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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음 세대를 품는 교회 (신 4:9~10, 살전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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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를 품는 교회 (신 4:9~10, 살전 2:7~8)

한국교회는 1960년대 이후 꾸준히 성장해 왔습니다. 한국교회의 성장 이면에는 교회학교의 역할도 컸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통계적으로 보면 1992년 이후 침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교회학교는 2000년 이후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어린이 부서들이 서서히 감소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중고등부는 급감하고 있습니다. 통계적으로는 1997년부터 2002년까지 31.9%가 감소한 것입니다.

  이런 교회학교의 침체는 흔히 저 출산과 과열 입시의 영향이라고 합니다. 다분히 그 것도 교회학교 침체의 중요한 요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다음 세대를 품지 못한 까닭입니다. 아이들에게 왜 교회학교에 가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재미없어요”라는 대답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교실붕괴’라는 말도 흔히 듣는 말입니다. 얼마 전 어느 방송에서 교실붕괴 실태를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서울 어느 고등학교 교실을 몰래 찍은 것입니다. 아예 엎드려 잠에 빠져 있는 아이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강의하고 있는 수업시간인데도 어떤 아이는 쉴 새 없이 들락거립니다. 어떤 아이는 계속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립니다. 어느 여교사가 남학생을 깨웁니다. 남학생은 “나 좀 건들지 말고 내버려둬”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학교는 있어도 교육은 없고, 선생은 있어도 가르치는 의욕이 없고, 학생은 있어도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없다.” 이런 문제는 학교 교육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꿈에 관한 해설을 보았습니다. 교실 맨 뒷자리에 앉는 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윗사람의 영향력이 적은 안정된 상황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윗사람의 영향력이 적으면 안정된 상황이라고 합니다. 뒷자리가 가장 자기 좋은 자리라고 합니다. 뒷자리가 가장 숨기 좋은 자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안정이 아닙니다.

  학교 교육의 ‘교실붕괴’가 염려됩니까? 사실 염려해야 할 것은 ‘교회학교 붕괴’입니다. 요즘 우리 총회에서는 공과 책이 안 팔린다고 아우성입니다. 앞으로 7-8년 지나면 공과 책이 아예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다음 세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함께 염려하며 다음 세대를 품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더 무너지고 더 늦기 전에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성의 세 가지 관심사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라는 인식의 문제입니다. 둘째,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윤리의 문제입니다. 셋째 무엇을 바랄 것인가 라는 종교의 문제입니다. 이 세 가지 관심사는 균형을 이루어야 건전한 인격을 형성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윤리문제는 뒷전입니다. 종교문제는 아예 관심사가 아닙니다. 단지 인식의 문제, 지식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결국 아이들이 지식은 좀 있지만 그 지식이 아이들의 장래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지식이 비윤리적이고 불완전한 인격을 만듭니다. 그 아이들이 어디를 가겠습니까? 장성하고, 성공하고, 돈벌고 나면 부모도, 이웃도 다 몰라라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인성입니다. 인성은 윤리만 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신앙으로 가능합니다. 인성은 신앙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1907년에 연동소아회를 만들어 주일학교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이에 앞서 게일 목사님 자택에서 ‘교육협회’ 창립하였습니다. 1918년에는 소아회를 유년주일학교로 개칭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주일학교 교육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이 때 교회에서 품었던 아이들이 1940-50년대에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우리가 다음 세대를 품어야 그들이 21세기 중반을 이끌게 됩니다.

  독일의 유명한 영성가이며 카톨릭 신학자인 안셀름 그륀은 ‘삶의 기술’이란 그의 책에서 “다른 사람 안에서 삶을 깨우는 사람은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다음 세대를 품어 그 안에 삶을 깨워주어야 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다음 세대를 잘 품고 잘 깨워야 교회와 가정과 한국이 삽니다. 이 일을 잘 감당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다음 세대를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길러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7에는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유모가 아기에게 젖 주기를 거절하는 것 보셨습니까? 젖을 먹이는 어머니는 젖을 빨지 못하는 아기를 걱정합니다. 행여나 자신에게 젖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아기가 잠시만 보채고 울기 시작해도 얼른 젖을 물리는 것이 모성 본능입니다. 그래서 6살이 될 때까지 나오지 않는 젖을 물고 잠들지 않습니까? 오래전에는 많이들 그랬잖습니까? 아기들이 어머니 몸에서 떨어지지 않고 살던 것이 우리의 원래 모습입니다. 어머니 등에 엎혀 놀다 잠들었습니다. 등에 붙어 있다가 앞으로 돌려 젖을 먹고 또 뒤로 돌아갑니다. 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모체접촉은 지능을 발달시킨다고 합니다. 어머니 몸에서 떨어지지 않을 때 머리가 좋아진다는 말입니다. 그땐 가난해도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모유 수유율이 해마다 떨어집니다. 어머니의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모유 수유율은 상대적으로 낮아집니다. 최근에는 아기에게 젖을 안 먹이는 게 ‘지고지순’(至高至純)인 줄 알아요. 최근 통계에 의하면 모유만 수유한다는 어머니는 10% 미만입니다. 모유와 분유를 혼합 수유하는 어머니가 60%쯤 됩니다. 모유만 수유한다는 어머니의 학력은 대졸 이상은 7%밖에 되지 않습니다.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모유 수유율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모유 수유율이 떨어지면서 아기에 대한 관심도 떨어지고 있습니다. 모유를 수유하지 않으면 어머니의 유방암 발병율이 높고, 골다공증도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모유 수유가 참 좋은데 잘못된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개그우먼이 “모유수유, 자연분만”을 나올 때마다 외쳤는데도 모유수유도 자연분만도 안 하니까 그 코너가 없어진 것 같아요.

