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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엎드려서 눈을 뜨다 (민 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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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서 눈을 뜨다 (민 24:1-9)

[발람은 자기가 이스라엘에게 복을 빌어 주는 것이 주님의 눈에 좋게 보였다는 것을 알고는, 매번 으레 하던 것처럼 마술을 쓰려 하지 않고, 대신 광야 쪽으로 얼굴만 돌렸다. 발람은 눈을 들어, 지파 별로 진을 친 이스라엘을 바라보았다. 그 때에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내렸다. 그는 예언을 선포하였다. “브올의 아들 발람의 말이다. 눈을 뜬 사람의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말이다. 환상으로 전능자를 뵙고 넘어졌으나, 오히려 두 눈을 밝히 뜬 사람의 말이다. 야곱아, 너의 장막이 어찌 그리도 좋으냐! 이스라엘아, 너의 사는 곳이 어찌 그리도 좋으냐! 계곡처럼 뻗었구나. 강가의 동산 같구나. 주님께서 심으신 침향목 같구나. 냇가의 백향목 같구나.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고 뿌린 씨는 물을 흠뻑 먹을 것이다. 그들의 임금은 아각을 누리고, 그들의 나라는 널리 위세를 떨칠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그에게는 들소와 같은 힘이 있다. 그는 나라들, 곧 대적들을 집어삼키고, 대적들의 뼈를 짓부수며, 활을 쏘아 대적들을 꿰뚫을 것이다. 엎드리고 웅크린 모양이 수사자 같기도 하고, 암사자 같기도 하니, 누가 감히 일으킬 수 있으랴! 너에게 복을 비는 이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 것이다.”]

• 여전히 남은 고난의 잔

출애굽 공동체가 지나온 여정을 돌아보면 그 곤고함이 절로 느껴집니다. 숙곳을 출발하여 홍해를 건넌 그들은 수르(Shur) 광야, 바란(Paran) 광야, 시내(Sinai) 광야, 신(Zin) 광야를 거쳐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습니다. 기가 막힌 세월이었습니다. 먹을 음식과 물이 늘 부족했고, 낯선 이들의 출현에 놀란 토착부족들의 적대감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들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으로 모세의 지도력이 시험에 부쳐지기도 했고, 호르 산에서부터 홍해 길을 따라 행군하는 도중에 많은 백성이 불뱀에 물려 죽기도 했습니다. 돌고 휘어지고 구부러진다는 뜻의 迂餘曲折이라는 말로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단한 시간에도 끝은 있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은 세렛 골짜기로부터 아르논 강변을 따라 행군하여 마침내 사해 동편 모압의 경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이 지척인 곳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아모리 왕 시혼을 물리치고 바산 왕 옥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종착역이 눈앞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이 마셔야 할 쓴 잔은 비워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래 전부터 그곳에 터잡고 살았던 모압 백성들은 메뚜기 떼처럼 몰려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공포심에 사로잡혔습니다. 모압 사람들이 미디안 장로들에게 한 말은 그런 정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이 큰 무리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있습니다. 마치 소가 들판의 풀을 뜯어먹듯 합니다.”(민22:4)

모압 왕 발락은 이 비상사태를 해결할 길은 신의 힘을 비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주술사인 발람을 초대합니다. 자기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발람이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면 이스라엘 백성을 쫓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발락의 수하들이 많은 복채를 가지고 발람에게 찾아갑니다. 그러나 발람은 “이집트에서 나온 그 백성은 복을 받은 백성이니 저주하지 말라”(민22:12)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발람은 발락의 초대를 단호히 거절합니다. 절박해진 발락은 더 많은 사절과 복채를 보냅니다. 그러자 발람은 그의 초대를 받아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들과의 동행을 허락하셨다고 말하지만, 다음에 나오는 사건을 보면 발람의 자의적인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욕심에 이끌려 가서는 안 될 길을 가는 게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 누가 보는 자인가?

발람은 다음 날 아침에 자기 나귀에 안장을 얹고 모압의 고관들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노하신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그의 길을 가로막으셨습니다. 하지만 욕심의 안개에 갇힌 발람은 천사를 보지 못합니다. 천사를 본 것은 그가 탄 나귀였습니다. 공포심에 사로잡힌 나귀는 천사를 피하려다가 길을 벗어나 밭으로 들어가자, 발람은 나귀를 때려 길로 들어서게 합니다. 주님의 천사가 두 포도원 사이의 좁은 길을 막아서자, 나귀는 한쪽 벽으로 몸을 붙였습니다. 그 바람에 발람의 다리가 벽에 긁혀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발람은 또 나귀를 때렸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이번에는 더 이상 피할 공간이 없는 좁은 길을 막아서자 나귀는 발람을 태운 채 땅에 주저앉았습니다. 발람은 화가 나서 지팡이로 나귀를 때렸습니다.

그러자 나귀의 입이 열려 발람에게 항의를 합니다. “제가 주인어른께 무슨 잘못을 하였기에, 저를 이렇게 세 번씩이나 때리십니까?”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여시자 그는 비로소 칼을 빼들고 서있는 주님의 천사를 보았습니다. 발람은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습니다. 천사는 발람이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기에 막으려고 왔노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린 발람은 비로소 “제가 가는 것이 잘못이면, 저는 되돌아 가겠습니다”(민22:34b)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천사는 뜻밖에도 모압의 고관들과의 동행을 허락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답니다. “너는 내가 말해 주는 것만 말하여라.”

