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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초가 든든한 인생 (유 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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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가 든든한 인생 (유 1:20-23)

오늘 2008년 우리 교회는 한해를 살아가는 동안 "감사와 평안으로 든든히 서가는 공동체"로 나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특히 '든든히 서간다'는 이 말은 매우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든든히 서가는 것은 우리가 이 한해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또 하나 우리가 고민해야할 것은 교회의 지체 된 우리자신들도 '세워져 가야할 존재'가 아닙니까? 우리가 오늘 함께 보고자하는 유다서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질문에 좋은 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 유다서가 기록될 당시 거짓교사들이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경건치 아니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만히 교회에 들어와 눈에 보이지 않는 좀 벌레와 같이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성도들의 믿음을 야금야금 해칩니다. 그래서 불신과 원망과 파당을 일으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멍들게 하는 안타까운 자리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런 현실 앞에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는 당시 믿음의 사람들에게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워라"고 피를 토하듯 외칩니다.

뭐, 우리가 사는 시대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지금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과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물질 만능주의에 깊숙이 빠져 있습니다. 해가 가면 갈수롤 더하면 더했지, 한번 맛본 세상의 향락 잘 나오지 못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이 제철 만난 듯, 세상을 휘젓고 다닙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영혼을 공허하게 만들고, 진리를 가리우게 해서 만족을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 보니 여기저기 이단들이 일어나고 또 자신에 입맛에 맛는 것이 진리인 냥 이곳 저곳 기울이며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다가 패가망신하는 일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이런 시대의 흐름 앞에 본문 20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 '자기를 건축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어떻게 보면 집짓기와 같습니다. 저마다 인생의 집을 잘 지어보려고 애를 씁니다. 집을 짓는 사람 중에 무너지라고 짓는 바보 천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딴에는 인생의 집을 잘 지어보겠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 보면 부실 인생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정말 낭패가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 인생은 단 한번 아닙니까? 두 번 다시 살 수 없는 인생,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 그런데 그 인생의 집이 와르르 무너져버린다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우리 한번 생각해 보십니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그 무너짐이 어떠했습니까? 그 무너짐이 아주 심하지 않았습니까? 기초가 잘 안되어 있으면 다리가 아무리 길고 빌딩이 아무리 화려해도 이처럼 다 소용 없는 것입니다. 무너질 때 그 무너짐만 심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크고 화려할수록 무너질 때 그 무너짐은 심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려도 먼저 기초를 원칙대로 잘하도록 노력해야지 시간이 없다고... 대충대충 기초공사를 하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삶도 예외가 아닙니다. 좋은 건축가가 좋은 집을 짓듯이 우리 역시 바람이 불어도 창수가 나도 끄덕없는 좋은 집을 지어야하지 않나요? 그런데 어디다가 건축을 하라고 하십니까? 거룩한 믿음 위에다 자신을 건축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바로 나아갈 수는 없잖아요. 아무리 많은 지식과 물질과 명예와 선행을 쌓아도 죄로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가서 담대히 설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엄청난 희생이고 우리에게는 엄청난 은혜인 것입니다. 이 약속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약속을 믿고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너무 소중하기에 여기 이 믿음을 바로 거룩한 믿음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데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자신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이 아침, 다시 한번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것이 하나 있는데 어느 날 스펄젼의 관한 책을 보다가 스펼전도 저와 똑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40대 초반부터 고치기 힘든 어떤 지병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에 교인들에게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이 수없이 이 강단에서 들었던 꼭 같은 메시지를 다시 전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나에게는 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나를 데리고 가실지 모르지 않습니까? 어쩌면 오늘 이 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저는 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저가 전하던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담당하고 죽으셨다는 것, 이것하나 다시 전하고 가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설교한 다음에도 15년이나 더 말씀을 전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만, 설교자는 항상 그와같은 긴박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할 것입니다.

저도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이미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하나를 위해 저주와 고통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실 만큼 결코 예수님이 놓칠 수 없는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오늘도 보혜사가 되신 성령께서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나를 은혜로 붙잡으시며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살 맛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약속 위에 자신을 건축하며 세워가야 합니다.