  가정에서 자녀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듯이 교회에서도 다음세대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대를 이어갈 세대입니다. 가문에 대가 끊어진다고 상상해 보세요? 교회에 대가 끊어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상상이 됩니까? 가정에도 교회에도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다음 세대를 품어주고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길러야 합니다. 가정이 잘 되려면 자손들이 번성하고 잘 돼야 합니다. 교회가 잘 되려면 다음세대가 번성하고 잘 돼야 합니다. 지금 우리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 세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교회가 모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15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성도를 자신이 직접 낳은 자녀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가 다음 세대에 대하여 이런 모성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낳은 것처럼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내 아기에게 젖을 먹이듯 품고 젖을 먹이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세대에 희망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미어캣(meerkat)이란 동물이 있습니다. 덩치가 자그마한 동물이지만 앞 다리를 들고 한쪽 방향을 바라보며 서 있는 모습은 마치 망보는 파수꾼 같습니다. 미어캣은 가장 부성애가 발달한 포유동물이라고 합니다. 암컷이 새끼를 낳고나면 젖을 먹이기 위해 열심히 먹이를 구합니다. 암컷은 먹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겁니다. 암컷은 매일 밤 불쑥 나타나 새끼에게 모유를 먹입니다. 암컷이 나가서 먹이를 구하는 동안 수컷은 잠시도 새끼 곁을 떠나지 않고 새끼를 보살핍니다. 수컷은 육아를 전담합니다. 수컷은 전업주부의 원조입디다. 미어캣은 암컷과 수컷이 새끼를 양육하는데 업무 분담이 절묘하게 되어 있는 동물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양육하는데 부모의 업무 분담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데 우리 모두가 함께 업무를 분담해서 최대한의 관심을 가지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 10대들의 은어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이런 것들이 있네요. ‘단무지’는 ‘단순, 무식, 지랄’이라는 뜻으로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욕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무지개매너’는 ‘무지’와 ‘개 매너’의 합성어입니다. 매우 매너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십장생’이란 게 있습니다. ‘십대도 장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십대들도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우리가 있어 든든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장에는 예수님의 유년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로 미루다가 사흘 길을 가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오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자녀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와 함께 가고 있습니까?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와 함께 가고 있는 줄로 알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66:11에는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고 합니다. 다음세대를 만족하게 하고, 풍성하게 하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다음 세대를 목숨까지도 주면서 사랑으로 길러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8에는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고 합니다. 생명을 잉태하려면 내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가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목숨을 겁니다.

