같이 행할 줄 알고 진정 용서하고 위로하는 것을 잊어 먹으면, 그 권징 받은 교인은 완전히 낙심하고 신앙생활 그 자체를 포기하게 될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 뻔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공적으로 권징했으면 또한 공적으로 해벌을 시행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용서가 없는 권징만으로서는 그 범죄한 영혼을 다시 회복시키는 힘은 결코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계속하여 9절부터 11절까지에 기록하기를 "9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고 했습니다.
  그 '근심의 편지'를 써서 보낸 목적은 바로 바울의 책망에 순종하고 마땅히 교회에서 행하여야 할 권징을 실시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는 그 범죄자들을 권징함으로써 그런 바울의 판단에 동의하고 지시에 순종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권징 순서에 '용서'가 꼭 따라가야 할 것을 바울이 그들에게 주지시켜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란 말은, 고린도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용서한 사실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 역시 교회의 권위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따른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지교회의 관할과 치리를 존중한다고 말하는 것은 실로 놀라운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도이든지 장로이든지 평신도이든지 간에 그처럼 교회의 치리를 따르는 자세야말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모시고 있는 한 성도로서 지극히 당연한 자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그처럼 반드시 용서가 따르는 권징을 실시해야 할 이유를 한 가지 더 덧붙이면서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교회가 권징하지 않은 교인을 사용해서 교회를 제 마음대로 망쳐 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교회가 권징 후에 용서하지 않은 교인 역시 사단의 좋은 먹잇감이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마음, 진정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행하는 권징은 사단이 성도 화목을 이간질시키고 교회 화평을 파괴하는 수단으로 역이용해서 써먹을 수 있습니다.
  사단은 적어도 그 정도로 교활하다는 사실을 신자와 교회는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적어도 신자와 교회는 그런 사단이 꾀하는 수작을 빠삭하게 꿰뚫어 보고 그 사단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 수 있을 정도로 영적 단수가 높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른 권징은 교회의 덕을 세우고 복음의 진리를 지킬 뿐 아니라, 범죄한 영혼에게도 유익함을 끼쳐 주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용서 없는 권징은 교회 안에 아물어질 길이 없는 많은 상처들만 만들어 나갈 뿐이지만, 진정 한 영혼을 아끼는 마음으로 행하는 권징은 이처럼 사단의 교란작전을 분쇄하고 약한 영혼을 강하게, 병든 영혼을 회복시키는 치료의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여 권징을 받게 될 때 교인은 그것이야말로 사실은 자신이 귀중히 여김을 받고 있으며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증거인 줄로 깨달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아이들은 자기 집을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고 자신의 홀로서기를 막는 방해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경우에는 가출까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집이야말로 그 약한 어린이를 안전하게 자라게 해주는 유일한 보호공간이요 사춘기의 청소년들을 탈선으로부터 지켜 주는 최고의 사랑의 보금자리가 아니겠습니까?

  미국에는 무정부주의자들이 꽤 있습니다.
  이들은 언젠가 미국 정부와 대항해서 한판 싸움이 벌어지게 될 날을 대비해서 자체 군사훈련까지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처럼 국가를 부정하고 무정부주의를 주장할 수 있는 자유 그 자체가 바로 다름 아닌 국가와 정부에 의하여 보장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집이라는 울타리가 자녀들을 지켜 주듯이, 교회는 교인이라는 개인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신앙생활을 보호해 주고 돌보아 주는 공동체일 뿐입니다.
  국가가 법을 가지고 국민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존과 자유를 보장해 주고 있듯이, 장로교의 헌법과 그 법을 가지고 교회를 관할하고 치리하는 당회는 결코 개인신앙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의 확신을 안전하게 지켜 주고 그 삶이 신행일치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영위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시절에는 교회를 떠나게 된 교인을 가리켜 "마치 유산되어서 어머니의 자궁에서 빠져 나가버린 태아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태아가 자궁을 벗어나는 것이 자유이겠습니까?
  자궁이야말로 태아가 어머니의 사랑을 실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 아니겠습니까?
  교회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현실적으로 베풀어지고 그 보호를 실제적으로 담뿍 받게 누릴 수 있는 '태아의 자궁'과도 같은 곳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로부터 공적인 권징을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직도 나를 사단의 손에 넘기지 않으시고 여전히 당신의 자녀로 끝까지 붙잡아 주시는 증거인 줄로 받아들이고, 평소에 이루어지는 '당회의 관할과 치리' 역시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께서 그 아끼시는 양들의 유익을 위하여 돌보아 주시는 손길인 줄로 깨닫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방문을 취소하고 그 대신 엄한 책망이 담긴 편지를 보내었을 때 그것은 그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덜 사랑하고 있는 듯이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 말씀의 책망야말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지극히 아끼고 있었다는 증거였습니다.
  고린도교회가 그런 사도 바울의 지시를 받고 자기 교회 교인들 중 일부를 권징한 것도 언뜻 보기에는 형제사랑이 부족한 처사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사실에 있어서는 그 범죄한 한 영혼을 진짜로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영어 속담에 'Spare the rod and spoil the child.'(매를 아끼면 자식을 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언젠가 어느 목사님의 대학생 아들이 미국에서 자란 아이답지 않게 너무나 예의바른 것을 보고 "넌 어쩌면 그렇게 기특하게 잘 자랐니?"라고 물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대답이 "다 아빠한테 빳다로 맞은 덕분이에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아버지의 매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고마워할 정도가 되었으니, 정말 잘 키운 아버지고 제대로 자란 아들이구나.'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를 그저 마음 좋게만 대해 주시다가 버릇없는 아이로 만드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때로는 상처가 생길만큼 매를 들어서라도 제대로 철든 자녀로 키우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십니다.
  그래서 잠언 27장 5절에도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지난 주 교역자 수련회 중에 몇 분 목사님과 전도사님들의 사역 발표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우리 경향교회 교인 여러분들은 정말 좋은 목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정말 행복한 양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경향의 교역자들의 사랑이란 여러분들을 그저 '옹야옹야'하면서 칭찬과 아양으로 키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버릇없는 교인으로 만들 뿐이며 게으른 교회생활과 파선하는 신앙으로 이끌게 될 뿐인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이분들은 여러분들을 오직 말씀으로 훈계하고 경책하여 여러분의 양심을 콕콕 찔러 아프게 하며, 지금보다 더 교회중심으로 살도록 예배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참석시키고 각종 헌금생활에 빠짐이 없도록 부단히 주마가편을 합니다.
  그것이 겉으로는 냉정하고 제도적인 것처럼만 보일지 몰라도, 그 뒤에 감추어진 '넘치는 사랑'과 '많은 눈물'을 여러분들은 정말 모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한 교훈과 책망, 교회를 통한 관할과 치리 - 이것들이 여러분에게 당장은 아픔을, 근심을, 상처를 준다 해도 사실은 모두가 다 바로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지극히 아끼고 계신다는 뚜렷한 증거입니다.
  버릇없이 자라도 눈감아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무책임'입니다.
  죄 지어도 그냥 넘겨 버리는 것은 관용이 아니라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는 '무관심'일 뿐인 것입니다.
  당신의 자녀를 아끼시는 까닭에 주시는 말씀의 책망을 달게 받고, 당신의 자녀를 바로 키우기 위하여 주시는 교회의 치리에 기꺼이 순종함으로써, 실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기특하게 잘 자라는 성도, 세상 앞에서도 칭찬받는 신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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