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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쓸데있는 일, 쓸데없는 일 (마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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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있는 일, 쓸데없는 일 (마 3:13-17)

지금부터 제가 여러분에게 세 개의 짧은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스스로 정리해 보십시오.

하나, 어느 집에 큰 딸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습니다. 이미 저녁 시간이 되었는데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갑자기, 오늘 저녁은 내가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를 돕겠다는 기특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쌀을 씻어 밥을 짓고 서투른 솜씨로 된장찌개를 끓였습니다. 몇 번씩 간을 맞췄지만 맛이 제대로 나질 않았습니다. 그런대로 식사 준비가 끝나고 시간은 일곱시가 다 되었는데도 아무도 오지를 않는 겁니다. 이상하다 싶어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얘, 너 왜 안오니? 오늘 저녁 우리 식구 외식하기로 했잖아. 지금 너만 기다리고 있어 빨리와.’ 아뿔사! 오늘 식구끼리 모처럼 외식하기로 한 것을 그만 깜빡했던 겁니다. 정성스레 차려놓은 밥상이 식탁위에서 식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쓸데없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드시지는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둘, 어느 동네에 아주 멋진 지하보도가 만들어졌습니다. 꽤 많은 돈이 들어간 그런 지하보도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 지하보도를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뜨거운 여름에는 노인들이 돗자리를 펴고 주무시기도 합니다. 가을철에는 멍석을 깔고 고추를 말리기도 합니다. 지하보도는 잠자는 곳도 고추 말리는 곳도 아닙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은 간 곳 없고 고추가 주인 행세를 합니다. 알고 보니 지하보도 바로 옆에 횡단보도가 있는 겁니다. 횡단보도가 있는데 구태여 힘들여가며 지하보도를 이용할 필요가 없지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졸속행정! 그렇습니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서 쓸데없는 일 했구나 싶습니다.

셋. 유대 광야에 세례 요한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실 메시야를 준비하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죄를 의식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겠다고 요한에게 나오신 것입니다. ‘예수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제가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저에게 세례를 받다니요.’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세례요한은 알았습니다. 그는 약속된 메시아입니다. 전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만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다면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 역시 죄가 있어 받는가보다’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렇다면 죄인인 예수님이 누구를 구원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거든요. 요한은 단호하게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며 거절하였으나 예수님은 부득불 세례를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요한이 볼 때 예수님은 지금 쓸데없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면 슬데 없는 일이라 생각되어도 모두 같은 것은 아닙니다. 지상보도를 두고 지하보도를 파는 일은 어떤 말로도 이해가 안 되는 쓸데없는 일입니다. 반면에 가족 외식을 잊어버리고 저녁 준비를 한 큰 딸의 행동은 의미가 있는 쓸데없음입니다. 쓸데없는 일 했구나 싶어도 적어도 딸의 일에는 코끝이 찡한 효성스러움과 가족 사랑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우리가 생각하기에 쓸데없는 그 일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쓸데 있는 일, 아니 꼭 필요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은 사복음서(막 1:7-11, 눅 3:21, 요 1:32)에 공히 기록되어 있을 만큼 그 의미가 매우 깊다 하겠습니다. 세례가 필요 없으신 분이 자청하여 세례를 받으러 오신 것에 대하여 요한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요한의 놀라워하는 모습과 주님을 말리려는 그의 행동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고백대로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지 세례를 받으실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과 달리 세례를 받으시려는 주님의 뜻은 단호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이 말씀을 직역하면 ‘왜냐하면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에게 함당하기 때문이다.’입니다. 그리고 ‘의를 이룬다’는 이 주님의 말씀이 마태복음 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의 중심 주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의가 드러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요한의 만류에도 세례를 받으시려는 것은 이 세례가 주님의 속죄 사역의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시오,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지만 그러나 죄인들을 대신하여 먼저 세례를 받으심으로 속죄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런 태도는 누구나 본받아야 할 자세입니다. 세례는 받아도 되고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면 그분을 따르기로 결심한 모든 사람들은 세례를 받아야하고 또 이런 태도로 쓸데없는 일 같아 보여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쓸데없는 일은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주의 자녀들이 평생을 밀림에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 자신의 개인 구원만이 목표인 사람에게는 쓸데없는 일입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자기 돈을 털어 가난한 이들을 구제합니다. 돈이 전부인 사람에게는 쓸데없는 일입니다. 뙤약볕 아래 전도지를 돌리며 복음을 전합니다. 시간이 돈인 사람에게는 쓸데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쓸데없음 때문에 감동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들도 이 쓸데없는 일에 동참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렇게 쓸데없는 일 같으나 꼭 필요한 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와 같이 낮아져야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는 예수의 위치보다 세례를 베푸는 요한의 위치를 선호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늘 세례 받으시는 예수님의 겸손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가르치는 자가 배움을 받는 자의 입장으로,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자가 세례를 받는 입장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죄인의 입장으로 바뀌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대속과 구원의 역사를 위루기 위해 친히 죄인으로 취급 받아 십자가형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 겸손이야 말로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모습입니다.

