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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요 2:1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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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요 2:1 ~ 11)

아라비안나이트로 널리 알려진 천일야화(千一夜話)는 중동지역의 설화의 원류가 되었습니다.
사산(sassanian) 왕조의 샤리아르 왕은 왕비가 흑인노예와 바람을 피우는 모습을 목격하고 왕비와 노예를 처형합니다. 이로 인하여 왕은 여자에 대한 불신감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왕은 모든 여성을 증오하면서 처녀와 하룻밤 동침하고 나면 다음 날 아침에 처형했습니다. 이 일을 3년 동안 계속하자 백성들의 원성이 극에 달하였고 도성 안에는 처녀들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이 일을 전해들은 큰 딸 세헤라자데(Scheherazade)는 왕의 학살을 막기 위해 자기가 왕을 섬기겠다고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동생 두냐쟈드(Dunyazade)를 밤에 불러 자신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게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왕은 너무 재미가 있어서 그녀를 죽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천 하룻밤을 계속하게 됩니다. 마침내 왕은 세헤라자데와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건은 한 밤에 재미로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천일야화로 수많은 처녀들의 생명을 구했다고 해서 천일야화가 인간의 생명을 구한 구원의 메시지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합리론자들의 도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육신의 생명을 살리는 정도에서 머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에 이르게 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한 지역에 국한되거나 한 시대에 제한된 영생의 진리가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 모든 지역, 모든 종족에게 차별이 없습니다.
여기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알리는 첫 번째 기적이 가나에 있는 혼인잔치에서 나타났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는 비교적 즐겁고 흥분된 축제의 무드로부터 시작됩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잔치 집에 필수적인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포도주의 부족은 큰 결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았고 물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는 포도주가 모자라는 것을 알고 예수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했습니다(3절). 그 때 예수는 자기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4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에게 이미 정해 놓은 시간(the time) 혹은 기간(period)을 의미하는데 사람이 정한 것이 아닌 하나님과 그리스도 자신이 정해놓은 시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5절)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시키든지 믿고 행하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거기 하인들에게 두 세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에다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물을 아구까지 채웠습니다. 그리고 연회장에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했지만 예수께서 하라는 대로 물을 떠서 아구까지 채웠던 하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 포도주는 자신들이 종전에 먹던 것보다 더 맛좋은 것이라고 연회장은 신랑을 불러서 이 잔치집의 포도주에 대하여 극찬했습니다.

Ⅰ. 그대로 해야 더 좋은 것으로 변화를 받습니다.

1) 질적(質的) 변화입니다.
본문 2장 9절에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이라고 했습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물과 포도주는 성분부터가 다른 것입니다. 놀라운 변화는 예수를 온전하게 믿을 때 일어 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와 불신의 세계는 출발부터가 다른 것입니다.

2) 맛의 변화입니다.
본문 2장 9절은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라고 했습니다.
물맛과 포도주 맛이 다르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믿음으로 보는 감각의 세계와 불신자가 보는 감각의 세계는 혼재 될 수 없는 확실한 구별입니다.

3) 용도의 변화입니다.
물과 포도주의 사용 목적은 분명히 다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의 일을 하고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더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의의 도구로 사용되지만 불신자는 사탄이 주장하는 멸망의 도구가 됩니다.

4) 색의 변화입니다.
포도주는 붉고 물은 무색입니다. 아무 색이 없는데서 붉은 색으로의 변화입니다.

5) 가치의 변화입니다.
물과 포도주의 가치는 확연히 구별됩니다. 물과 포도주는 교환가치도 다르고 사용가치도 다릅니다.
믿는 자의 삶은 값있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의 도구로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 삶은 상급이 있는 삶입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그 의의와 목적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예수의 보혈로 씻음 받은 삶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 값에 따르는 상당한 가치가 있는 삶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의 이적으로 인하여 예수께서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의(義)와 기쁨을 체험하도록 했습니다.


Ⅱ. 그대로 해야 기적을 체험합니다.