  아기를 가지고, 아기를 낳는 일은 누구나 다 하는 일 같지만 모두가 생명을 거는 일입니다. 내 목숨이 없이 남의 목숨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내 목숨을 걸면 남의 목숨을 살리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요재지이’(聊齋志異)라는 중국 청대(淸)의 단편 문언소설집이 있습니다. 이 속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염라대왕이 여자를 심판할 때에 여자가 흘린 눈물단지를 들고 오게 한답니다. 가지고 온 눈물단지에 손가락을 넣어 따끈따끈하면 선녀로, 차가우면 악녀로 심판했다고 합니다. 여자의 눈물은 선악을 분간하는 중요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땀과 눈물은 곧 생명입니다. 자녀를 위해서나 다음 세대를 위해서나 생명을 바쳐 양육해야 생명을 잉태할 수 있습니다. ‘단장(斷腸)의 애환’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유래는 양자강에서 어부가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서 배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 광경을 본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돌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양자강 하류로 배를 따라 내려갑니다. 얼마나 어미 원숭이가 간절하게 애원하듯 소리를 질렀던지 소리소리 지르다가 결국 어미 원숭이가 죽었는데 죽고 나서 배를 열어보니 장이 토막토막이 나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어린 생명과 다음 세대를 위하여 피 끓는 애환이 있어야 합니다. 장이 끊어지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3:28에는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길을 울며 안타까워하며 따라가는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자녀를 위한 눈물, 간절한 기도, 헌신, 피를 토하는 절박함,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를 위하여 우는 만큼 자녀 때문에 웃을 수 있습니다. 땀을 흘린 만큼 수확할 수가 있습니다. 고통만큼 기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녀를 위한 고통, 다음 세대를 위한 수고와 땀은 절대로 헛되지 않습니다. 수고와 땀이 없는 부모는 언젠가는 울 날이 올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세대를 위하여 수고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한탄한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다음 세대를 어머니처럼 품어 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무엘상서 1:28은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라고 합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드리면서 한 기도입니다. 우리도 한나가 사무엘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드리고 만든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 미국교회의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16세기 유럽의 개혁신학을 이어받은 17세기의 영국 청교도 신학이 18세기에 미국의 에드워즈에 와서 절정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는 참으로 신앙적이고 경건한 위인이었습니다. 그의 가문은 지금까지 8대가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부통령이 2명이며, 주지사가 3명이고, 대학총장을 13명을 배출했는데 그 중에 예일대학교 총장이 2명입니다. 인구 6백만 이상 대도시의 시장이 3명, 장차관급 공무원이 82명, 변호사가 149명, 판검사가 48명, 목사가 116명, 의사가 68명, 교수가 65명, 세계적인 사업가가 75명, 뛰어난 발명가가 25명 탄생 되었습니다. 참 대단한 가문이지요? 무엇이 이 가문을 이렇게 만든 것일까요? 조나단 에드워즈를 연구한 학자들은 말합니다. 첫째는 신앙이고, 둘째는 교육이고, 셋째는 사랑의 마음(loving heart)이라고 합니다.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하고 잘 교육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했던 그 가문이 이렇게 훌륭한 가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19세기 미국에 가장 경건치 못한 가정으로 맥스 죽스(Max Jukes)의 가정을 듭니다. 그의 후손 560명을 추적하여 조사하였습니다. 그 자손들 가운데 310명이 거지로 죽었고, 150명이 범죄자이었는데 그 중에 7명이 살인자였습니다. 100명이 술주정뱅이이었고, 가계에 속한 여자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몸을 파는 창녀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조나단 에드워즈의 가계처럼 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얼마든지 맥스 죽스의 가정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납니까? 신앙과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하면 에드워즈의 가문처럼 될 것입니다. 반면에 그렇게 하지 않고 악하게 키우면 죽스의 가문처럼 죽습니다.

  우리의 자녀들, 다음 세대를 품어 아이들이 세상으로 빠져나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들을 품어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해야 합니다. 현재 미국은 주류교단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류교단들은 전자기술과 스크린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주역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교단을 탈퇴하여 독립교회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정신에 적응하지 못하는 교단은 쇠퇴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포용하지 못하는 교단에서 교회는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시대를 포용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에게서 다음 세대는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서울의 일류대학교들이 있습니다. 이 학교들은 합격만 하면 아무리 멀어도 지방에서도 그 학교로 보냅니다. 왜 아무리 멀어도 보냅니까? 좋은 학교니까 그렇습니다. 멀다고 좋은 대학교에 안 보내는 부모를 보셨습니까? 멀다고 좋은 대학교에 안 가는 학생을 보셨습니까? 질 좋은 교회학교를 만들어야 합니다. 다음 세대를 위하여 목숨을 주면서 사랑하고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세대의 책임입니다.

결론

  자녀를 위한 부르짖음과 다음 세대를 품는 마음은 하나님이 반드시 들으십니다. 수넴여인은 아들이 죽었습니다. 엘리사가 왔을 때에 아들을 살려달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그 어머니의 간절한 소리를 듣고 아들을 살려줍니다. 예수님은 나인성으로 들어가시다가 한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셨습니다.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은 장례행렬을 멈추시고 아들을 일으켜 살려 주셨습니다. 가나안의 수로보니게 여인은 딸이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애원합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고통을 보시고 그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예수님은 절대로 자녀를 위한 간절한 소망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한 부르짖음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자녀, 우리의 다음세대를 위한 눈물과 애정과 땀과 피와 수고와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줄로 믿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낫다는 말을 합니다. 딸이 엄마보다 예쁘다는 말을 합니다. 이 모두가 듣기 좋은 말이 아닙니까? 그 반대가 되면 모욕적인 말입니다. 우리보다 다음 세대가 나아야 합니다. 더 잘 되어야 합니다.

  우리보다 다음 세대가 낫다는 말을 듣도록 잘 품고, 사랑하고, 가르치고, 생명을 많이 잉태하는 한 해의 우리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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