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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주신 큰 비전 (창 49: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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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신 큰 비전 (창 49:8-12)

성공하려면 줄을 잘 서야 한다고 합니다.
특히 조직에서 살아남는 처세술 중 하나가 줄을 잘 서는 것입니다.
주식하시는 분들 이야기로는 주식도 줄을 잘 서야한다고 합니다.
주식 전문가가 하는 말이
    모르겠거든 외국인 투자자들 줄에 서면 실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줄`이 현실적으로 효력 있는 출세의 수단이란 걸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좋은 줄이 있다면 붙잡고 활용하는 것도 재주입니다.
그러나 세상 줄은 언젠가는 실망시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도 줄을 잘 서야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줄은 세상 처세술 줄과 다른 것은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크게 두 반열이 있습니다. 축복의 반열과 저주의 반열입니다.
아벨이 있으면 가인이 있고, 이삭이 있으면 이스마엘이 있고
      야곱이 있으면 에서가 있고,
      축복의 그리심산이 있으면 저주의 산 에발산이 있듯이
      축복과 저주의 반열이 있습니다. 

찬송가 267장 4,5절에
“ 예언자들과 왕들도 반열대로 황금길 따라 나아와 찬송하네 ”
“ 우리 모두다 그 반열 뒤따르며 함께 즐거운 찬송을 부르리라 ”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신앙생활 했느냐가 
    하나님 앞에 설 때 반열이 결정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하나님의 큰 비전을 바라보았던 유다의 반열에 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 창49장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팔려 간 아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어 있는
애굽에 내려와 거주하던 야곱이 임종을 맞이하여
열 두 아들들의 장래에 대하여 유언 격으로 예언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들려주는 유언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1. 야곱이 그 아들들에게 들려주는 유언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참조/1-2절)

이 유언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아
  열두 아들에 대한 유언을 남기는 내용입니다.
창세기에 나타나는 축복, 저주, 심판, 약속 등
      일련의 신적 선포를 마무리 짓는 유언입니다.
이 유언은 가나안 정복과 정착
그리고 더 큰 민족을 이룰
    선민 이스라엘의 영광스런 미래에 대하여 벅찬 소망과 감격으로
열두 아들 하나, 하나에 축복의 내용과 질을 달리하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릇을 알면 미래가 보인다는 말처럼
야곱은 아들들의 그릇을 너무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임종을 앞두고 각 아들들의 죄와 선행을 적나하게 드러내며
    그에 따라 각기 축복과 저주를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보면
어느 아비가 자식을 축복하지 저주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아들은 축복하고 어떤 아들은 저주한 것을 볼 때 
이것은 단순한 유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계시를 좇아
    장차 열 두 지파가 될 아들들의 장래를 예언하고 있기 때문에
    다 축복한 것이 아니라 저주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창49장을 통해 살펴보면                       
열 두 아들 가운데 뚜렷이 축복받은 아들은
넷째 유다와 열 한 째 요셉 두 아들만이 축복을 받게 됩니다.
특히 오늘 본문말씀은
넷째 아들 유다에 관한 축복의 예언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야곱의 열 두 아들과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1) 구약 주경가 델리취는 야곱의 열두 아들은 장차 열 두 지파의 족장으로
  바로 구약 교회를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즉 야곱은 구약 교회의 목사이고 열 두 아들은 구약 교회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는 유다, 요셉같은 성도들이 있어
              축복받는 교인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르우벤이나 단과 같이 축복에서 제외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2) 계7:에 보니 천상 교회에 구원받은 성도들이 나오는데
  그기에 보면 각 지파대로 12,000명 씩 144,000명이 나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들도 반열 따라 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 어떻게 하였느냐에 따라
      우리의 구원의 반열이 달라짐을 암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구원의 반열에 서더라도
    축복받은 유다의 반열 아니면 요셉의 반열에 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유다가 어떻게 장자적인 축복을 받게 되었을까요?(8절, 참조/창43:9절)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입니다(창29:35절)
혈통적으로 말하면 장남 르우벤이 장자적인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장자 르우벤은 3절 이하에
[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
[ 물의 끓음 같았은 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
야곱 가문의 장자는 첫째 아들 르우벤입니다.
    르우벤은 장자로서 품위도 있고 능력도 탁월하지만
    그러나 그 품위 가지고 그 능력 가지고 장자다운 행동을 하지 못하고
창35:22절에 보면 아비의 첩 빌하를 범하게 되므로
            장자의 위치에서 탈락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장자권이 둘째 시몬이나 셋째 레위에게로 돌아가야 하는데
시몬과 레위 역시 장자의 위치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이유는 5절에                                   
[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 하는 기계로다 ]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창34장에 누이동생 디나가 세겜 땅에서
  추장의 아들 세겜에게 겁탈 당하자 세겜 땅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으면
  여동생을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할례를 행하고 3일째 되는 날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성에 들어가
      남자들을 칼로 다 죽여버렸습니다.
이 사건이 시므온과 레위가 장자에서 탈락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니 자동적으로 장자권은 넷째 아들 유다에게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유다가 야곱 가문에 장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말합니다.
유다는 오늘 축복받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의 반열에서 복된 삶을 누리자면 
    꼭 유의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르우벤은  - 선천적으로나 기질적으로 복을 가지고 태어난 자식입니다.
        그러나 그 풍채 그 능력 가지고 아비에 침상에 올라갔다는 것은
        지도자의 권위에 대한 도전인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다 복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복된 삶을 누리는데 있어서 꼭 권위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므온과 레위는
바로 우리가 복된 삶을 누리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은 혈기인 것을 말합니다.
고전15:50절 [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검으로 내려 쳤을 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 검을 가진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
              혈기를 부리는 자는 다 혈기로 망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형들이 탈락되고 보니
넷째 아들 유다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장자적인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유다가 이러한 장자적인 축복을 받아 누리는 데는
      그만한 축복의 접촉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축복의 접촉점이 무엇인가 하면