어느 박물관에서 어떤 사람이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상한 행동이란 자꾸 자세를 구부리면서 전시품들을 들여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상스런 행동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였고, 박물관 경비도 그를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경비원은 결국 그 사람을 붙잡아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의 입장과 그렇게 들여다본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로서, 며칠 후에 학생들과 함께 이 박물관에 견학을 오기로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물관의 전시품들이 아이들의 시각에서는 어떻게 보일지를 알기 원했던 것입니다. 아이들의 시각을 알아야 자문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시각이 아닌, 아이들의 시각에서 전시품들을 바라보기 위해서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어가면서 바라본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곧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의 모습이요, 죄인의 몸이 되어 세례를 받으신 예수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 겸손은 예수의 삶 속에서 언제나 ‘섬김’이란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말씀하신 대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세례 사건 중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스스로 낮추어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나타난 놀라운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일어났던 세 가지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하늘이 열렸습니다.(16절) 겸손히 세례 받으신 예수님 머리 위로 하늘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 열린 하늘은 구원 받은 성도 즉, 진정한 하나님의 세례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도 열립니다. 이삭에게도 하늘이 열렸습니다.(창 28:12) 에스겔에게도 하늘이 열렸습니다.(겔 1:1-19) 스데반에게도 열렸습니다.(행 7:56) 요한도 열린 하늘을 보았습니다.(요 4:1, 11:19, 19:11) 바울에게도 열렸습니다(고전 12:2-4) 순교자들이 용감하게 죽어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열린 하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열린 사람들, 열린 하늘을 바라보며 이 땅의 온갖 고난을 참고 견디었던 사람들, 바로 세례 받은 사람들입니다. 비전과 환상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례자의 반열에 있는 이들이여 모두 열린 하늘을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습니다.(16절)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마 3:8, 11)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마 3:11) 그 증거로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임했습니다. 이사야서 61:1-2의 구약의 성취입니다. 이제 말씀대로 예수님을 통하여 가난한자들이 아름다운 소식을 듣게 되었고, 마음이 상한 자가 고침을 받게 되었으며, 포로 된 자가 자유를 갇힌 자들이 놓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노아에게 홍수 심판 후 기쁜 소식을 전해 준 것이 비둘기입니다(창 8:11) 비둘기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리는 성령의 상징입니다. 비둘기 같이 임하신 성령은 새로운 은혜의 시대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을 알립니다. 세례와 더불어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선포하는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세례는 성령 체험을 경험합니다. 형식이나 단순한 예식의 참여가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됩니다. 비둘기 같은 성령이 세례 받은 모든 이들에게 임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직 경험하지 못했거나 믿지 못한 이들이여 믿으십시오. 믿음으로 성령의 임재하심이 경험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17절에 보시면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여기에 세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1)예수님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2)예수님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3)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이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공개적인 인정이며 확증하는 표입니다. 보십시오. 세례 받은 자에게 새로운 일을 맡기십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주시는 것입니다.

소명과 사명은 다릅니다. 소명이 부르심이라면 사명은 부르신 분이 시키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자녀 삼으시고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이 일을 기뻐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드러나게 확증하여 주십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심으로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고, 하늘의 소리가 들린 것 같이, 세례 받은 우리들에게도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며, 사명을 깨닫게 하시는 하늘의 소리가 들리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전 한 주간에 있었던 일 중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곁에서 이 일을 보고 있던 제자들은 모두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하리라(눅 14:8-9)’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에는, 사람의 계산으로는 쓸데없는 일이지만 예수님에게는 쓸데 있는 일, 곧 꼭 필요한 일로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라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쉽게 쓸데없는 일이라 단정하지 맙시다. 비난하지 맙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인지 기도하며 한해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인은 성탄절후 예수님의 생애에 따라 그의 세례 받으심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세례를 받으심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쓸데 있는 일, 꼭 있어야 하는 필요한 일이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한 그의 삶에 상징이며 출발이었습니다. 원래 세례는 물에 온 몸이 쑥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고, 이것은 죽었다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일로 모든 죄가 깨끗이 씻어진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그의 죽으심으로 모든 죄가 용서되어지는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일들은 철저한 겸손함에서 가능한 것이고 이 겸손이 그의 섬김의 삶을 가능케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도 철저한 겸손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님 탄생 교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작은 문 하나가 있습니다. 곧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가 작은 문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작았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큰 문으로 설계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졌지만 17세기 이후에 작게 만들어버렸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슬람인들이 말을 타고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문의 높이가 어른의 가슴정도이니 고개를 숙이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탄생하신 예수님을 만나려는 모든 사람은 고개를 숙여야만 교회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결과에는 깊은 신앙적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곧 겸손한 자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낮추지 않고는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필연적인 조치였지만 그 속에는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진리를 깨닫는다, 겸손한 사람들만이 왜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를 받으셨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겸손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만이 우리의 가야할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실로 겸손한 모습으로 사람들이 쓸데없는 일이라 하드래도 하나님께 쓸데 있는 일이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이라면 조용히 그 일을 해냅시다. 그것이 소금 같은, 빛 같은 교회가 되는 길입니다. 그리하면 우리에게 하늘이 열릴 것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실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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