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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복 되도다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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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되도다 (마 5:1-12) : (Makarismen - 복선언)

I. 복

새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끝도 없이 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분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God bless you" 하루에 천번쯤 "하나님이 당신에게 복 주시길 빕니다" 인사를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복을 참 좋아합니다. 제가 어릴때 마을에 새해가 되면 대문마다 복 복자를 써 붙입니다. 시집갈 때 이불에도 복, 베개에도 복, 방석에도 복, 옷장에도 복, 국 그릇 밥 그릇에도 복.

복을 좋아하지만 복이 어디에서 오고 누구에게 가야 복을 받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어디에나 가서 복을 빌어봅니다.

죽은 조상님네들이 복 주는 줄 알고 묘자리 잘 써야 된다. 명절이 되면 제사를 지내곤 합니다. 제사는 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 10장 20절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제가 어릴때 동구밖 고목나무 밑에 보니까 사람들이 복 달라고 빌고 빌다가 거기에 밥을 갖다 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먹을 밥이 없었는데 고목나무는 늘 밥을 남겨놓고 있어요. 나물까지 갖다 놓고 과일까지 갖다 놓은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어릴때 진작 알았습니다. 고목나무 속에 왜 썩었는지. 사람들이 와서 복을 달라고 빌지요. 줄 복은 없지요. 그래서 속이 팍팍 썩었던 것입니다.

산에서 평생 도를 닦던 도사가 사람으로 둔갑한 여우에게 홀려 낭떨어지에 떨어졌습니다. 지나가던 나무꾼의 손에 이끌려 겨우 살아나게 되었지요. 나무꾼 집을 떠나면서 선물을 해야 되겠는데 은혜를 갚아야 되겠는데 가진 것이 없어서 뒤져보니 품안에 부적이 하나 있던 모양입니다. 부적을 주면서 "여기 귀신이 나타나니까 위험하다고 이 부적이나 드리고 가겠다고." 그러자 나무꾼이 하는 말 "도사님이나 잘 가지고 다니십시오." 그랬답니다.

우상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시편 115편 4절 - 7절이하에 보면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복이 무엇입니까? 누가 우리에게 복을 줍니까? 어디서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복이십니다. 하나님 만이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1절로 12절은 하나님의 복 선언입니다. 강복선언. Makarismen. 복 되도다. 복 있으라. 감탄사입니다. 마태복음엔 예수님의 주옥같은 다섯편 설교가 나옵니다. 그 첫 번째 설교가 마태복음 5장-7장.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말씀하신 가장 귀한 교훈이라 하여 "산상보훈" "산상수훈"이라 일컫습니다.

이 산상보훈에 관한 성서신학자들의 극찬은 끝이 없습니다.

로빈슨(T.H. Robinson)은 이 땅의 모든 책이 산봉우리라면 그 최고봉은 산상보훈이다.
올스 하우젠(H. Olshausen)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설교는 여기 산상보훈의 주해였다. 예수님 설교의 중심이 산상보훈이라고 했습니다.

주석을 많이 쓴 일본의 흑기는 이 땅 가장 아름다운 수백의 보석으로 꾸며진 교훈의 왕관이 산상보훈이요 그 중에서도 팔복의 말씀은 반지의 다이아몬드 "핵"과 같다고 했습니다.

팔복은 산상보훈이라는 창고를 여는 열쇠라고도 했습니다.

II. 청중: 무리냐 제자냐?

오늘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5장 1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여기 무리가 누구입니까? 바로 앞절 예수님 목회의 소문을 듣고 각종 병을 앓는 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4장 마지막에 보면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4장 막이 내려집니다.

5장 1절에 이런 무리를 예수님께서 보셨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실때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가슴앓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compassion.

마태복음 9장 36절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없는 양과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목자없는 양떼 같은 무리를 보신 것입니다. 이리떼에 시달리는 한 마리 어린양처럼 종교지도자들에게 시달리는 무리를 보시니. 냄새나는 양 한 마리 그러나 씻어 줄 목자가 없었습니다. 죄에 시달리며 더러워진 심령, 그러나 그를 아무도 씻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도망가다 지쳐 넘어져 있으나 아무도 그를 일으켜 줄 사람이 없습니다. 목자가 없기 때문에 이리저리 헤매다 지쳐 낙망하고 쓰러져 있으나 아무도 그에게 희망과 용기와 믿음을 주지 못하는 어리석은 무리들을 주님께서 보셨다는 얘기입니다.