1) 창43:에 보면 야곱이 살던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야곱의 아들들이 양식을 사러 애굽에 내려갔다가
동생 요셉이 그 곳에 국무총리가 되어 형들인 줄 알고 시험하기 위하여
  정탐군으로 몰아 형제 중 시므온을 불모로 잡혀두고
고향 땅에 있는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오면
    정탐꾼의 협의도 벗어지고 시므온도 돌려주겠다고 합니다.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형제들이 사실대로 아비 야곱에게 이야기했지만
야곱은 요셉을 잃어버린 것만 해도 가슴에 한이 맺히는데
    어찌 베냐민까지 빼앗아 가고자 하느냐 하면서 거절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기근이 심하니 야곱이 허락을 하는데
그때 유다가 아버지 야곱에게 나아와 하는 말이
43:9절 [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즉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합니다.
장자적 반열에 서서 장자적인 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책임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책임 있는 자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지는 장자적인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에게 장자적인 사명을 맡기시고
                장자적인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2) 이렇게 복을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는 가만히 보면
    신앙생활 가운데 축복을 누릴만한 장점이 나타납니다.
유다지파가 이렇게 야곱으로부터 축복받은 지파가 되어
    복된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생활로 접어들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인구조사를 하게 하고
저들이 광야생활 중에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를 지시를 합니다.
이것이 민수기 성경인데 민수기 1장에
    인구조사를 할 때에는 장자 르우벤 지파부터 실시합니다만
    민2장에 진배치를 할 때는 유다 지파부터 먼저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장자적인 축복을 받을 사람은 신앙생활에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민2:3절 이하에 보면 진배치가 시작되는데
    항상 성막을 중심해서 사방으로 세 지파씩 진을 치는데
유다지파는 동방 해 돋는 편에 진을 치게 합니다.
        동방 해 돋는 편은 바로 하나님 편을 의미합니다.
        즉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는 자를 의미합니다.
수8:의 그리심 산 에발산 비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심 산은 동편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자들의 특징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교회와 네게 주시는 비전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리에 앉기를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가문에 그 교회에 그 사회에
            장자적인 인물에게 비전을 제시해 주십니다.