이제 자신을 아름답게 세워지기 위해서 이제 힘써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끊임없는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20절을 보면 "성령으로 기도하며"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금요 철야에도 말씀드렸지만, 19세기, 영국의 브리스톨에서 수많은 고아들을 돌봤던 조지 뮬러는 믿음과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일평생 동안 5만 번의 기도응답을 받은 사람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믿음과 기도의 사람이 되게 했을까요? 그는 일생 동안 성경을 200번 이상 읽었습니다. 성경 읽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열심으로 성령의 조명을 받고 말씀을 연구하는 것으로 보냈습니다.

여러분! 기억나시나요.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제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제물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실 것을 이야기하시며 의미 심장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요14:16-17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분이 바로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보혜사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지난주도 보셨지만, 성령님은 바로 우리의 후원자가 되십니다. 우리를 어떻게 후원해 주십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심지어 로마서 8장 26절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기도생활에서 최고의 스승이며 기도의 동반자입니다.. 기도는 성령과 결합될 때 더욱 아름다워지고 더욱 풍성하게 응답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건축을 한 건물은 활용도에 따라 엄청난 건물로서의 가치가 있지만, 그 가치를 잘 보존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물을 유지 관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21절에서도 그런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여기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대로 산다는 뜻이 있습니다. 자신을 방어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지킨다는 뜻이 있습니다. 있어야할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있다하더라도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다가도 아무리 기도하고 노력해도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도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어려운 자리로 빠지게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때 사람들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가' '나를 버리셨는가' 이런 느낌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비록 그러한 상황이 발생한다고 할찌라도 그러지 말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영어성경은 지키라는 말을 keep이라는 동사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이렇게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축구장에 골키퍼가 힘들다고 골문을 내버려두고 나가면 안되지 않습니까? 끝까지 지켜야합니다. 며칠 전에 뇌 손상을 입고 투병생활을 하시는 우리 실로암 대학에 한 성도가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목사님, 뇌수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돌아서면 뭘 했는지를 잊어버리니(정한)..." 자꾸 잊어버리니까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아 죽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문자를 받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 때 건강하셨고, 모든 것을 가져보았고, 누려본 인생이 한 순간에 자신이 누리던 행복이라는 것을 다 잃어버린 그 허탈감에 이젠 몸부림쳐봐도 예전의 자신이 아님을 알고 자꾸 믿음의 기초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기도를 부탁하겠습니까?

지금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연약할수록... 나를 미워하시거나 나를 버리시지 않으시고.. 나를 더욱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나를 더욱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낄 뿐 아니라...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나 자신을 하나님 사랑 안에 지키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긍휼이란 무엇입니까? '흘러 넘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한없이 약하고 악한 사람들을 대할 때 보여 주시는 태도'를 말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자기의 영광을 다 포기해 버리고 자기를 비웠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똑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과 시험을 몸소 체험 하셨습니다. 그것을 체험하시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필요할 때마다 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비록 우리가 죄와 허물이 많은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하게 여겨 주셨습니다.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이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에 살아가는 것 사실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한 순간도 주님의 위로와 만져주심이 아니면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바로 세워져야할 가장 큰 이유 그것은 바로 여기 22-23절에 나와 있습니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무슨 말입니까? 여기 의심하는 자들은 당시 교회 안에 교묘히 들어온 거짓 사람들에 의해 균형을 잃어버린 시험에 든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 때 교회 앞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충성하고 목회자의 목회 방향을 이해하고 순종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불만이 일어나고 영적인 방황 속에 있다가 악한 영의 거짓 세력에 의해 그 영혼이 점령당한 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자들도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불에 들어가 있는 형제 자매들은 그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고 계속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미 그 영혼이 더럽힘을 받고, 심지어 '더럽힌 옷'이란 말은 방탕한 생활로 죄악에 오염된 자입니다. 이들 역시 정죄하지 말고 우리가 혐오해야할 죄악을 가진 자라도 두려움을 가지고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 역시 하나님이 만져 주어야할 대상이고 우리 역시 그를 포기하지 않고 기도해 주어야 할 대상입니다.