그 무리 속에서 예수님은 나의 얼굴을 보신 것입니다. 그 무리속에서 바로 당신의 얼굴을 보신 것입니다. 세상에 지쳐 넘어져 있는 당신의 모습, 세상 어디에도 위로가 없어 허덕이는 당신의 모습, 죄를 떨쳐내고 싶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온 상처, 죄악투성이, 정죄함 투성이지만 아무도 그것을 씻어줄 사람이 없어서 외로움에 고독에 울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주님이 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니 나를 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단순한 얘기같지만 이 한절 속에 많은 의문점을 가지게 됩니다. 마태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들을 담고 있습니다.
병들고 지친 무리들을 이끌고 왜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셨을까? 병자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고쳐도 부족할텐데 왜 그냥 앉으셔서 말씀만하고 계시는 것일까?
무리를 보시고 산에 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왔다고 했는데 무리는 어디에 갔단 말인가? 무리들은 산등성까지 따라오지 못했단 얘기인가? 무리들과 제자들의 관계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본문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제자들과 함께 산으로 가신 예수님이라고 마태는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에 있어서 산은 예수님이 기도하는 자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산에 올라가셔서 고독과 씨름하며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마태신학에 있어서 산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장소였습니다. 마태에게 있어서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마태는 구약을 좋아했습니다.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언제나 산에서 백성들을 만나 주셨다고 이해를 한 것 같습니다. 산은 하나님 만나는 장소, 산은 하나님 자기 계시의 장소로 마태는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시내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최종 사랑을 확인하실 때 모리아 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엘리야에게는 갈멜산에서 역사하셨습니다. 솔로몬에게 모리아산에 성전을 건축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헬몬산, 변화산에서 하나님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 산에 묻히셨습니다. 산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마태신학에 있어서 이 산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주의 성산에 오를자 누구냐? 오늘의 교회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시달리고 지친 영혼들,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던 제자들, 그들을 인도하여 교회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있는 교회안에서 하나님 복음을, 하나님 나라의 천국 복음을 지금 설명하고 설교하고 계시는 순간이었다. 그것이 바로 "산에 오르시니"란 말씀입니다.

"앉으시니"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 나라 대헌장을 예수님께서 선포하고 계시는 순간입니다. 유대 랍비들은 권위를 나타낼때 앉아서 가르쳤습니다. 왕은 앉아서 말하고 신하들은 일어나서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대헌장을 선포하시며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지금 앉으신 것입니다.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 왕국에 내용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앉으시니"라는 말씀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무리들은 어디 간 것입니까? 산상보훈의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들이 무리인가? 아니면 제자인가? 무리와 제자를 포함하는 것인가?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절 말씀만 보면 산상보훈의 청중은 분명히 제자들에 국한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께서 보신 것은 무리이지만 산언덕까지 따라온 사람은 제자들인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또 그렇게 이해해 왔습니다. 중세까지 천주교신학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개신교 신학자들도 성서 주경가들도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천주교신학에는 이원화된 신학이 가끔 있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나누어서 생각했습니다. 주님의 교훈의 말씀들도 일반 성도를 위한 교훈과 성직자나 수도자들이나 받을 수 있는 메시지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산상보훈의 말씀은 무리들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을 수도 누릴 수도 없는 차원 높은 교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상에 가장 큰 반기를 사람은 독일의 천주교 신학자 로핑크(Lohfink)라는 분입니다. 그는 여기서 무리와 제자를 나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산상보훈은 5장 6장 7장으로 이어지는 긴 설교입니다. 1절에 보면 무리를 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되어 있지만 설교가 끝나는 7장 28에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며 (제자가 아니라) 무리들이 그의 가르침에 놀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산상보훈 설교를 무리들이 끝까지 경청하고 깜짝 놀라며 권세 있는 자로다 감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얘기이지요. 그는 단언합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설교를 듣는 교인은 무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모두를 포함한다라고요.