본문 2장 9-10절에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잔치할 때 가장 중요한 품목인 포도주를 연회장이 맛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연회장이 맛 본 포도주가 물로 된 포도주였습니다. 이 포도주는 연회장에게 가져가기 전에는 깨끗하게 하는 결례용 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여기 연회장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고 했습니다. 물 떠온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비롯된 그 과정의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 2장 7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연회장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처음 표적은 그가 인류의 죄악을 대속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것을 시작해서 사시고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산채로 승천하신 것입니다. 승천하신 후에 보좌우편에 앉으시고 장차 정하신 때에 심판의 주로 재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생애(기적)에 차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관한 비하의 신분과 승귀의 신분을 기적의 동일선상에서 보아야 합니다.
연회장은 신랑을 불렀습니다. 여기 불렀다는 원문의 말씀은 소리쳐서 외쳐 불렀다는 뜻입니다. 연회장이 다급하게 신랑을 불러서 포도주의 맛이 이전의 포도주 맛보다 탁월하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일반적인 관례는 손님들이 아직 술이 취하지 않아서 미각이 그대로 있을 때 좋은 술을 내놓습니다. 손님이 취하고 나면 질이 낮은 술을 내놓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연회장은 신랑을 극찬하고 있습니다. 이 잔치집은 포도주를 마시는 일반적인 관례가 무너지는 잔치 집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첫 제자를 부르실 때도 시키는 대로 한 결과 기적을 보았습니다.

누가복음 5장 4-6절에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고 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오신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한 결과 기적을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21장 6절에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고 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한 결과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났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도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8장 50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혈루증 환자의 고침을 목도하고 자기 딸에 대하여 치유될 수 있다는 기대에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집에서부터 들려오는 딸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소식을 들으시고 믿음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에 대한 절대 신뢰를 놓치지 말고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방성대곡할 때 예수님께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했습니다. 이 때 아이가 죽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하실 때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므로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가 완전히 살아난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엘리사의 선지 생도 아내는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하여 기적을 보았습니다.
열왕기하 4장 3-6절에 『가로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대로 옮겨 놓으라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 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 오라 아들이 가로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고 했습니다.
아람나라에 구국의 공신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의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한 결과 기적을 보았습니다.

열왕기하 5장 10절에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고 했습니다.
열왕기하 5장 14절에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Ⅲ. 그대로 해야만 예수가 우리의 남편 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본문 2장 9-10절에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신랑이 반드시 결혼잔치를 벌여야만이 그 결혼이 법적인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아무리 동거를 수년간 했더라도 그 결혼이 부모의 허락을 받지 못했거나 혼인잔치를 하고 혼인 계약서를 쓰지 않으면 그 결혼은 무효가 됩니다. 이러한 예는 함무라비 법전이나 에쉬눈나의 문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잔치집의 모든 것은 신랑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연회장이 신랑을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잔치집에서는 신랑이 처음에는 질 좋은 술을 대접하다가 술이 취한 뒤에 나쁜 술을 가져오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런데 좋은 것을 나중에 내어오는 것에 대해 연회장이 신기하고 놀라워서 신랑을 불렀던 것입니다.

잔치집에 모자라는 포도주는 그곳 신랑이 책임지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잔치집에 포도주를 공급한 사람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표적은 진정한 의미에서 잔치집의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알리는 묵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랑이기 때문에 잔치집에서 신랑이 해야 될 일을 대신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포도주 문제를 언급했을 때 예수께서는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계시록 19장 7절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그의 공생애에 첫 이적사건에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인정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도들은 신랑과 신부의 혼인잔치로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가나의 첫 이적과 마지막 때의 어린 양 혼인 예식 사이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을 가르켜 『신랑의 친구』라고 말했습니다(요 3:28-29). 자기 선생보다 예수께 더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가기 때문에 의기소침하여 찾아온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28-29절에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신랑, 신부, 신랑 친구가 언급되고 있는데, 물론 신랑은 예수님, 신랑의 친구는 세례 요한 자신, 그리고 신부는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을 비유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나님의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것이 신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산술방법으로 생각하고 결론 내리는 것이 수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물리적 사유로 사색하고 검토하고 분석한 후에 취사선택하는 것을 과학이라고 합니다. 그대로 해야 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대로 하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해도 믿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우리 속담에 절대로 그렇게 안 된다는 말로 '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 혹은 '내 손톱에 뜸을 뜨겠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참하게 못 박혀 죽었습니다. 사흘 만에 살아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이래도 못 믿겠습니까? 이래도 못 따르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은 성경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믿고 따라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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