영국에 토마스 무어경이라는 믿음 좋은 귀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무고하게 중상모략을 받고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사형선고를 받는 재판정에서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재판관이 사형 언도를 했습니다. 참 억울하게 죽는 것입니다. 그 때 무어경이 재판관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판관님, 오늘만은 내가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게 해주세요. 친구여, 당신과 나와의 관계는 바울과 스데반의 관계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미워해서 돌로 쳐죽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바울이 예수 믿고 나서 지금은 하나님 나라에서 스데반과 가장 가까운 친구로 손잡고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사형을 언도했지만, 당신도 예수 믿고 나중에 저 하늘나라에서 나와 함께 손잡고 영원토록 기뻐하고 행복하게 사는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말을 듣자 재판관이 충격을 받고 '나는 당신에게 사형을 언도하는데 당신은 어찌해서 이렇게 선한 말을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토마스 무어경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나에게 먼저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삶의 기본이 되고 원칙이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정신 중에 하나는 사람을 귀히 여기는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중에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개미와 코끼리가 함께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끼리가 눈치 없이 자꾸 TV 앞으로, 다가앉는 바람에 개미가 TV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개미가 코끼리에게 소리쳤습니다. "야. 너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봐. 내가, 니 앞에 앉아서 니 시선을 막아 놓으면 기분 좋겠어?" 주위에 보면 이 유머에 나오는 코끼리처럼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오직 자기 자신의 기준에 맞춰놓고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들의 처지와 환경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자기중심으로 행동으로 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진정한 사귐과 교제를 하지 못합니다. 이 사람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삐걱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그 동안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조차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이내 떠나가 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주위에 친구가 별로 없고, 항상 외딴섬처럼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리 주위에는 항상 ‘입장 바꿔놓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 주위에는 항상 친구가 많습니다. 항상 이해하는 이 사람의 넉넉함에 반해 서로 친구가 되려고 합니다. 설령 오해로 말미암아 갈등이 있었다 할지라도, 이내 그 오해가 풀립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할 수만 있다면,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많은 갈등과 문제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 ‘내가 시어머니 입장이라면 어떨까’라고 입장 바꿔놓고 생각한다면 이해할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내가 저 며느리 입장이라면 어떨까’라고 입장 바꿔놓고 생각하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 입장이 되어 생각하고, 아내는 남편 입장이 되어 생각한다면 부부간에 갈등은 사라질 것입니다. 친구가 엉뚱한 행동을 할 때도 입장 바꿔놓고 생각한다면, 그 친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는 교인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고, 교인들은 목사의 입장이 되어 생각한다면 교회 내에서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사랑은 아픔을 감싸주는 것입니다. 약점과 허물을 덮어주는 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정죄하지 않고 너그럽게 대하는 긍휼의 마음이 있는 곳에 사랑이 싹이 틉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고슴도치 딜레마' 얘기를 하므로 오늘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추운 겨울밤 넓고 큰그릇에 고슴도치 떼를 담아 밖에 내어놓았습니다. 영하 20도 혹한 속에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부들부들 떨던 고슴도치들이 한 마리 두 마리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따뜻해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마다 있는 몸의 가시가 상대방을 찌릅니다. 끌어안으면 안을수록 아파오기 시작했고, 심지어 피까지 흐릅니다. 고슴도치들은 아파서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막상 흩어지니까 혹한의 추위가 매섭게 몰아칩니다. 한참이나 부들부들 떨다가 견딜 수 없어 다시 몰려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너무 추워서 얼어있기 때문에 더 바짝 바짝 죄여 옵니다. 점점 깊이 더 찌릅니다. 피는 더 많이 나는 것입니다. 한 마리 두 마리 아파서 견딜 수 없어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흩어진 고슴도치들은 다시 추위에 떨다가 다시 몰려옵니다.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고. 드디어 날이 밝았습니다. 아침에 나가 보았더니 다 죽었어요. 절반은 얼어서 죽었고 절반은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가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과 기도로 바로 세워져 있지 않는다면, 그 하나됨의 훈련이 안되어 있으면 갈등을 느끼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문제를 극복할 줄 모릅니다. 나는 너에게 상처를 받고 너는 나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받고, 뛰쳐나가 보기도 하고 신앙 양심상 교회는 안 나갈 수 없고 해서 이곳 저곳을 기울여 보지만, 세상이 혹독하기만 합니다. 공동체가 그립고 은혜의 자리가 그립습니다. 용기를 내 다시 들어오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또 다른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증오심만 키워갑니다. 주님 오시는 마지막 날 교회 문을 열고 보았더니 절반은 얼어죽고 절반은 추위에 죽었습니다. 진정으로 면류관 쓰는 아름다운 교회를 건설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면 여기에 무슨 소망이 있고, 여기에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고 새해에는 더욱더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며 우리 모두가 함께 세워져 가는 건강한 삶이 풍성하게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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