여기 팔복의 말씀은 연약한 무리들에게 강요하는 율법이나 명령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윽박지르는 말씀이 아닙니다. Makarismen - 복 선언입니다. 복 있으라. 복 되도다 즉 감탄문입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여!" "놀랍도다 온유한 자의 복이여!" "놀랍도다 마음이 깨끗한 자의 복이여!"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말 성경엔 "복이 있나니" 서술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엔 "있나니"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팔복 말씀엔 그 어디에도 동사가 없습니다. 서술문이 아니라 감탄문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병들고 지친 무리들에게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라 나선 제자들에게 예수님 일방적으로 복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왕국의 복을 기대하는 그대들이여 그대들이 복되도다. 내게 나아오는 자, 주께 나아오는 자, 메시야를 기다리는 그대들이여 복되도다. 너희들은 복된 존재가 되었도다.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복선언. 이게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이곳에 왜 오셨습니까? 여러분이 얼마나 복된 존재인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어마어마한 복인지 이것을 확인하고 이것을 듣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입니다.

III. 입을 열어

4장에서 예수님이 천국복음을 담백하게 선포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설교를 하시고 천국을 가르치신 것은 5장 오늘 본문부터입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입을 여셨습니다. 2절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가끔 정치가들은 "내가 입을 열면 여러사람 다친다고" "내가 입을 열면 한방에 날라간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은 사람을 다치게 하는 입이 아니었습니다. 죽이는 입이 아니었습니다. 한방에 사람들을 날려 보내는 그런 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한방에 사탄을 물리치고 한방에 사람을 구원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입은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던 그 입이었습니다. 구약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불완전한 인간의 입을 빌려 말씀하시더니 드디어 직접 오셔서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말씀을 따라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그 말씀을 따라 생명이 살아납니다. 그 말씀과 함께 민족이 살아납니다. 그 말씀과 함께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네가 누구냐?" 물었을때 예수께서는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자니라"(요8:25) 나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한 자다. 나는 구약에서 수없이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다!

예수께서 처음 입을 열어 가르쳐 말씀하신 이 순간을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문을 열면 1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오 영광이여, 아! 감탄이로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친히 오셔서 드디어 입을 열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이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뛰게하고 우리를 흥분시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입을 통하여 직접 흘러나오는 말씀을 인류는 이제 직접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입을 여실 때 천국의 문이 열립니다. 마지막날 그분이 입을 여실 때 천지는 떨며 산아 나를 가려라 바위야 나를 가려라 악인이 두려워 떨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입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하나님의 집에 온 것입니다. 거룩한 산에 함께 따라온 것입니다. 내 평생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십시오. 하나님 친히 입을 여시사 내게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IV. 복 있으라(마카리오스)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첫 번째로 선언하신 말씀이 Makarios - 마카리오스 "복 있으라"입니다. 왜요? 죄지은 인간이 무엇을 잃어버리고 사는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가장 먼저 입은 손상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자가 가장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복을 잃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복의 개념의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복의 상처를 고침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지면 왜곡된 복의 개념이 회복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땅에 복이 있는 줄 알고 땅만 쳐다 보다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입을 열어 처음 외치신 말씀이 "마카리오스" 복 있으라! 복 되도다! 복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복과 축복을 혼동하여 쓰고 있지만 사실 복과 축복은 다릅니다.
창세기 12장 1절-3절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여기 복도 나오고 축복도 나옵니다. 복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축복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하나님 내게 축복해 주십시오" 이런 말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빌겠습니까? 그냥 복을 주시면 되는 것이지요.

축복이 무엇입니까? 복(福) 복에 빌 축(祝)을 씁니다. 복을 비는 것입니다. 인간은 축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축복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지요.