2) 민2:9절에 [ 그들은 제 일대로 진행할찌니라 ]
  제일 앞장 서 갔다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 신앙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십자가 신앙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주님 따라가더라도 멀찍이 따라가는 자가 아니라
                바짝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장자적인 복을 누리는 자의 특징은
    항상 주의 일에 앞장선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계7장 천상에 가보니
    유다 지파가 장자의 반열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7장에 천상에 가보니 단 지파는 빠져 있습니다.
단 지파가 왜 천상교회에는 빠져버렸습니까?
왜 예수 잘 믿는 것 같았는데 구원의 반열에도 빠졌느냐는 것입니다.

17절 보세요
[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
무슨 말입니까?  단 지파 보세요. 광야생활 진 배치를 보면
          진이 머무르고 있을 때는 중앙 맨 앞에 옵니다.
그러니 평소에는 얼굴도 드러내고 칭찬 받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출발하면 제일 뒤에 가서 붙습니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 특징이 무엇인지 압니까?
항상 부정적이 되어 앞서 가는 사람 뒷퉁수를 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교회에서 떠나고 없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줄을 잘 서야 합니다.
항상 은혜받는 시간에 위치에 자리에 서시기 바랍니다. 
앞에 앉아 있는 성도가 수군거리는 것 봤습니까? 그 반대이지요,
항상 주의 일 할때는 앞장 서서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유다같이 장자적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3. 유다가 받은 축복이 무엇입니까?(9절)

1) 먼저 8절을 보면
  [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
유다는 이름 자체도 찬송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물이란 뜻이지만
이 말은 다른 형제들로부터 부러움을 싸고 칭송을 받겠다는 뜻도 포함됩니다.
장자가 장자의 직책을 다한다면
    그는 그 가문의 영예요 형제들의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가문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장자적인 신앙에 눈이 뜨여져
    가문을 일으키고 교회를 일으키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9절은 [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
바로 사자는 권세를 말합니다. 능력을 말합니다.
계5:5절에 예수님을 가리켜
[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
예수님이 유다 지파의 사자라면
      유다를 사자 새끼에 비유한 것입니다.
죄의 권세를 깨드리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맏아들이 되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승리가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장자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장자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만이 다른 형제들에게 본이 되는 것입니다.

책임을 질 줄 아는 자가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무거운 것 짐이라고 들지 아니하면
      힘이 남아 있을 것 같지만 점점 힘이 없어집니다.
반대로 무거운 것 지다 보면 힘이 더 생기고
    더 무거운 것 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쌀가마니를 저 본 경험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쌀가마니 80Kg을 등에 질 수도 없어요
그런데 자꾸 등에 지다보니 쌀가마니 등에 지고 뛰어갈 수 있더라고요.
누가 하나님 앞에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큰 책임을 지는 직분자일수록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유다지파가 받은 축복 10절 말씀입니다.
[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
규는 왕권을 상징하는 지휘봉 같은 것을 말합니다.
지금도 군대 가면 지휘관들이 지휘봉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유다 지파에서 왕이 이어지겠다는 말입니다.
실지 유다 지파에서 다윗이 왕이 된 후 그 자손들이 왕통을 잇게 됩니다.

그러나 풀핏 주석에는 이홀은                         
이 땅의 왕권이상 하나님의 성역에 참여할 수 있는 권을 말한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의 성역에 참여하는 것이 왕권인냐?
눅19:11절 이하에 므나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므나 받아서 열 므나 남긴 종에게 주인이 하는 말이
[ 잘 하였도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
므나의 비유는 바로 우리가 주의 일을 어떻게 감당했느냐의 비유입니다.
    므나의 비유는 직분의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직분 - 바로 성역 참여권입니다.
우리가 어떤 책임을 지느냐에 따라                     
    거기에는 그 만한 특권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열 고을 다섯 고을 차지할 수 있는 왕권이 주어집니다.
아무에게나 직분 맡기시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역에 참여할 수 있는 권을 허락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들려주신 홀, 잘 사용하여
      하늘나라에서 다섯 고을, 열 고을 차지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유다가 받은 축복 중 가장 큰 복은 무엇입니까?


4. 유다지파가 바라보는 하나님의 비전 중
          가장 핵심적이고 큰 비전이 무엇일까요?(10절)
10절 [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
실로가 무엇인냐?
실로에 대한 의미도 아주 풍성합니다.