• 저주와 축복 사이

발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발락은 아르논 강 경계에 있는 조그마한 성읍에까지 마중을 나갑니다. 그가 얼마나 절박한 심정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발락은 소와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발람에게 보내 호의를 보입니다. 다음 날 발람은 바알 신당에 올라가 제단 일곱을 만들고,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잡아 바치고는 하나님의 신탁을 기다립니다. 마침내 신탁이 내렸을 때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는커녕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말을 합니다. 발락은 발람이 이스라엘의 위용을 보고 놀랐다고 생각하여 그를 이스라엘 진영의 일부만 보이는 곳으로 안내하여 가서 저주를 부탁합니다. 그래도 발람은 “나는 축복하라 하시는 명을 받았다. 주님께서 복을 베푸셨으니, 내가 그것을 바꿀 수 없다.”(23:20). 심지어 그는 “야곱에 맞설 마술은 없다. 이스라엘에 맞설 술법도 없다”(23:23)고 말합니다. 믿었던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자 발락의 분노와 절망감은 깊어만 갑니다.

저주를 위해 불려온 사람이 오히려 축복의 말을 합니다. 이 사건은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기까지 반역을 거듭해 온 옛 세대 즉 광야 세대는 우울한 종말을 향해 나아가지만, 새로운 희망의 세대가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자라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에게는 신실함이 없을지라도 언약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절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가로막을 수 있는 힘은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 눈을 뜬 사람

그런데 세 번째 신탁을 보여주는 오늘의 본문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나옵니다. 발람은 자기가 이스라엘에게 복을 빌어 주는 것이 주님의 눈에 좋게 보였다는 것을 알고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매번 으레 하던 것처럼 마술을 쓰려 하지 않고, 대신 광야 쪽으로 얼굴만 돌렸다.”(24:1)

영험한 주술사 발람은 이제 더 이상 신에게 치성을 바침으로 신의 뜻을 구하거나 신의 뜻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신 하나님께 눈을 돌릴 뿐입니다. 성경은 그가 지파별로 진을 친 이스라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영이 내렸다고 말합니다. 영에 충만한 발람은 자신을 “눈을 뜬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 “환상으로 전능자를 뵙고 넘어졌으나, 오히려 두 눈을 밝히 뜬 사람”이라고 일컫습니다. 이 말은 불교가 말하는 ‘見性’을 떠올리게 합니다. 견성이란 하늘이 품부해준 ‘性’ 즉 본바탕을 본다는 말입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만나기 전까지는 스스로를 보는 자로 여겼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눈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귀도 보는 칼든 천사의 모습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화려했던 주술사로서의 과거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그 넘어짐이 오히려 그에게는 복이었습니다. 넘어졌으나 오히려 두 눈을 밝히 뜬 사람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살다보면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어떤 일을 도모하다가 난관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때야말로 우리 눈을 뜰 기회입니다. 다마스커스로 가던 사울은 환한 빛과 만나 말에서 떨어졌고,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을 가렸던 일시적 어둠은 영원한 밝음에 눈뜨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만이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넘어진 후에 일어나 눈이 밝아지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 했습니다. 욕심의 안개에 가려진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어보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세 번이나 반복된 발람의 신탁을 잘 살펴보면 그의 눈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티끌처럼 많은 야곱의 자손’(23:10)을 보았습니다. 객관적 관찰입니다. 다음에는 ‘암사자처럼 일어나고 수사자처럼 우뚝 서는 백성’(23:24)을 보았습니다. 역사의 추세에 대한 눈뜸입니다. 그의 눈이 온전히 열렸을 때 그는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미래를 내다봅니다. 그 모습은 강가의 동산으로, 냇가의 백향목으로, 물이 넘치는 물통으로, 물을 흠뻑 먹은 씨앗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24:5-7). 신앙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마침내 발람에게서 우리는 놀라운 고백을 듣습니다. “너에게 복을 비는 이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 것이다”(9). 놀라운 반전입니다. 축복과 저주는 마술사인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 정신차리지 않으면

여기까지만 보면 발람은 철저히 변화된 사람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를 부정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민수기의 뒷부분을 보면 그는 브올의 여인들에게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해 주님을 배신하게 하도록 한 장본인입니다(31:16, 계2:14). 발람은 결국 모압 편에 서서 모사 노릇을 하다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신약성서는 발람을 ‘불의의 삯을 사랑한 불의의 아들'(벧후2:15)로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에 눈을 떴던 발람의 이 기막힌 전락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발람의 비극을 저는 두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사람들 앞에 자신을 큰 자로 드러내고 싶은 허영심입니다. 허영심이 그를 하나님을 등진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물질에 대한 욕심입니다. 탐욕은 우상숭배라지요? 허영심과 탐욕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보다 더 컸기에 그는 스스로 전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욕심이 그의 눈을 가렸습니다. 그는 이전보다 더 눈먼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된”(눅11:26) 셈입니다. 사람의 마음처럼 부패하기 쉬운 것이 없습니다. 발람은 달콤한 유혹에 빠져 죽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가 직면했던 유혹은 지금도 성도들에게 일상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도 발람의 전철을 밟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인생이라는 광야 길에 지친 분들이 계십니까? 거듭되는 불운으로 낙심한 이들이 있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마라의 쓴물을 지나고 나면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칠십 주가 서있는 엘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넘어져 울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까? 울음을 그치고 나면 눈이 밝아질 것입니다. 인생의 어떤 때를 지나고 있든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절망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서 눈을 뜨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눈을 뜬 후에 허영심과 과도한 욕심과 작별하고 주님의 빛 안에서 걸어가는 사람이야말로 복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복을 비는 이마다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멋진 축복의 사명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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