성경이 말하는 복, 주님께서 "복 있으라" 말씀하실 때 이 복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복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속성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복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신 자는 복된 존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복이기 때문에 주께 나온 자는 복 있는 존재로 바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은 한덩어리 두덩어리 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복받은 사람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복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have 동사 가지는 것이 아니라 복 있는 존재 동사 be동사로 바뀌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헬라어 복되다는 마카리오스는 고대어 "마카르"에서 온 말입니다. 마카르는 고통과 슬픔가운데 있던 사람이 어느 한 섬에 들어오기만 하면 모든 행복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섬을 "마카르"라고 했습니다. 사막을 여행하다가 지쳐 쓰러진 사람이 모든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오아시스를 만났습니다. 오아시스에서 나그네가 누리는 안식과 평화를 "마카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목마름이 있는 이땅에는 질병과 고난, 고통과 고난이 있지만 주께 돌아온 자가 누리는 무한의 행복 이것을 "마카르"라고 한 것입니다. 마카리오스 - 복 있으라! 인생살다가 수없는 문제에 부딪힙니다. 수없는 궁핍에 부딪힙니다. 모자랍니다. 병듭니다. 신음합니다.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온갖 아픔을 겪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준비한 한 섬 오아시스에 도착하여 그 복을 누리고 있는 상태가 마카리오스 복 되도다! 주님 앞에 돌아온 자가 누릴 무궁한 축복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 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현세적인 것이 아닙니다. 있다 없어지는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영적인 복입니다. 환경에 의하여 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복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복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행복입니다. 내게 예수 안에서 이런 복이 있음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이천 냉동창고 폭발사건에서 중국교포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들의 소원이 한국에서 주민등록증 가지는 것입니다. 주님등록증을 가져보는 것이 중국교포들의 소원입니다. 만약 주민등록증을 가지게 되는 순간 춤추며 기뻐하고 오늘 죽어도 좋다고 얘기합니다. 예배드리는 가족들 가운데 혹시 주민등록 없으신분 계십니까? 주민등록증은 잃어버렸을지 모르지만 주민등록은 다 있겠지요? 주민등록 있으신 분들은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지난번 섬기던 교회에 지하 셋방에 살던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곰팡이가 얼마나 피는지 어린아이가 천식에 시달리고 가족들이 감기 걸리면 기침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다 4층 연립 꼭대기 4층으로 이사를 왔어요. 이사한다고 그래서 심방을 갔더니 온가족이 얼마나 울면서 예배를 드리는지요. 여러분들 지하에 안 사시고 1층이상 땅 위에 사시는 분들 오늘부터 울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헬렌컬러는 한번만 볼 수만 있으면. 사흘만 볼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다시 눈을 감아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눈 뜨고 세상을 보시는 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벙어리된 사람들의 감격과 감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번만 입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소원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 시간에 입 열어 찬송하신 분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대전에 원명학교라는 정신박약아들이 모이는 학교가 있습니다. 제가 대전에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가르칠 때에 그 어머니들과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데리고 한달에 한번씩 가서 빨래도 해 주고 빵도 사가서 먹여도 주고 함께 노래도 불러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옵니다. 자식이 공부를 잘하네 못하네 잘생겼네 못생겼네 칭칭거리던 엄마들이 한번 갔다 오면 오는길에 간증이 달라집니다. 자식이 건강한 것이 감사합니다. 자기 숟가락으로 밥 먹는 것이 그렇게 예쁠 수 없습니다. 똥 오줌 못 가리는 아이들 돌봐주면서 자기 자식이 화장실 갔다 오는 것만 봐도 대견해 합니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사는 것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침마다 눈뜨고 말하면서 서로 인사할 수 있는 것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V. 예수님의 자기 행복선언

마카리오스 - 복 되도다! 이 선언은 예수님 자신의 행복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은 사람들이 당연히 누리는 특권입니다. 한국민이 한국 땅에 살 권세가 있듯이 천국백성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행복선언이 팔복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향하여 "복 되도다"고 선포하십니다.
얘들아, 나는 심령이 가난하니 복 되구나. 천국이 내 것이야.
얘들아, 나는 애통하니 복 되구나. 내겐 한없는 위로가 있구나.
얘들아, 나는 온유하니 복 되구나. 나는 땅을 기업으로 받았단다.
얘들아, 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니 복이 있구나. 나는 배부르단다.
얘들아, 나는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품으니 복 되구나. 난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얘들아, 나는 마음이 청결하니 복 되구나. 나는 하나님을 본다.
얘들아, 나는 화평케 하니 복 되구나. 사람들이 나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는구나.
애들아, 나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니 복 되구나. 천국이 내 것이란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영모여 복 되구나. 천국이 네 것이다.
애통하는 영모여 복 되구나. 네게는 한없는 위로가 있을 것이다.
온유한 영모여 복 되구나.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내 아들아 복 되구나. 너는 곧 배부르게 될 것이다.
긍휼이 여기는 내 딸아 복 되구나 너는 긍휼을 받게 될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아들아 복 되구나. 너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화평케 하는 아들아 딸아 복되구나. 사람들이 너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 일컫게 될 것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영모여 복 되구나. 천국이 너의 것이로다.
오늘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주님 앞에 찾아나왔던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영광스런 성산으로 주님을 찾아온 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복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 있는 자여 복 되도다. 복 있으라!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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