1) 첫째가 실로는 평화와 안식을 의미합니다.
실로는 살렘(salem)이란 말과 같은 어근으로서 평화를 의미합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란 말은
    달리 말하면 ‘평화롭게 하시는 자가 오실 때까지’ 란 말입니다.
            ‘안식을 주시는 자가 오실 때까지’ 란 말입니다.

2) `실로`의 또 다른 의미는 보냄을 받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즉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는 아들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란 달리 말하면
    아들이 오시기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다의 아들이요, 다윗의 아들이요
      인자 곧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실로`란 애칭으로 사용했습니다.

만약에 이 대목이 없다면 야곱의 생애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렇게 고생해서 고작 기근을 피해 고향산천을 떠나는 일 밖에 없습니다.
그 고난과 연단의 세월을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 아니했다면
    “야곱의 생애는 불행했다”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한 순간을 위해 그의 평생에 연단하신지도 모릅니다.
예수가 없는 인생,
예수가 드러나지 않는 생애는 절대로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깨어지고 부서졌더라도
예수를 말하고 증거하는 생애라야 성공한 생애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바로 그런 생애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생애 속에 예수가 있습니까?
야곱은 바로 예수 비전을
    가문의 장자적 사명을 이어갈 유다에게서 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의 꿈과 야망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아니라면
      그 꿈과 야망이 이뤄질 수록 삶은 더 허무해 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비전
    그 가운데 가장 큰 비전인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다면
    아니 자신이 아니더라도 자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비전이 있다면
    그 비전은 바로 축복 중에 축복이요.
      내 생애에 가장 큰 비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민족성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바로 `기다림` 이었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그것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역사의 시작이었으며 전부였습니다.
한 개인이나 한 민족의 역사도 본래는 어떤 `기다림`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기다림`에는 `막연함`이나 `짐작함`이 있습니다.
가슴만 부풀어 올랐지 손에 잡히는 것이 없는 것이
    바로 `기다림`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막상 진짜 `기다림`의 실체가 나타날 때도
사람들은 그것을 잡지 못하고 지나쳐 버릴 때가 많습니다.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그것을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보면 실로 `실로`에 대한 기다림만 있었지
그 실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나름대로 그 실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실체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 `실로`가 이 땅에 왔을 때는 그것을 받아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실로`가 구체적으로 현현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대부분은 바로 `기다림`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삶이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 속에서 비전을 바라보고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모습이 없는 막연함이 대부분입니다.
막연함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상한 형태의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로`의 실체는 예수님이 오시면 분명해집니다.
신앙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신 것같이 우리의 신앙도 분명하고
        우리의 구원도 분명하고 우리의 기도의 응답도 분명하고
        예수님이 주신 비전도 분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비전의 가장 큰 비전으로 바라볼 때
      거기에는 분명히 메시지가 있고 사명이 있고
            신앙의 행동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5. 비전을 가진 자가 누리는 복된 삶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11-12절)

유다의 장자적인 축복을 받으면 영적인 복 뿐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물질적인 복을 넘치게 주십니다.
11-12절 말씀을 보면
[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 희리로다 ]
과수원 주인이 소를 사과나무에 매는 것 봤습니까?
포도원 주인이 염소를 포도나무에 매는 것 봤습니까?
농부는 자식만큼이나 나무를 아끼는데 어떻게 맬 수 있습니까?
이 말은 그만큼 물질적인 복이 풍족하겠다는 말입니다.
    포도 농사 얼마나 잘 되었으면 옷을 포도주에 빨겠습니까?
    우유를 얼마나 마셨으면 이빨이 희겠습니까?
    그만큼 풍족한 물질적인 복을 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 될 줄 믿습니다.


< 결론 >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의 반열로 불러 주었습니다.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으로 불러 주었습니다.
요는 축복의 반열에 서서 어떻게 신앙생활하느냐? 가
    그 축복을 누리기도 하고 제외되기도 합니다.
책임감 있는 신앙인이 되고 직분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비전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복된 삶을 주실 줄 믿습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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